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52화 (152/241)
  • #152 해피 버스데이(11)

    나는 미간을 좁히며 모니터를 살폈다.

    ‘어제보다 더 낮아진 것 같은데……?’

    중요한 바이탈 사인인 산소수치가 무척 낮다.

    열심히 산소를 공급하고 있는데도 90을 넘지 못하고 있다.

    아이젠멩거 환자는 낮은 산소수치에 적응해서 평생을 살아온다.

    그래서 산소 운반을 늘리기 위해 몸에서는 적혈구 생산을 늘린다. 마치 산소가 부족한 고도의 히말라야산맥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임신 뒤에 찾아온 더 심한 저산소증은 평생을 적응해 온 아이젠멩거 산모라도 힘들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저산소증은 본인만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태아에게도 전달된다.

    그래서 산모와 태아 모두를 위해 산소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은 그 수치가 너무 낮아 보였다.

    ‘큰일인데…… 생각보다 너무 낮은 것 같은데. 주치의 선생님도 알고 계신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레지던트 선생님에게 여쭤보러 막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콜록, 콜록."

    노을 누나가 깊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삐삐삐―

    그와 동시에 산소수치가 급격히 떨어진다.

    노을 누나는 격하게 고개를 돌리며 피가 섞인 가래를 뱉었다.

    ‘객혈(hemoptysis)이다!’

    나는 황급히 콜벨을 누른 뒤 외쳤다.

    "선생님, 여기 정노을 환자 세츄레이션 60대까지 떨어지고, hemoptysis 합니다!"

    타닥―

    저 멀리 스테이션에서 몇 명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동안, 노을 누나는 익숙하다는 듯 입에서 나온 객혈을 닦아 내고는 혼자서 심호흡을 천천히 한다.

    "후우― 후우―"

    그러자 산소수치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한다.

    놀라서 달려온 유정남 레지던트 선생님은 재빨리 환자의 상태를 살핀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네블라이저(Iloprost, 폐동맥 고혈압용 흡입 치료기)를 건넨다.

    "스읍―"

    노을 누나가 치료기를 입에 대고 빨아들이자, 산소수치는 아주 천천히 원래의 90 언저리까지 회복된다.

    "이 환자분은 아이씨유(ICU, 중환자실)에서 봐야 할 것 같은데……."

    유정남 선생님이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한다.

    잠시 후, 진정된 노을 누나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한다.

    "……요새 이렇게 객혈이 나오는 게 더 흔해진 것 같아요, 선생님."

    그러자 유정남 선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맞아요.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산모도 아이도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32주 차.

    아이젠멩거 산모 환자의 늘어난 적혈구 수치와 근육 괴물이 된 폐는 계속해서 객혈을 만들어 낸다.

    "선생님. 저는 그렇다 치고…… 이대로 가면 제 아이에게 위험한 것 맞죠?"

    "……."

    유정남 선생님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자칫하면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 엄마의 죄책감을 돋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기에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예, 아기도 지금 엄마랑 똑같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배 속에서 자라며 더 커질수록, 점점 더 많은 피가 폐를 거치지 못하고 헛돌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혈액 속의 산소는 줄어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아는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저산소증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태아의 발달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마 태아는 배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 이 세상은 원래 이렇게 힘든 곳이에요……?’

    하지만 유정남 선생은 짐짓 표정을 밝게 하며 위로하듯 말했다.

    "안 그래도 이따 오후 5시에 회의가 있으니 바로 결과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자리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세요."

    그렇게 말한 뒤 내게 손짓을 한다.

    나는 노을 누나를 다독여 준 뒤 금방 뒤따라갔다.

    "인턴 쌤, 이따 5시에 컨퍼런스 있는 거 알고 있죠?"

    "예. 평소처럼 동8 의국에서 준비하면 되는 거죠?"

    "오늘은 별관 3층 대회의실에서 할 거예요."

    "대회의실이요?"

    내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산부인과 말고도 순환기내과, 흉부외과, 마취과, 소아과 교수님들 다 모일 거예요. 정노을 환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디스커션(discussion, 회의) 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의자 모자라지 않게 준비해 놓고."

    내 눈이 커졌다.

    도대체 몇 개의 과가 모인다는 거야?

