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46화 (146/241)

#146 해피 버스데이(5)

"인턴 쌤, 고생했어요!"

유정남 선생님이다.

수술모를 벗으니, 머리카락이 납작하게 눌려 있다.

모자 바깥으로 삐져나와 있던 머리카락만 살짝 말려 올라가 있는데, 그 모습이 정감 있게 느껴진다.

"커피라도 한잔하시죠!"

"제가 타 드리겠습니다."

"어허, 됐어요. 가만히 계세요. 믹스커피는 제가 달인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정말 잘 웃는 선생님이군.

나는 그를 따라 스테이션 옆에 붙어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씨섹(c―sec, 제왕절개) 처음이었죠. 직접 겪어 보니 어때요?"

"방금 제가 뭘 봤나 싶습니다."

"하하! 맞죠? 저도 처음에 그랬어요."

그는 강아지처럼 머리카락을 털며 유쾌하게 웃었다.

한편, 나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그동안 여러 수술들을 보아 왔지만 씨섹은 정말 특이했다.

사람의 몸에서 또 하나의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 이토록 신기한 경험일 줄 몰랐다.

"저도 매일같이 보지만 아직도 신기할 때가 있어요."

쪼르르―

유 선생이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따른다.

정성 들여 1mm 단위로 물 높이를 정확하게 맞추는 모습이다.

인스턴트커피를 저렇게 진심으로 타는 사람은 처음 본다.

"그나저나 선한 쌤은 인턴 2회차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인가 봐요?"

응?

내가 뭘 했지.

특별히 칭찬받을 만한 기억은 없는데.

내가 의아해하자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던데요? 마치 몇 번은 씨섹(c―sec, 제왕절개) 어시 해 본 사람처럼? 배를 살짝 눌러 주는 것도 그렇고."

"아……."

"어디서 배운 거예요?"

"혼자 수술방을 상상하면서 인계장을 몇 번 읽어 봤습니다. 며칠 동안 씨섹 관련 영상을 좀 보기도 했고요."

"이야, 2주 동안 산과 인턴 하려고 영상까지 찾아봤단 말이에요? 감동인데?"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진짜로 나에게 감동을 받은 듯했다.

원체 감성이 풍부한 사람인지, 날 바라보는 눈빛에 감격의 물결이 가득 찬다.

나는 이참에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그런데 34주 아기가 원래 그 정도 크기인가요?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놀랐습니다."

"하하, 오히려 34주치고 꽤 컸던 거예요."

찌익―

그는 능숙하게 믹스커피 두 봉지를 뜯었다.

그리고 종이컵에 붓더니 동시에 두 잔의 커피를 휘휘 저으며 말한다.

"한 주, 한 주가 태아들한테는 엄청 중요해요. 그래서 어떻게든 배 속에 오래 있다가 나오게 하려는 거고…… 자, 여기."

"감사합니다."

나는 유 선생이 건네준 커피를 마시고 놀랐다.

맛있다!

역시 달인인가?

똑같은 믹스커피를 타도 맛이 다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정말 달인이시네요."

"하하. 레지던트 되고 나서 이런 것만 늘어요."

유 선생이 머리를 긁적인다.

간호사들과의 사이도 좋은 것을 보면, 이 사람의 원만한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동안 산과에서 여러 가지 케이스를 많이 보셨겠네요."

"그렇죠. 특히 기억나는 건, 작년 이맘때였나……."

호로록―

그는 믹스커피를 마시며 기억을 더듬었다.

"병원 화장실에서 갑자기 출산해서 변기에 아기를 빠트린 산모도 있었거든요."

"예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실화야?

만약 산부인과 의사가 말해 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놀랍죠?"

"와……."

"저희도 놀랐고, 당연히 산모도 기겁했죠. 화장실에서 갑자기 아기가 쑥 나오는데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래서, 아기는 괜찮았어요?"

아연실색한 나의 질문에 그는 뺨을 긁적였다.

"저희도 걱정 많이 했거든요. 혹시 감염이 되었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웬걸, 엄청 건강했어요!"

"휴, 다행이네요."

"애기 보러 갔는데 힘이 얼마나 세던지. 신생아 베드 박차고 뛰어오를 기세더라니까요. 하하하."

생명력이라는 건 대단하구나.

산과에서는 정말 다이내믹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이런저런 일이 있긴 해도…… 막상 아기 건강하게 태어나는 모습 보면, 세상에서 제일 뿌듯하죠."

그는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그 미소로 알 수 있었다.

이 선생님은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구나.

"뭐, 반대의 경우에는 산부인과 괜히 왔다고 후회할 때도 있지만요."

그가 커피를 홀짝이며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회?

그건 무슨 경우일까.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 * *

안영희.

나이 서른일곱의 환자.

자궁경부 무력증으로 인한 조기 출산 위험으로, 벌써 일주일째 입원해 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유산을 겪은 임산부이기도 했다.

‘아직 21주차밖에 안 됐는데 입원해서 퇴원을 못 하고 있다니…….’

나는 환자의 차트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21주차.

즉, 아직 임신 중기다.

배 속에서 태아가 골격이 갖추어지는 시기지만, 가장 중요한 폐의 성숙(Lung maturation)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이다.

만약 이 시기에 조기출산을 하면?

너무 빨리 세상에 나온 아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나마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잡으려면 24주 이상은 버텨야 한다.

기적적으로 아이를 살린 연국대병원의 기록은 25주차, 380g 아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이 환자의 아기를 살리려면 어떻게든 엄마의 자궁 속에 있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안영희 환자분, 교수님 곧 오실 거예요."

"예……."

나는 매일 한 번씩 회진 가이드를 할 때마다 안영희 환자를 만날 수 있었다.

