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해피 버스데이(3)
탁탁탁!
의료진들이 분주히 오간다.
스테이션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바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3호실 환자 콜벨이요, 진통 왔다고 하는데요?"
"페인(labor pain) 걸린 모양이네? 제가 가서 볼게요!"
"교수님 연락드릴 테니, 분만장 준비해 주세요! 이 환자 애 나올라고 하는 것 같아요!"
몇몇 간호사들이 분만실로 뛰어간다.
마치 군사훈련을 받은 전투요원들처럼 신속하고 일사불란한 모습이다.
미선 누나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 뭐 해야 되니?"
"……글쎄요."
우리는 스테이션에 남겨진 채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분만장으로 달려가던 레지던트 선생님 한 명이 우리를 힐긋 보더니 말했다.
"어, 인턴들이에요?"
딱 봐도 성격 좋아 보이는 선생님이다.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이가 젊고, 성별이 남자라는 것만으로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계장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산부인과 유정남]
―레지던트 2년 차
―현재 산부인과 유일의 남자 레지던트 선생님
―착하고 정 많음
유정남 선생님.
듣던 대로,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순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가 내 얼굴을 알아본 듯 환하게 웃었다.
"와, 누군가 했더니 우리 병원 유명 인사였네?"
"안녕하세요, 이번 달 인턴들입니다."
"반갑기는 한데, 일단 거기서 킵 하고 있어요. 인사는 나중에 합시다!"
킵(keep). 그러니까 자리를 지키라는 소리다.
탁탁탁!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미선 누나와 나는 스테이션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
조용―
스테이션은 차분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분만장 안에서 이따금씩 여러 가지 소리가 섞여서 들려오기도 했다.
나는 얼핏 중원이 형이 말했던 표현을 떠올렸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물론 할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전에 Hb(헤모글로빈) 검사 결과 기록.
각종 오더 입력.
등등…….
이런 소소한 일들을 끝내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방 할 일이 없어진 나와 미선 누나는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저희 그냥 이렇게 킵 하고 있으면 될까요?"
"응, 이래서 산과 널널하다고 한 건가 봐. 나한테 2주 잘 쉬고 오라는 애들도 있었어."
그런가?
하긴, 그동안은 너무 바빴다.
내가 거쳐 왔던 정신없는 과들에 비해서, 산과 인턴은 비교적 평화롭게 느껴졌다.
평화로운 스테이션에서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저는 씨섹(c―sec, 제왕절개)이든 자연분만이든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실습 때도?"
"네, 저 실습하던 몇 주 동안 병원에 분만 케이스가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렇기에, 나에게 이번 산과 인턴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미선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었다.
"하긴 나도 여기서 실습했지만 분만장은 못 들어가 봤어. 우리 민국이 낳을 때 처음 들어가 봤지, 호호호."
<분만장>.
말 그대로, 아기를 낳는 곳이다.
보통 고전적인 드라마에 묘사되는 분만 장면들이 있다.
―으아악!
―힘 더 주세요!
―여보 힘내…… 내 머리카락 잡지 말고 으아아!
―응애응애!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실신 직전이 된 산모의 얼굴과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
하지만, 그런 것만 보고 지나치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미선 누나의 말이었다.
"물론 개인차가 크기는 한데, 나는 아기 낳는 거 생각보다 할 만했어."
"그래요?"
"응. 막상 겪어 보면 육아가 10배는 더 헬이거든. 호호호."
그렇게 웃는 눈에 초점이 없다.
……오직 경험자만이 할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군.
본인이 실시간으로 겪는 경험담인 만큼 신뢰감이 대단했다.
"아 참, 그리고 또 기억나는 건……."
미선 누나와의 대화가 한동안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이론적으로만 알던 출산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더 알 수 있었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용어들이 많았다.
<무통천국>
<자연분만은 고통 선불, 제왕절개는 고통 후불>
<굴욕 3종 세트>
등등…….
"굴욕 3종 세트가 뭔데요?"
"관장, 제모, 내진."
"아하."
처음 알았다.
그걸 굴욕 세트라고 부르는구나?
막상 출산하는 것보다 이게 더 싫었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관장(enema)은 아이를 낳기 위해 힘을 줄 때, 변이 나오면서 아기에게 감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한다.
