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해피 버스데이(8)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노을 누나?"
차트에 적힌 이름을 보고 설마 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니…….
코에 산소줄을 하고 있는 노을 누나는 반가워하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세상에…… 정말 선한이 너 맞구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얼떨떨하게 굳어 버렸다.
그와는 달리, 노을 누나는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내 손을 흔들었다.
"선한아, 너 여기 산부인과…… 의사였어……?"
말투에 반가움이 들어가 있었지만, 노을 누나는 한 문장을 말하는데도 호흡이 가빠 보였다.
"아니, 나 아직 인턴이야."
"그렇구나. 세상에……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만나니?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 전인가?"
10년.
강산이 한 번 변할 시간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옛날 모습 그대로…… 라고는 말 못 하겠다.
임신한 몸으로 병상에 있는 노을 누나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때, 옆에 있던 보호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보, 아는 분이셔?"
"응. 내 친구 신선도 알지? 고등학교 때 제일 친했다고 했던…… 얘가 선도 남동생이야."
노을 누나는 조금씩 쉬어 가면서 힘들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아, 그렇구나."
안경을 쓴, 선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생님, 저희 아내 잘 부탁드립니다."
거의 90도로 허리를 접는 듯한 인사였다.
나도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은 뒤, 노을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정말 오랜만이라 반가운데 지금 회진 준비해야 해서……."
"그래 선한아. 나중에 또 얘기하자."
"교수님 금방 오실 거야."
"알았어."
노을 누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웃을 때 움푹 들어가는 보조개를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내가 어릴 때 보던 그 노을 누나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우."
병실에서 나온 뒤, 나는 복도에서 숨을 돌리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 아는 사람을 환자로 보게 되는 건 처음이네…….’
세상 참 좁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일진이 이상하더라니, 이런 일이 일어날 징조였나?
인연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기는 한 모양이다.
‘뭐, 병원에서 만난 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의사들에게 지인 환자가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오죽하면 이라는 표현도 있으니까.
의사들이 자신에게 ‘특별한’ 환자를 대할 때 오히려 치료 결과가 더 안 좋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나 같은 인턴이 치료를 책임질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내가 일하는 곳에 아는 환자가 들어왔다는 것 자체만으로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그런데 여태껏 산소줄을 하고 있는 산과 환자를 본 적이 있었던가?’
고위험 산모 집중 치료실에서 산소줄을 한 채 숨이 차 보이는 노을 누나.
반가운 것도 사실이지만, 걱정이 앞섰다.
왜 굳이 출산을 앞두고 우리 병원으로 옮겼을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명확했다.
* * *
"뭐? 아는 사람?"
잠시 후, 스테이션에서 내 말을 들은 미선 누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정신없이 진행된 아침 회진이 끝난 직후였다.
"어머, 어머. 웬일이니? 하필이면 너 인턴 할 때 산부인과에 딱 찾아왔대?"
"저도 많이 놀랐어요."
"대박이다 증말…… 아는 사람을 저렇게 병상에서 만났으니 선한이 네가 마음이 안 좋겠다."
미선 누나의 말대로였다.
아마 평범하게 길에서 만났다면 훨씬 더 반가웠을 것이다.
그런데, 병원에서라니.
복잡미묘한 감정에 아직도 마음이 잘 진정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그렇게 묻는 미선 누나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글쎄…… 노을 누나를 뭐라고 한마디로 설명해야 할까?
어릴 적 지인.
둘째 누나의 친구.
간단히 요약하면 그렇지만, 한때는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이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둘째 누나 친구인데, 10년 전쯤에 무척 친했던 사이예요."
"누나 친구?"
"예. 저 고등학교 1학년 때 공부 진짜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많이 도와주기도 했어요."
"와…… 그럼 너한테 정말 고마운 분이잖아?"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나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백의신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무작정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시절.
당시의 나에게 그건 얼토당토않은 꿈에 가까웠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당황했을 만도 하지…… 공부를 손에서 놓다시피 하고 방황하던 녀석이 갑자기 의사가 되겠다고 했으니까.’
모든 것이 막막했다.
놓친 공부를 따라가려 해도,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 한 방울 온 적 없는 황무지를 처음부터 개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나를 도와준 것이 노을 누나였다.
당시 명문대 학생이었던 노을 누나는 한동안 내 공부를 도와주었다.
노을 누나는 마치 끈기 있는 농부처럼, 내 머릿속 황무지에 밭을 갈고 물을 주고 씨를 뿌렸다.
<선한아, 포기하지 마! 내가 가르쳐 줄게.>
노을 누나는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그 모습에 영향을 받아, 나도 오기가 생겼다.
덕분에 내 안에 숨어 있던 근성이 일깨워졌던 것이다.
한마디로, 노을 누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 그때 노을 누나 아니었으면 저는 절대로 의사 못 됐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저한테 은인이나 다름없……."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미선 누나가, 입을 샐룩대면서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선한아, 너 말하는 표정이 되게 애틋하다~?"
"……그래요?"
"응. 네가 그런 표정으로 말하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나는 피식 웃었다.
