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어나더 레벨(14)
"그거면 돼요?"
천사연의 대답은 의외로 쿨했다.
"나 빚지는 거 싫어요. 이번에 블리딩 리오피(bleeding re―op., 출혈로 인한 재수술) 막은 거, 그거면 쌤쌤 되겠냐고요."
빚이라.
물론 적합한 표현은 아니다.
나는 환자를 위해 행동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랑, 이번에 밥 한 번 사 주신 걸로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저 함박스테이크 좋아해서요."
"참 나."
천사연은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 듯 밥을 먹기 시작한다.
물론 한마디 웅얼거리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하여간 요즘 인턴은. 나 때랑 너무 달라…… 불만 사항 얘기하란다고 진짜로 얘기를 하고."
너무 나갔나?
이쯤에서 적당히 밸런스를 맞춰야겠다.
나는 그동안 보아 왔던 천사연의 수술보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선생님, 수술 과정을 다 외우면 어시스트를 잘 설 수 있는 건가요?"
"외우면 좋죠,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요?"
"천사연 선생님이 어시스트 서는 거 보면 막힘이 하나도 없어 보여서요."
켈록.
천사연이 기침을 하며 막 먹으려던 콩나물을 내려놓았다.
저 콩나물은 대체 언제쯤 입으로 들어가게 될까?
"나한테 잘 보여 봤자 뭐 안 나와요."
무슨 소리세요?
오해십니다.
저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요?
나는 그런 순진한 얼굴로 천사연을 바라보았다.
"나 3년 차예요. 몇 개월 뒤면 치프(chief) 레지던트라고요. 그 정도도 못 하면 안 되죠."
내 한마디 때문일까?
천사연의 기분은 은근히 좋아 보였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들은 꽤 유익했다.
수술실의 노하우, 레지던트의 생활, 논문과 관련된 아카데믹한 이야기 등등…….
덕분에 꽤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콩나물은 영원히 식판과 입 사이에서 왔다 갔다를 반복했지만 말이다.
‘이런 전략도 가끔은 쓸 만하네.’
새로운 사회생활 기술을 배웠다.
물론 내 성격상 자주는 못 써먹을 것 같지만.
식사를 마치고 병동으로 올라오는 길에 천사연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중에 또 궁금한 거 있음 물어봐요. 내가 놓친 출혈을 인턴이 찾았는데, 함박스테이크 하나로 퉁치자고 하면 내가 뭐가 돼?"
또각, 또각―
그렇게 말하고 특유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아직 나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뭐, 나쁘지 않네.’
천사연 선생은 산부인과 레지던트들 사이에서도 유독 존재감이 크다.
듣기로는, 윗사람들에게 싹싹한 탓에 산부인과 교수님들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한다.
나는 곧 부인과를 떠나지만, 언젠가 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을까?
‘앞으로 환자를 도우려면 조력자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병원이라는 사회 안에는 다양한 타입의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서 내가 만든 인간관계의 결과는 어떻게 돌아올지 모른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중원이 형, 추근덕의 영상판독, 간호사 선생님의 도움 등등…….
천사연이라는 사람과의 관계는 나에게 또 어떻게 돌아올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훗날 내가 레지던트가 되어 산부인과에 컨설트(consult, 협진)를 내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 * *
그 뒤로 부인과에서 내 생활은 조금 달라졌다.
일단, 첫째.
시간적으로 약간 여유가 생겼다.
"미선 누나, 퇴근해요?"
"어, 오늘은 집에 가려고."
미선 누나는 스테이션에서 히히 웃으면서 짐을 챙기다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요새는 천사연 선생님이 일을 좀 적게 주네. 무슨 일이지?"
그리고 수술방에서의 생활도 달라졌다.
수술을 마치는 수처(suture, 봉합)를 하던 중, 천사연 선생이 옆의 간호사에게 말했다.
"여기 인턴 쌤이 쓸 니들홀더도 준비해 줄래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옆에서 커팅이나 제대로 해라, 하고 면박을 주더니 말이다.
"수술이 길어져서,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야 하지 않겠어요? 뒤에 수술도 밀려 있으니."
마치 수처를 시켜 주는 것이 대단한 것인 양 유세를 부렸지만, 말투는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았다.
"레이어(layer, 층) 잘 맞춰야 돼요. 어떻게 하는지 알죠?"
"예."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곡담에서 풍 선생님과 해 본 적이 있으니까.
양쪽에서 꿰매 오면서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만나기!