제모(shaving)는 세균 감염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고, 회음부 절개와 봉합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내진(vaginal examination)은 자궁경부가 얼마나 열렸고 태아가 얼마나 내려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산모의 질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 절차다.
모두들 환자의 입장에서는 불쾌감이 있고 아프기도 한 경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거 다 우리랑은 상관없어. 고작 2주 일하면서 인턴이 분만실에 들어갈 일은 없을 거라고 하더라."
"그렇겠죠?"
"응. 너 나중에 결혼하고 아빠 될 때 가족분만실 들어가서 간접체험 해 보렴. 호호호."
나는 미선 누나의 말에 피식 웃었다.
아빠라니?
아직 내겐 너무 먼 일이다.
그보다는, 의사로서 생명이 탄생하는 현장을 경험해 보고 싶은 욕심이 컸다.
나중에 다른 과를 가더라도, 이곳 산과에서 2주 동안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들은 두고두고 남을 테니까.
‘인턴 잡이 제한적이라 좀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물론 대학병원은 교육기관이다.
인턴들 역시 모든 진료과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일하면서 배우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턴들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예가 바로 분만장이다.
병원 측에서는 인턴들을 분만장에 거의 들이지 않는다.
굳이 인턴들이 할 일도 없거니와, 혹시 모를 환자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내가 산부인과 레지던트가 되지 않는 이상 분만실에 들어갈 일은 없다는 뜻이다.
‘뭐, 그래도 밖에서도 여러 가지 할 일은 있으니까 열심히 해 보자!’
출생증명서 작성.
심전도검사(EKG).
마취보조(epidural anesthesia assist).
자잘한 처방(order) 입력.
등등.
나의 산과 첫날은 그렇게 소소한 인턴 잡들로 채워지면서 지나갔다.
* * *
산과 3일 차.
나는 조금씩 산과의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레지던트 선생님과도 제법 친해질 수 있었다.
"선한 쌤, 이거 먹을래요?"
"엇, 감사합니다."
유정남 선생님.
그는 틈만 나면 군것질거리를 나에게 물어다 주었다.
먹이 물어다 주는 어미 새 같기도 하고…….
특히 유독 나에게 친절했는데,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하하, 사실 저 같은 남산(남자 산부인과 의사)들은 같이 이야기할 만한 남자가 여기 정말 없거든요."
산부인과 의국은 90퍼센트 이상이 여성으로 구성된다.
여자 레지던트들과 여자 간호사들 사이에 생활하는 청일점 유정남 선생님.
좀 과장을 섞자면, 외딴 섬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그래서 남자 인턴들이 오면 그렇게 반갑다나, 뭐라나.
나는 웃으며 답했다.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오늘은 뭐 도와드릴 일 있을까요?"
내 물음에, 책상에 걸터앉은 선생님은 손을 저었다.
"에이, 여기서 인턴 쌤들 하실 거 별로 없어요. 좀 쉬다 간다고 생각하세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원래 인턴들은 평소에 숨만 쉬어도 힘들잖아요, 눈치도 많이 보이고……."
그러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다.
"그리고 듣자 하니, 천사연 선생님이랑 밥 먹은 적도 있다면서요?"
얼래?
소문이 난 모양이다.
역시 병원에는 비밀이라는 것이 없군.
그는 갑자기 내 어깨를 잡더니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한다.
"안 봐도 뻔해요. 밥 먹으면서 한 젓가락도 못 먹게 얼마나 갈궜을까…… 불쌍한 우리 인턴 선생님……."
아닌데요?
오히려 불편해한 건 천사연이었지, 내가 아니었다.
정작 식당에서 함박스테이크를 아주 맛있게 먹었던 나는 뺨을 긁적였다.
"아뇨, 별로 그렇지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그 마음 너무 잘 알아요. 솔직히 저도 천사연 선생님 밑에서 얼마나 힘든지……."
그렇게 말하는 유정남 선생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유난히 감성적인 사람.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남자.
내가 만나게 된 또 한 명의 독특한 선생님이었다.
그때, 간호사 선생님 몇 명이 스테이션을 지나가면서 우리를 보고 웃었다.
"아이고, 유 선생님. 인턴 쌤 옆에서 힐링하는 중이에요?"