    이 정도 규모의 컨퍼런스는 거의 없는 일이다.

    역시 아이젠맹거 산모를 관리하여 건강한 태아의 출산까지 이끌어 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연국대병원의 내로라하는 교수님들이 모이는 회의니, 무언가 해답을 내놓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인턴 두 분이 가서 30분 전에는 준비해 줘요."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문득, 예전에 보았던 어느 SF 영화의 카피가 생각났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 * *

    딸각―

    나는 스위치를 올렸다.

    곧 새하얀 형광등이 차례로 깜빡이며 커다란 대회의실을 밝힌다.

    드르륵―

    나는 책상을 배열하고 의자를 채웠다.

    그동안 미선 누나는 프로젝터를 켜고 스크린을 내리고 있다.

    인턴들이 늘 준비하는 일인데, 오늘은 평소보다 큰 회의실이다.

    "선한아, 몇 명 온다고 했었지?"

    "일단 넉넉하게 20명은 온다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요?"

    "우와, 환자 한 명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데…… 나 이렇게 많은 과에서 모이는 컨퍼런스 회의는 처음 들어가 봐."

    곧 여러 과의 사람들이 한 공간으로 모여들었다.

    히어로 영화를 보면, 각지에서 도착한 캐릭터들이 작전본부에 멋있게 등장하는 장면들이 있다.

    지금도 그와 다르지 않다.

    산부인과의 협진 요청하에, 여러 히어로들이 소환되듯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히어로.

    <순환기내과>.

    아이젠멩거 환자가 가지고 있는 폐동맥 고혈압(pulmonary hypertension)에 대해서 관리하는 주체이다.

    임신 과정에서 일어나는 몸 안의 변화(physiologic change)에 맞게 각종 약들을 조절한다.

    두 번째 히어로.

    <흉부외과>.

    현재 환자는 선천성 심장 질환을 가지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흉부외과에서 어릴 적 수술했어야 하는 질환이다.

    흉부외과에서는 이렇게 성인이 되어 버린 선천성 심질환 환자를 구찌(GUCH, Grown―Up Congenital Heart disease) 환자라고 부르며, 순환기내과와 함께 특별관리하게 된다.

    세 번째 히어로.

    <소아과>.

    지금은 산부인과에서 관리하고 있는 태아는, 출산이 되고 난 직후부터 소아과의 관리를 받게 된다.

    신생아중환자실(NICU)를 총괄 관리하는 교수가 직접 등장했다.

    네 번째 히어로.

    <마취과>.

    출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이다.

    정노을 환자의 출산이 시작되고 나면, 바이탈(vital sign)을 책임지게 된다. 출산을 위한 마취 후에, 각종 모니터링과 약물 조절은 마취과의 몫이다.

    그리고 지금 환자를 책임지고 있는 <산부인과>까지.

    그렇게 총 5개의 과에서 힘을 합치려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조금씩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어릴 때 TV 만화에서 5단 합체 로봇을 볼 때도 이보다 멋있지는 않았다.

    "시작할까요?"

    모두 둘러앉자, 산부인과 교수님이 운을 띄웠다.

    나는 미선 누나와 가장 뒤쪽의 간이의자에 앉았다.

    ‘ㄷ’ 자로 배열된 테이블에는 각 과의 교수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뒤편 배열된 의자 중간중간 내가 아는 레지던트들의 얼굴도 보였다.

    저 멀찍이, 내과에서 온 김뱀이 보인다.

    맞은편 의자의 흉부외과 송유주 선생님은 나를 힐긋 본 뒤 다시 시선을 스크린 화면으로 향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창양대병원에서 온 정노을 환자, 상태가 매우 안 좋습니다."

    더 이상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EMR을 통해 많은 협진을 주고받아서인지,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모두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환자는 이제 곧 32주 차에 들어섭니다."

    파앗―

    스크린 위에 환자의 활력 징후가 적혀 있는 차트가 펼쳐진다.

    산부인과 교수의 말이 이어진다.

    "32주 차가 hemodynamic burden(혈류역학적 부하)이 피크를 찍는 시점이다 보니, 객혈도 심해지고 있어요."