물론 가끔 둘째 누나가 그렇게 날 몇 년째 놀리기는 한다.
<너 내 친구 좋아했었잖아>라고.
하지만, 노을 누나는 그런 단어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에이, 그래도 사춘기 때 아는 누나한테 과외를 받았으면 두근거리는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을 거 같은데?"
"……."
훅 들어오는 팩트 공격에 뼈를 맞았다.
솔직히,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노을 누나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나보다 네 살 위인데, 그때는 한참 성숙한 어른으로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이성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닮고 싶은 사람>이라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물론 내 눈앞의 미선 누나는 이미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입원해 있는 환자한테 이런 표현이 실례일 것 같지만…… 뭐랄까, 되게 분위기 있으시더라."
"누나, 콜폰 울려요."
"얘 좀 봐, 말 돌리네, 호호호! 아무튼 무사히 출산하시고 퇴원하셨으면 좋겠네."
그러더니 마침 걸려 온 콜을 처리하러 나를 남겨 두고 사라졌다.
‘그나저나 큰일이 아니면 좋겠는데…….’
나는 이제서야 차트를 다시 차분하게 열어 보았다.
아까 정신이 없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용을 다시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차트의 내용을 자세히 읽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WHO class II PAH
Eisenmenger syndrome d/t unrepaired PDA
……
‘폐동맥 고혈압(PAH)과 아이젠맹거 증후군(Eisenmenger Syndrome), 동맥관 개존증(PDA) 때문이라고?’
분명 알고 있는 질환명이다.
그런데, 믿고 싶지 않았다.
선천성 심장 질환.
한마디로,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문제가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 문제가 교정이 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이다.
‘노을 누나가 선천성 심기형이었다니…….’
전혀 몰랐다.
물론 예전에도 그리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운동을 잘 못하기도 했고.
우리 동네에서 떠나 이사를 갈 때도 그리 건강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정도로 심각한 질환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후우…….’
나는 얼굴을 쓸었다.
오랜만에 보았다고 반가워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정노을이라는 환자는 생각보다 꽤 심각한 상태인 것으로 보였다.
‘……일단 좀 더 읽어 보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모니터 위에 펼쳐진 차트에 집중했다.
하지만 까만 건 글씨고 하얀 건 화면이었다.
미선 누나의 말대로, 인턴이 알아듣기에는 꽤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다.
‘여태까지 봤던 환자 차트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 같은데…… 이따가 책이라도 찾아보면서 알아봐야겠다.’
지잉―
그때, 산과 출입구가 열렸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때마침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등장했다.
"……송유주 선생님?"
호리호리한 체구.
야생 고양이 같은 인상.
흉부외과 송유주 선생님이 산과에는 무슨 일일까?
저벅, 저벅.
언제나처럼 최단 동선으로 스테이션으로 걸어오더니, 인사도 없이 곧바로 묻는다.
"김가을 환자 몇 호실 몇 번 자리야?"
"……정노을 환자 말씀하시는 거 맞죠?"
"어, 그래."
사람 이름 못 외우는 건 여전하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고위험 산모 집중 치료실 2번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내가 갈게."
송유주 선생이 발걸음을 바삐 하며 사라졌다.
별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협진 때문에 오셨구나!’
협진.
컨설트(consult)라고도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컨설팅이라 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조언을 구하는 것을 뜻한다.
병원에서도 비슷하다.
특정 과(科)에 입원하더라도, 다른 과와 관련된 부분은 적극적으로 협진을 의뢰하게 된다.
이 경우, 선천성 심장 질환에 관련되어 있으니 당연하게도 <산부인과> 입장에서 <흉부외과>의 협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흉부외과뿐만 아니라, 심장과 관련된 <순환기내과>, <소아과>에도 협진은 의뢰되어 있었다.
송유주 선생님은 흉부외과 교수님의 회진에 앞서서 환자를 살펴보러 온 것이다.
척후병을 보내서 진지를 미리 확인하듯, 먼저 레지던트가 와서 환자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협진 과정의 기본이었다.
‘마침 잘됐어. 차트만 보고는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많았는데…… 송유주 선생님이 왔으니 물어봐야겠다.’
때마침 흉부외과의 에이스가 찾아오니 믿음직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환자를 보고 나온 송유주 선생님이 보이자,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저, 선생님."
"왜?"
"혹시 바쁘세요? 방금 보신 정노을 환자분, 아이젠맹거 증후군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요."
"차트 보면 알잖아."
그걸 왜 몰라?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이다.
이 사람은 가끔, 인턴들의 지식이 자기와 동일한 레벨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선천성 심장병 때문에 생기는 질환이라는 것을 대략적으로는 알긴 하지만……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막 산과 바깥으로 나가려던 송유주 선생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대뜸 첫마디부터 충격적이었다.
"사망률 50퍼센트."
"……예?"
"폐동맥 고혈압 산모가 출산을 할 때의 사망률이야."
나는 제자리에서 돌처럼 굳고 말았다.
송유주 선생의 냉정한 말이 이어졌다.
"원래 저 환자는 임신을 해서는 안 되는 몸이야. 지금 목숨 걸고 아기를 배 속에 가지고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