"하여튼 남자 선생님만 오면 옆에 딱 붙어서 저러셔."
"평소에 우리랑 있어서 외로우신가 봐."
간호사 선생님들이 깔깔 웃는다.
그러자 유정남 선생이 돌아보며 말한다.
"어헛, 간호사 선생님들도 우리 선한 쌤한테 잘해 주세요! 무려 천사연 선생님에게 밥을 얻어먹고 온 인턴입니다."
"예?"
"정말요?"
간호사들도 화들짝 놀란다.
……산부인과 안에서 천사연의 이미지가 어떤지, 안 봐도 비디오군.
"부인과 2주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여기서는 부인과처럼 바쁘고 힘들지는 않고, 여유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유정남 선생이 다정하게 내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적국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온 병사를 보듬어 주는 듯한 손길이었다.
‘인턴에게 <여유>라…….’
그 후 며칠간.
내가 겪은 산과는 실제로 그런 단어가 어울리는 곳이었다.
사람들도 대체로 친절했고, 무엇보다 인턴 잡(job, 일)이 많지 않았다.
특히 나 같은 남자 인턴은 더더욱 그랬다.
어쩌다 할 일이 생겨도, 환자가 여자 선생님만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분만실은, 벽 하나를 넘어 존재하는 미지의 성역과도 같이 느껴졌다.
"힘주세요!"
"아아아!"
"입으로만 힘주지 마시고!"
분만실 바깥을 지나갈 때, 안에서 이따금씩 그런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무통천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의학이 발달되어 있긴 하지만, 개인차도 크다고 한다.
"거의 다 됐어요!"
간호사들과 의사의 목소리.
산모의 고통.
가족의 응원.
그 속에서, 문득 소리가 멎고 한여름 매미 울음처럼 세차게 아이의 소리가 들려온다.
―으아앙!
새 생명이 태어난 것이다.
만약 NICU(신생아 중환자실)로 가야 하는 신생아가 있다면, 태어나는 즉시 환자번호를 부여받는다.
이때, 아직 정해진 이름이 없기에 산모의 이름을 사용한다.
즉 산모의 이름이 ‘김아영’이라면, 방금 ‘김아영 B’라는 캐릭터가 지구에 생성된 것이다.
‘건강하렴, 김아영 B야!’
나는 스테이션으로 돌아가 EMR에 등록된 아기의 이름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몇몇 아기들의 출생증명서를 작성하는 일 또한 인턴 업무였다.
그냥 마우스와 키보드 몇 번 움직여 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마치 새 생명의 이름을 내가 부여해 주는 기분이랄까?
‘해피 버스데이!’
그렇게 매번, 마음속으로 탄생을 축하해 주었다.
* * *
물론, 모든 탄생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밤 11시.
하루가 바뀌는 시간이기에, 스테이션에서 EMR에 등록된 메모를 수정하고 있을 때였다.
‘GA weeks(재태주수)에서 하나씩 더해야 하니까, 이 환자는 34+6이고…….’
타닥, 타닥―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때, 스테이션이 분주히 바빠지고 있었다.
"이예지 환자 크레아티닌 레벨(Creatinine level, 신장 수치) 6.0 나왔어요! 보셨어요?"
"2호실에 preeclampsia(자간전증=임신중독증) 환자요? 노티(notify, 알림) 빨리 해야겠는데?"
긴박한 대화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나는 금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5일 전, 내가 산과 인턴을 시작하기 전부터 고위험 산모 입원실에 있던 환자였다.
"씨섹(c―sec) 들어갈 준비 다 돼 있죠?"
"예, 교수님 바로 오신대요?"
"20분이면 오실 거예요."
"인턴 쌤, 2호실 환자 응급 씨섹 있어요!"
나를 부르는 긴박한 목소리에, 오랜만에 찬물로 세수를 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씨섹(c―sec).
제왕절개를 뜻한다.
이때 나 같은 인턴도 어시스트(assist, 수술보조)를 서야 한다.
"예, 가겠습니다!"
타닥―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며 수술에 들어갈 준비를 한 뒤 뛰어갔다.
산모와 아기, 2명의 생명을 온전히 보존해야 하는 수술.
내가 겪게 될 첫 제왕절개 경험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