    "이야, 세츄레이션 63이에요? 저렇게 산소를 주고 있는데?"

    산부인과 교수님의 말 중간에 수다스러운 말투로 훅 들어오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허준임 교수.

    예전에 강남역 사건의 징계위원회 때, 내 편을 들며 변호해 주었던 고마운 교수님이다.

    산부인과 교수가 대답한다.

    "객혈 한번 하기 시작하면, 저렇게 떨어집니다. 지금 하이플로우에서 세츄레이션(saturation, 산소포화도) 90 정도 나와요."

    그러자 허준임 교수가 탄식을 했다.

    "어허, 난리 났네…… 지금 pulmonary HTN(폐동맥 고혈압) 약들은 맥스(max, 최대) 용량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이씨유(ICU, 중환자실)에서 봐야겠는데요?"

    마침 ‘폐동맥 고혈압’의 이야기가 나오자 곧바로 순환기내과 교수님이 말을 받았다.

    "환자의 RL shunt(통로를 통한 단락)가 갈수록 증가하고, Heart failure(심부전) 진행하는 중……."

    환자의 혈역학적 상태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진다.

    "어쨌든 약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기는 한데,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봅니다. 분만을 해야 하는 상황 같아요."

    즉 순환기 내과의 주장은.

    <아기를 빨리 빼내야 한다.>

    일단 이 방향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견 없이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곧 순환기내과 측에서 질문이 이어진다.

    "태아 상태는 괜찮나요?"

    "지금 예측되는 태아의 몸무게 (estimated weight)는 하위 13프로, 그리고 복부둘레(abdominal circumference, 태아의 성장을 평가하는 중요 요소)는 하위 5프로 이하입니다. betamethasone(태아의 폐성숙을 도와주는 약)이 투입되고 있기는 한데, 더 이상 태아를 이렇게 저산소증 상태에서 가만히 둘 수는 없습니다."

    산부인과의 대답은.

    <태아는 이미 성장도 더디고, 안 좋다. 아무튼 빨리 빼내야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아과 교수님이 입을 열 차례였다.

    "맞습니다. 32주면 저희 NICU(신생아집중치료실)에서 충분히 케어 가능하니까, 분만 날짜만 잡아 주시면 저희가 어텐딩(attending) 해서, 애기는 바로 인큐베이터로 받아 ?NICU로 옮겨서 보겠습니다."

    소아과의 의견은.

    <나만 믿고 꺼내라!>

    일단 안전하게 꺼낼 수만 있으면 소아과 쪽에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소리다.

    소아과 교수님의 그 말에서 든든함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꺼내야 할까?

    "분만은 전신마취 하고 씨섹(c―sec, 제왕절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취과 선생님 어떻게 보세요?"

    그러자 아까부터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마취과 교수님이 턱을 괸 채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음, 전신마취 하는 도중에 SVR(온몸의 저항)이 떨어지면 또 문제가 될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전신마취가 나을 것 같긴 합니다."

    수술 과정에서 환자의 목숨을 책임지는 마취과.

    그래서 마취과의 소견은 정말 중요하다.

    모두들 그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폐동맥 혈압 모니터링은 당연히 필요할 것 같고요. 요새 새로운 마취약이 발달해서 옛날처럼 분만 자체가 리스키(risky, 위험)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교수님의 미간이 좁혀진다.

    "……씨섹 분만 중에 출혈이라든지 하는 게 걱정이에요. hemodynamic(혈역학)이 변하면 환자의 지금 심장과 폐가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거든요. 이미 심장과 폐는 한계점에 근접해 있으니까요."

    <과연 산모가 수술을 버틸 수 있을까?>

    이 까다로운 질문에 과연 누가 답할 수 있을까.

    교수들 모두가 약속한 듯이 입을 다물고, 약간의 정적이 흐른다.

    모두 생각이 많아 보였다.

    ‘역시 교수님들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구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화에 집중했다.

    연국대병원의 교수들이 이렇게 까다로워할 정도라면, 전 세계 어느 병원을 가도 쉽지 않겠지.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어, 그래서 말인데. 지금 한 가지 방법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

    나는 고개를 들었다.

    모두들 소리를 낸 흉부외과 허준임 교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이 회의실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나올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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