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48화 (148/241)
  • #148 해피 버스데이(7)

    "……."

    원래는 두 사람에게 그런 말들을 하려 했다.

    <아이 갖기를 포기하지 말라>.

    <희망이 있다>.

    하지만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직 아이를 잃은 커다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선생님? 무슨 일로……."

    "……아, 죄송합니다."

    나는 한발 물러섰다.

    지금은 다음 임신에 대해 말할 타이밍이 아니다.

    더군다나, 인턴인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해 봤자 그들에게는 들리지도 않겠지.

    "……잠시 다른 분인 줄 알고 착각했네요, 실례했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잉―

    문이 닫힌다.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을 태우고 1층을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보내 버렸어.’

    물론, 이대로 내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꼭 아이가 있어야만 부부의 미래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내가 보지 못한, 중력에 이끌려 갔을 때 보였을 다른 미래에, 부부는 다른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환자가 본인이 원하는 행복을 누렸으면 한다.

    생각의 끈을 놓지 말고,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자.

    이미 퇴원한 환자이지만, 분명 내가 도울 길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 *

    "다녀왔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퇴근 후 오랜만에 집으로 향했다.

    저번 주만 해도 여유가 없었지만, 산과 인턴 스케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누군가 나를 활기차게 부른다.

    "동생, 어서 와!"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온다.

    이건 큰누나다.

    요리의 달인이 끓이는 찌개는 냄새부터 다르다.

    "누나, 언제 왔어?"

    "아까 낮에. 배고프지?"

    "응. 찌개 냄새 맡으니까 더 배고프다."

    "으이구, 못 본 새 살이 더 빠졌네. 오늘 두 그릇 먹고 가라."

    큰누나가 내 볼을 쓰다듬었다.

    히히.

    큰누나 앞에서는 왠지 없던 어리광도 만들어서 부리고 싶어진다.

    그때, 저 멀리서 무언가 쪼그만 생명체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삼초오오온!"

    폴짝!

    작은 꼬마가 내게 뛰어올라 안긴다.

    못 보던 사이 키가 컸다.

    아이들은 정말 못 보던 사이 콩나물처럼 무럭무럭 자라는구나.

    나는 웃으며 내 허리에 매달리는 조카를 안아 올렸다.

    "윤아 잘 있었어?"

    "삼촌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우리 윤아 많이 보고 싶었어요~"

    최근 며칠.

    산과 인턴을 하면서 나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예전에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단순히 ‘귀엽다’는 느낌만 들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대체 어떻게 낳아서 키웠을까……?>라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에 대한 경외심이 먼저 든다.

    "누나, 존경스럽다."

    "갑자기 무슨 소리래?"

    "모든 엄마들은 존경받아야 돼."

    "참 내. 병원에서 또 무슨 일 있었나 보네? 손 씻고 얼른 밥이나 먹으러 와."

    큰누나는 내 뻘소리에 피식 웃었다.

    잠시 후.

    우리 가족들은 오랜만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나는 가위로 윤아에게 고기반찬을 작게 잘라 주며 큰누나에게 물었다.

    "매형은 잘 지내시지?"

    "그럼. 요새 회사에서 너 자랑하고 다니느라 바쁘대."

    "내 자랑?"

    "너 요새 다시 인터넷에서 유명해지는 중이라며. 곡담에서 칼부림까지 막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야?"

    "아, 그거……."

    나는 뺨을 긁적였다.

    사실, 곡담에서 있었던 일을 가족들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혹시 주목받을까 봐 언론 취재도 피했다.

    그런데도 기사가 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당시에 시장에서 목격한 사람들도 많았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강남역 사고 영상의 조회수가 다시 역주행을 하며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9월에 이 동영상 다시 보러 온 사람?

    ―손!

    ―저요 ㅋㅋ

    ―우엉 우어엉!!

    ―나도 기사 보고 왔음. 그런데 또 여기 나오는 의사들이 칼부림 막은 거임?

    ―이번에 동영상은 안 찍혔는데, 기사 내용 읽어 보면 맞는 것 같은데요―가는 곳마다 사건이 터지네 ―마가 끼었나?

    ―명탐정 고난 아님? ㅋㅋ

    ―ㅋㅋㅋ

    한동안 잠잠해지고 있던 나와 근욱이의 이름은 다시 수면 위로 오르는 중이었다.