환자는 항상 누워 있었다.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오늘은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교수님……."

산모의 병명은 <자궁경부 무력증>.

임신 중에는 자궁의 입구, 즉 자궁 경부가 단단해야 한다.

그래야 아기가 자궁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자궁경부 무력증> 환자는 자궁경부에 힘이 없다.

즉,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진통도 없이 아기가 밀려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수술은 잘됐으니까 최대한 버텨 봅시다."

환자가 받은 수술은, 일명 맥도날드 시술(McDonald cerclage).

흡사 복주머니의 끈을 조이듯, 자궁경부를 꿰매어 막아 주는 것이다.

회진이 끝난 후 자리를 옮기는데, 커튼 뒤로 안영희 환자가 보호자와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여보, 미안해……."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당신이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자꾸 미안하다는 거야."

<미안하다>.

내가 산과의 환자들로부터 듣는 아주 흔한 표현이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런 말을 하는 환자들이 정말로 많았다.

유산을 만들 수 있는 질환은 원인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궁경부 무력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 엄마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본인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세 달을 입원했다가도 잘 분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잖아. 힘내 보자, 여보."

"이번엔 진짜 아기 낳고 싶어, 세 번째잖아……."

"잘할 수 있을 거야."

세 번째 임신 시도.

얼마나 아이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까?

여러 번 실패를 겪고,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하늘이 선물을 주시기를 바라며…….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그날 밤 일어났다.

나는 다른 환자의 EKG(심전도) 촬영을 위해 고위험 산모 집중 치료실에 있었다.

그때, 맞은편 침대에서 갑작스럽게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안 돼……!"

절망에 찬 목소리였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나는 심전도 기계를 잠시 세워 두고, 소리가 들리는 침상의 커튼을 살짝 열어 보았다.

"……!"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놀라서 굳고 말았다.

산모가 누워 있는 침대의 중앙에서 다리 쪽으로, 시트가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서…… 선생님!"

환자는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자궁경부 무력증으로 맥도날드 오피(McDonald op.) 후에 질 출혈이라니…….

‘……봉합해 놓은 자궁경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야!’

나는 콜벨을 눌러 스테이션에 빠르게 상황을 알리고, 레지던트 선생님에게도 연락했다.

"선생님, 여기 안영희 환자분 출혈이 있어요!"

* * *

……나는 분만장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뒤의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병원 측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묶어 놓은 자궁경부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아직 교수님이 도착하기 전이었지만, 유 선생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산모에게 조용히 설명했다.

<……실을 풀어야겠습니다.>

자궁수축 억제제 등의 약을 아무리 부어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임신을 위해서라도 묶여 있는 것을 풀고, 아기를 잃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1주째.

아이는 세상 바깥으로 나왔다.

아니, ‘밀려 나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아기의 몸에는 움직임이 아예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

무거운 침묵이 분만장에 내려앉았다.

이럴 때, 보통 아이를 산모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

가족들이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조용히 포에 싼 뒤 바깥으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때.

누워 있던 환자가 힘없는 손길로 유정남 선생님의 옷깃을 붙잡았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우리 아기 한 번만 안아 볼 수 있을까요?>

<…….>

유 선생은 고민했다.

가족들의 마음에 상처가 남을 수 있고, 자칫하면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의 간절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마음 정리하실 시간 가지시고…….>

그렇게 말한 뒤, 바깥에서 기다렸다.

간호사들도 말없이 대기했다.

남편은 커튼 안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와 작별인사 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정남 선생님은, 태어나서 그렇게 조용하고 슬픈 울음은 처음 들어 봤다고 했다.

5분 후.

남편이 눈물을 훔치며 커튼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희……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작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 * *

한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에 관련된 일화다.

어느 날,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그에게 내기를 걸었다.

만약 6단어로 소설을 써서 자신들을 울릴 수 있다면 자네가 이긴 거라고.

그러자 헤밍웨이는 잠시 고민한 후, 즉석에서 이런 소설을 지어내었다.

―팝니다: 아기 신발, 신겨본 적 없음

그는 내기에서 이겼다.

비록 진위 여부는 불명확하지만,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자식 잃은 슬픔은,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이라는 것이다.

"아으, 저 휴지 좀요."

패앵!

유 선생은 코를 풀었다.

새벽 3시의 스테이션 옆 휴게실, 나는 그에게 휴지 몇 장을 더 뜯어 주었다.

이러다가 휴지 한 통을 다 쓸 기세다.

"제가 말한 게 이런 거예요. 가끔 이런 환자랑 아기들 볼 때마다 진짜…… 산부인과 괜히 왔나 싶다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휴지 뭉치로 코를 훔쳤다.

의사들도 사람이다.

하루에 수많은 환자들을 보지만, 그중에서도 안타까운 환자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

……물론 모든 환자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이니까.

그래서 가끔 의사들은 정이 없거나 무뚝뚝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연히 감정이 있다.

특히 이렇게 어린 아기가 눈 한번 떠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면, 울음을 참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유 선생은 내가 만나 본 가장 감성적인 의사였다.

"그러면 안영희 환자분은, 다음 번 임신 기회를 생각하셔야 하는 걸까요?"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

산모가 아이를 분만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10달간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일들은 매우 많다.

임신성 고혈압.

자궁경부 이완증.

양막 조기 파열.

태반 조기 박리.

자궁내번증.

등등…….

몇몇 산모들은 이 가시밭길에 걸려 넘어져 완주에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병원의 도움으로 잘 이겨 내는 경우도 많다.

안영희 환자는 비록 몇 번의 유산이 있었지만 다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글쎄요, 안영희 환자는 아마도……."

내 질문에, 유 선생은 다소 애매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문에 도움을 주고 계신 이경노 산부인과 전문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