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해피 버스데이(6)
"환자분, 이번이 마지막 임신 시도일 거예요."
"아……."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환자와 보호자가 대화할 때 얼핏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딱 이번까지만 시도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아이를 포기하자고.
유정남 선생이 훌쩍이느라 빨개진 코를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임신 시도를 세 번이나 실패했으니…… 환자분 나이도 적은 편이 아니라서요."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에 봉축 수술로 자궁경부를 묶었는데도 결국 버티지 못하고 조산이 되었다는 것.
그 말은 즉, 환자의 자궁경부가 무척 약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번 조산을 겪고 나면 다음 임신 시 조산의 위험은 더욱 커진다.
"물론 다음 번에 잘될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환자 본인이 겁 날 거예요. 특히 이번에는 마음의 상처도 클 거고…… 아이고, 저 휴지 좀 더 주세요."
패앵!
유 선생은 다시 한번 코를 풀었다.
한편,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아이를 정말 간절히 원하던 부부였는데…….’
결국 포기하는 게 최선인 걸까?
물론 성공 확률은 낮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0인 것만은 아니다.
이럴 때, 의사들은 환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
<희망을 잃지 말고 다시 시도해 보자>
그렇게 말해야 할까?
그럼, 다시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 환자가 느낄 좌절감은?
……정답은 없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
환자의 문제에 확답을 내려 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다만 환자의 상태와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설명해 주고, 본인이 어떤 결정을 하든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주치의나 담당 교수라면 환자에게 어떻게 말했을까…….’
엇?
그때, 눈앞이 흐려졌다.
구불텅―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다.
난데없이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어김없이 파앗 하고 미래의 장면이…….
* * *
"……!"
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두 발로 서 있는데도, 마치 물속에 둥둥 떠 있는 듯한 부유감이 느껴졌다.
‘……여긴 어디지?’
나는 고개를 들고 흠칫 놀랐다.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커다란 어둠 속.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장면들이 멀리서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실존하는 공간이 아닌, 추상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이랄까?
정체불명의 비디오 아트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구름이 가득 낀 어두운 밤하늘 속에 던져진 것 같기도 했다.
‘뭐야…… 여태까지 봤던 미래 예지와 다르잖아?’
정신 차리자!
일단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 주위에 수많은 가느다란 ‘선’들이 보인다.
선들은 뻗고, 구부러지고, 교차하며 복잡한 모양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선들은 하나같이 앞쪽을 향해 쭉 뻗어 나간다.
‘이건 대체 무슨…… 안내선 같은 건가?’
선이 너무 많다.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흥분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그때, 내 몸이 어느 하나의 선을 따라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스르륵―
마치 중력에 이끌리는 듯한 기분이다.
이대로 편안히 몸을 맡기면, 분명 어딘가로 자연스레 도달하겠지…….
그렇게 서서히 몸이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가만. 그러고 보니…….’
수많은 선들 중.
유난히 <밝은 선>이 딱 하나 있었다.
마치 불 꺼진 극장의 커튼이 살짝 열린 틈으로 빛이 들어오듯…….
신비한 황금색 빛이 어둠을 가로질러 단 하나의 선을 밝히고 있었다.
‘저 빛나는 선은 뭐지?’
<어서 이리로 와>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흥미롭고 궁금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확인해 보자.’
스윽―
나는 중력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을 따라 이동했다.
본능이라 해야 할까.
직감적으로, 그 선의 끝에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파앗―
곧, 그 목표점에서 흐릿하게 재생되고 있던 장면이 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봄바람처럼 따스한 기운을 느끼며, 나는 빛무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
베란다를 통해 햇살이 비치는 낯선 집의 거실에서, 나는 눈을 떴다.
내가 그동안 보아 왔던 미래의 장면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밝고 따스했다.
"이리 와, 우리 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영희 환자.
바로 조금 전, 병원에서 안타까운 일을 겪었던 환자다.
그런데 지금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를 향해 팔을 활짝 펴고 있다.
나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
"!"
아기였다.
생후 1년쯤 되었을까?
봄볕을 받으며, 매트 위에 앉은 아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댜?"
볼살이 통통한 여자아이.
너무 귀엽다.
<사랑스러움>이라는 단어를 돌돌 뭉쳐서 아기로 빚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인데, 부모의 눈에는 얼마나 예쁠까 싶다.
"자, 윤정아 일어나! 까까 먹자!"
"까까……."
아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들썩, 들썩―
금방이라도 일어서려는 듯 엉덩이를 들썩인다.
그 옆에서 아빠는 스마트폰을 들고 흐뭇한 표정으로 촬영을 하고 있다.
"어어, 그렇지, 일어난다!"
"꺄―!"
벌떡!
아이가 일어서 걷는다.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으며, 기어코 매트를 아장아장 가로질러 엄마의 품에 폭 안긴다.
"우리 윤정이, 첫걸음마 성공!"
"와아!"