    강남역 사고에 이어서 곡담 칼부림까지, 한 해에 두 번이나 큰 사고를 막은 의사들이라고 말이다.

    "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런 일도 있었어."

    내가 대충 얼버무리려 하자 큰누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에, 진짜인가 보네. 너 어쩌려고 그런 위험한 짓을 했어?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그러자 옆에서 김치찌개를 먹던 둘째 누나가 내 종아리를 발가락으로 꼬집었다.

    "언니 말 들었지?"

    "아, 아파."

    "깝치지 말라고. 니가 무슨 미드 주인공이냐?"

    "안 그래도 요새는 그냥 평범한 병원 인턴으로 지내고 있어."

    정말이다.

    나는 요새 지극히 평범한 ‘인턴1’이다. 가끔 미래를 보긴 하지만.

    "요새는 무슨 과 도냐?"

    "나 지금 OBGY…… 산부인과."

    "산부인과?"

    가족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이고. 산부인과에서 그럼 애 낳는 거 도와주는 거냐? 그 뭐여, 탯줄도 끊고……."

    아버지의 말씀에 뒤이어 가족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이 쏟아진다.

    산부인과라 하면 큰누나도 참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예전에 출산할 때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이를 잘 낳아서 키우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가족들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산과에서 일하니까 누나 윤아 가졌을 때 생각도 많이 나더라. 누나 고생 많았잖아."

    "에이~ 다 겪는 일인데 뭐."

    누나는 유난 떨지 말라는 듯 웃었다.

    하지만, 산과에서 나는 느낀 바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주변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임산부 본인조차 그렇게 인식하지 않지만…….

    임산부는 기본적으로 <환자>로 인식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임신과 분만의 과정을 여자라면 자연스레 겪는 일반적인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사람이 2차성징을 통해서 털이 나고 키가 자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산부인과 의사가 보는 모든 산모는 <환자>다.

    임신이라는 것이 산모에게는 10개월에 달하는 매우 긴 여정이며, 그 긴 여정 속에서 의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수많은 변화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야, 우리 동생 그런 말 하는 거 보니 완전 의사 선생님 같고 멋있네."

    큰누나가 대견하다는 듯 내 옆에서 등을 두드린다.

    그때 가만히 밥을 먹으며 듣고 있던 윤아가 벌떡 일어났다.

    "나도 의사 선생님 될 거야!"

    갑자기?

    내가 어리둥절하자 큰누나가 웃으면서 말한다.

    "너 따라서 의사 되고 싶다고 난리야 요새. 공주 드레스보다 의사 가운을 더 좋아한다니까?"

    "그래?"

    "윤아야, 삼촌한테 그거 보여 줘 봐."

    그러자 윤아가 식탁 옆으로 걸어가더니, 마룻바닥에 누워 있는 인형을 향해 달려가며 내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다들 비켜 주세요~ 의사입니다~!"

    누나들은 깔깔대며 웃었고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아니, 애한테 뭘 보여 준 거야?!

    * * *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예지몽이 아닌, 그냥 남들처럼 평범한 꿈이었다.

    꿈이 흔히 그렇듯, 기억 속 조각들이 제멋대로 뒤섞인 채 흘러갔다.

    노을 지던 운동장. 해진 운동화. 여름 끝자락의 매미 소리. 교복을 입고 집으로 향하던 길. 바람, 향기…….

    <선한아.>

    누군가 나를 불렀다.

    그것은, 어딘가 따스하고 그리운 음색이었다.

    * * *

    "……."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6시 20분.

    언제나처럼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꿈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하네…… 옛날 사진들을 잔뜩 봐서 그런가?’

    어제저녁, 오랜만에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진 앨범을 뒤적여 보았다.

    산부인과에 있다 보니 내가 몇 주에 몇 kg로 태어났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3.4킬로그램으로 오후 8시 22분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키는 52cm, 두위는 32.5cm.

    앨범 첫 장에는 신선한이라는 아기의 출생정보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몇 장을 넘기자, 어릴 때 사진들이 보였다.

    그러고는 시간에 따라 커 가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가족들끼리 여행을 갔을 때의 사진.

    돌아가신 엄마 사진.

    내 중학교 졸업 사진 등등…….

    내 지나간 옛날 모습들을 눈으로 확인하자 온갖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그런가, 괜히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출근이나 하자."