오랜만에 니들홀더를 쥐고 니들링을 하니 손이 풀리는 것 같고, 기분이 좋았다.
……한편 이러한 내 생활에 대해, 중원이 형은 퍽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설마 너 천사연이랑 친해졌어?"
"친한 건 아니고, 그냥 밥 한 번 먹었던 거예요."
"너 3월에 김뱀이랑도 좀 친해지지 않았냐?"
"그쪽도 친한 정도는 아니고, 관계가 나쁘지는 않아요."
휴게실에서 만난 중원이 형은 내 말에 감탄했다.
"이야~ 대단하다. 인턴생활 동안 3대 빌런을 다 겪은 것도 레전드인데, 거기에 그 셋이랑 관계까지 좋다고? 우리랑 레벨이 다르다, 레벨이."
3대 빌런 모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 빌런 중에서는 아직 두 명밖에 못 만나 본 것 같은데…….
1호 김뱀.
2호 천사연.
3호는 누구지?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데요?"
"몰랐냐? 송유주 선생님이잖아."
"엥?"
송유주 선생님이 왜?
악당이라고 불릴 만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중원이 형의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 보니, 인턴 평가에 가차가 없어서 빌런이라고 한다.
조금만 기준에 안 맞으면 박한 점수를 주는데, 심지어 최하점을 준 경우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셋 다 빌런 아니었어요."
"그래?"
"일만 열심히 하면 악당 아니에요."
나는 간단히 정리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기준은 좀 다르다.
직업윤리를 어기지만 않으면 된다.
즉, 의사로서 본분만 지키는 사람이라면 성격이 어떻든 상관없이 친해질 수 있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야, 가만 보면 선한이 너도 끼가 있어."
"……?"
"끼리끼리는 통한다잖아. 너 나중에 레지던트 되면 새로운 빌런 되는 거 아냐, 아랫사람 막 쥐어짜면서?"
나는 픽 웃었다.
글쎄요. 과연 그런 날이 올까?
<레지던트 신선한>이라.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게 될지 아직 상상이 안 간다.
물론 그 미래도, 머지않아 금방 오게 되겠지만.
#해피 버스데이(1)
야심한 저녁.
인턴 숙소는 조용하다.
텅 빈 복도에는 썰렁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다.
살금, 살금.
나는 중원이 형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몰래 잠입을 시도하는 자객이 된 느낌이다.
"이 시간이면 안에 있겠지?"
"그럴걸요."
끼익―
우리는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러자 침대 2층에 옆으로 누워 있는 커다란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만주벌판보다 넓은 등근육의 소유자, 근욱이었다.
등 아래로 수술복 바지가 보이는데, 살짝 내려가서 골짜기의 음영이 보이기 직전이다.
"아윽, 씨. 내 눈……."
중원이 형이 황급히 이불로 근욱이의 엉덩이를 덮어 버리며 말한다.
"근욱, 자냐?"
"안 잡니다."
근욱이의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온다.
녀석은 등을 돌린 채 누워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흥얼거리고 있다.
베개 옆에 놓인 핸드폰에서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저게 언제 적 노래야?
물론 명곡이긴 하다만.
요즘 따라 근욱이는 가을을 타는지, 유난히 감성 대폭발이다.
"얌마, 김근욱! 일어나서 여기 좀 봐 봐."
"왜요?"
"야식 먹자."
"저는 생각 없슴다."
근욱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녀석은 요새 평소와는 달리 여자 타령을 안 한다.
대신 오프가 되면 저렇게 2층 침대에 틀어박혀서 혼자 궁상을 떨고 있다.
"와~ 침대 위에 옷 늘어져 있는 거 봐라. 근욱이 너 인마, 요즘 왜 이리 생활이 셉틱해?"
중원이 형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셉틱(septic)하다는 말은 에이셉틱(aseptic)의 반대말로, ‘균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의학용어다.
물론 지금 같은 경우에는 의사들끼리의 농담이다.
너 왜 이리 썩었냐? 하고 묻는 것이다.
"아이참, 혼자 있고 싶다니ㄲ……."
파앙!
막 몸을 일으켜 돌아보던 근욱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내가 터트린 폭죽 소리다.
중원이 형이 케이크를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해피 버스데이!!"
"너 오늘 생일이라며? 축하한다."
"……."
"생일인데 혼자 궁상떨고 있지 말고 얼른 일어나……."
으헝헝!