아이를 들어 올리는 부부의 표정에 행복이 가득하다.
지켜보는 나조차도 마음이 따스해진다.
미래를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꿈속에서, 아무도 다치거나 아프지 않고 있다.
마치 홈비디오 속의 한 장면처럼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 이어질 뿐이다.
"우리 윤정이는 누굴 닮아서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요?"
"아빠 닮았대요~!"
"아니에요, 엄마 닮았대요~ 그쵸?"
부부의 말에, 아기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까까에 집중했다.
"까까!"
다시 한번 함박웃음이 번진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 부부가 번갈아 가며 아기에게 뽀뽀 세례를 한다.
"우리 윤정이 너무 예쁘지?"
"응."
"내가 낳았지만, 우리 윤정이 커 가는 거 보면 너무 신기해…… 그동안 이 행복 모르고 어떻게 살았나 싶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꿈이 끝나 간다!’
조금씩, 조금씩.
눈앞의 장면이 어두워진다.
마치 이 행복한 미래는 두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하듯…….
봄날의 신기루처럼, 덧없고 아련하게 어둠 너머로 사라져간다.
그런데 그때.
마지막으로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내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만약 그때, 내가 임신을 포기했다면 이런 행복도 없었겠지?"
* * *
파앗!
나는 현실로 빠져나왔다.
따스한 햇살은 온데간데없다.
그 대신, 눈앞에는 하얀 형광등이 비추는 병원 스테이션이 보인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꾸욱―
나는 눈두덩이를 눌렀다.
어느새 내 팔에는 잔소름이 돋아 있었다.
봄날의 환상 같은 꿈속에 있다가 갑자기 빠져나오니, 병원이 유독 쌀쌀하게 느껴진다.
‘분명 안영희 환자가 미래에 아이를 가지게 되는 장면이었는데…….’
물론 잘된 일이다.
만약 미래가 그렇게만 흘러가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잖아?
여태까지 내가 보았던 것은 죄다 불길한 미래뿐이었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거나, 의료사고가 일어나는 등등…….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행복한 미래였다.
게다가, 그 전에 어둠 속에서 보았던 수백 갈래로 뻗어 나가던 <선>들.
이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왜 그래요?"
유정남 선생님이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눈에 뭐가 들어가서요."
"‘호’ 해 드릴까?"
"아뇨, 이제 괜찮습니다."
나는 친절한 유정남 선생에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편,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운 패턴!
그동안 내 능력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이 더 있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아, 그래요. 당분간 할 일 없으니까 숙소 가서 눈 좀 붙여요. 새벽까지 고생 많았어요."
"예, 감사합니다."
꾸벅.
나는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맑은 공기가 있는 곳으로 가자.
그리고, 내가 겪게 된 새로운 현상을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정리해 보자.’
저벅, 저벅―
나는 산과 병동을 나서며 생각했다.
여태까지 내가 본 미래예지는, 조금씩 다르긴 해도 하나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문제] = 곧 환자가 위험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정답] = 미래를 바꿔야 한다!
……여태까지는 이랬다.
그런데, 처음으로 달라졌다.
내가 본 미래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것이 없다. 오히려 그런 미래를 어떻게든 만들고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굳이 나에게 이걸 보여 준 이유가……?’
저벅, 저벅―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암센터와 본관을 잇는 기다란 통로에까지 도착했다.
야심한 새벽.
통로에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고 있었다.
그때, 복도 벽면에 걸려 있는 큰 시화(詩?)가 눈에 들어왔다.
두 갈래의 오솔길.
그리고 그 옆에는 유명한 시가 적혀 있었다.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랗게 단풍 든 숲
두 갈래 길이 있었네
둘 다 갈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한참 서서 쳐다보았네
…….
학생 시절 공부할 때 숱하게 보았던 시인데, 지금 읽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그래, 갈림길.’ 여태까지는 모두 <확실히 일어날 미래>를 보여 줬다면…….
이번에는, 많은 미래 중 <하나의 가능성>만을 보여 준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해석하자 앞뒤가 들어맞기 시작했다.
‘안영희 환자는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낳고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나한테 보여준 거야.’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그 행복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뭔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걸까? 마치 중력을 거스른 것처럼?’
꾸욱.
나는 재킷 주머니 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물론 불친절한 힌트다.
하지만, 분명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어떻게든 안영희 환자를 도와보자!’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방법은 내가 찾아낼 것이다.
지금은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 * *
다음 날.
안영희 환자는 퇴원 수속을 밟았다.
나는 마침 산과 병동을 나서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우리, 이제 그만 포기하자. 더 이상은 못 할 일 같아."
"……그러자."
부부는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까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심정은 이해가 간다.
이번 조산으로 인해 상처가 컸으니,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미래를 봤어.’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
분명 내가 본 미래 속에서, 부부는 행복하게 아이를 안고 있었다.
띠잉!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요!"
탁―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얼른 엘리베이터를 붙잡았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저……."
나는 막 입을 열려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