    쿵―

    "악."

    막 일어서려다 이층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그동안 CPR 상황이 아니고서야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정신 차려야지."

    그런데, 하루의 시작이 요상했다.

    어제 준비해 놓은 새 수술복을 입으려고 보니, 하의의 허리가 조여지지 않았다.

    가끔 이럴 때도 있다. 수술복은 공용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새로 뽑아야겠다.’

    드르륵!

    복도에 비치된 자판기가 새 수술복을 뱉어 낸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의 주머니가 다 뜯어져 있다.

    뭐가 이래?

    게다가 출근하는 길에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내가 타니 경보음이 울렸다. 두 번 연속으로.

    ‘오늘따라 왜 이러지?’

    삑―

    산과 앞에 도착해 IC카드로 문을 열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잘 인식이 되지 않는다.

    몇 번 찍어 보다가 답답해서 목줄을 벗었는데, 헐겁던 이음새가 툭 하고 끊어졌다.

    "……."

    ……뭔가 홀린 것 같다.

    이런 날은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달까.

    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어제 당직이었던 미선 누나에게 인사했다.

    "누나 안녕하세요."

    "선한아, 안녕. 커피 마실래? 네 것도 사 놨어."

    "어, 고마워요."

    나는 반갑게 미선 누나가 주는 커피 잔을 받았다.

    커피 좋지.

    이걸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컵을 기울이는 순간.

    주르륵―

    턱 밑으로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흐른다.

    "아 뜨."

    "헉, 선한아 괜찮아?"

    "으, 휴지 좀요."

    "아니…… 가끔 이렇게 테이크아웃 뚜껑이 불량일 때가 있더라니까."

    정말 오늘은 이상한 날이군.

    나는 미선 누나가 주는 휴지로 턱을 닦으며 물었다.

    "어젯밤에는 별일 없었어요?"

    "응, 별일은 없……."

    미선 누나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좀 특이한 환자가 있긴 있었구나."

    "특이한 환자요?"

    "응. 다른 병원에서 트랜스퍼(transfer) 온 환자가 한 명 있는데."

    트랜스퍼.

    즉 다른 병원에서 전원을 왔다는 것이다.

    물론 임산부가 임신 도중 다른 산부인과로 옮기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처음엔 작은 병원을 다니다, 출산일이 가까워지자 큰 대학병원으로 옮기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은 출산 2~3개월 전에는 병원을 옮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환자는…….

    "출산이 임박해서 병원을 옮겼다구요?"

    "으응.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진짜 역대급으로 출산이 어려운 케이스인가 봐. 아마 오늘 컨퍼런스 회의 할 때도 얘기 나올걸?"

    미선 누나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보통 환자가 아닐 것 같다.

    ‘역대급으로 출산이 어려운 환자라…… 곧 회진이니까 어떤 환자인지 한번 볼까?’

    딸깍, 딸깍―

    나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러다가, EMR(전자의무기록)을 확인하던 손을 멈추었다.

    ‘정노을?’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노을이라는 이름은 내게 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까.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닌데 신기하…… 잠깐. 나이까지 같다고?

    ‘설마, 아니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우연의 일치일 거야.

    그렇게 애써 생각하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목울대가 울렁인다.

    "어때,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아?"

    "예?"

    "차트 보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나는 보고도 어려워서 잘 모르겠더라고."

    미선 누나가 옆에서 묻는다.

    정작 내 눈에는 환자의 이름만 보이고 다른 내용은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신 차리자. 일단 곧 회진이니까 머뭇거릴 시간은 없고…….’

    드르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이 회진을 돌기 전에 미리 환자들에게 준비를 시키는 것 또한 인턴들의 일이다.

    저벅, 저벅.

    병동을 향해 걷는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환자를 보러 가면서 이렇게 긴장된 적이 있었던가 싶다.

    심지어 환자 베드 앞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머뭇거려야 했다.

    "실례합……."

    그때.

    촤악―

    인기척을 느꼈는지, 안쪽에서 먼저 커튼이 열렸다.

    "……!"

    환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놀란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

    그녀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반가운 듯, 입꼬리가 점점 올라간다.

    "너…… 혹시 선한이 아니니?"

    이 목소리.

    이 말투.

    잊을 리 없었다.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 속 얼굴이, 조금 세월이 더해진 채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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