근욱이가 갑자기 감격스럽게 울부짖는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우리를 와락 끌어안는다.
야, 우냐? 울어?
* * *
저녁 9시 반.
우리는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왔다.
휴게실에서 간단하게 생일 파티를 할까 했지만, 기본적으로 숙소 안은 금주다.
늦은 시각이지만,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냥 숙소에서 간단히 축하만 해 주셔도 되는데……."
"인마, 이 핑계로 간만에 한 잔씩 적시는 거지. 너 생일인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냐?"
"흐흐. 감동입니다."
"야, 그나저나 이제 찬바람 좀 부는데? 가뜩이나 외로운 30대 옆구리 썰렁하게 만드는구만!"
중원이 형이 그렇게 말하며 앙상한 팔을 쓰다듬었다.
초가을.
유난히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계절이 왔다.
소위 <가을을 탄다>는 현상은 유독 남자들이 더 겪는다.
이 감정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나름 그럴듯한 연구 결과가 있다.
가을이 되면, 일조량이 감소하면서 세로토닌(serotonin, 감정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 분비가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햇볕을 쬐지 못하면, 비타민D도 부족해져 남성 호르몬의 분비 또한 줄어든다고 한다.
"가을이라 그런가. 요새 유난히 센티멘탈해져요."
"야, 너두?"
"형두?"
"어, 나두."
"아마 선한이 저놈은 감성이 메말라서 우리한테 공감 못 할 거예요."
두 사람의 만담에 나는 피식 웃었다.
가을이라…….
사실 나도 기분이 평소와 다르다.
무언가 조금씩 마무리가 되어 가는 느낌이랄까?
뭐든 낯설고 새로웠던 경험들은 어느새 하나씩 익숙함으로 바뀌어 간다.
인턴들도 슬슬 월동 준비(?)를 한다.
정신없이 지내 왔던 1년의 시간을 돌이켜 보며, 각자 레지던트로 지원하게 될 과(科)를 심사숙고하는 기간인 것이다.
11월 말까지는 지원할 과를 정해야 하니까.
"시간 참 빨리 간다. 추월춘풍(秋月春風) 돌아가는 것이 순식간이구만요."
그렇게 또 아저씨 같은 감상을 내뱉는 근욱이었다.
잠시 후, 치킨집.
우리는 테이블을 잡고 치맥을 시켰다.
물론 즉흥적으로 외출한 것이기에 인원은 많지 않다.
나, 중원, 근욱.
그리고 또 한 명…….
"너는 왜 따라왔냐?"
"치킨 먹고 싶어서요."
"얼씨구, 너 근욱이랑 친하지도 않잖아, 인마!"
"오늘부터 친해지면 되죠."
류명인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셋이서 나오는 길에 병원 입구에서 마주친 것이다.
생일 축하한다고 대뜸 쫄래쫄래 따라온 걸 보니 이 녀석의 넉살도 보통은 아니다.
"그래, 그래! 너 얘기는 많이 들었다. 오늘부터 친해지자. 한 잔 받아!"
물론 그 이상으로 근욱이는 누구와도 5분 만에 쉽게 친해지는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그러자 명인이가 반색하며 말한다.
"그럼 말 놓을까요?"
"뒤질래?"
"죄송합니다."
류명인이 근욱이의 우람한 팔근육을 보더니 깨갱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본전도 못 찾을 걸 왜 자꾸 시도할까?
"근데 근욱 너 면도한 지 얼마나 됐냐? 왜 요새 그렇게 추레하게 다니는데, 인마."
중원이 형의 질문에는 내가 대답했다.
"곡담에서 여자 친구랑 헤어져서 이래요."
"뭐? 여자 친구?"
"아니야, 나 괜찮아!"
근욱이는 손사래를 치더니 테이블에 도착한 맥주 피처잔을 들었다.
"이렇게 생일도 축하해 주는 동기들도 있고 얼마나 좋아요. 난 하나도 안 슬프다! 마시자!"
그런데 잠시 후.
"아령아, 보고 싶다! 으헝헝헝……."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다시 녀석의 궁상이 시작된다.
얼굴이 빨개진 근욱이가 맥주 피처를 끌어안는다.
"아령? 누가 헬스중독 아니랄까 봐 파닭 먹다 말고 갑자기 아령을 찾아."
"그게 아니라, 근욱이 전 여친 이름이 아령이에요."
"퍼헙."
내 말에 조용히 먹기만 하던 류명인이 고개를 숙이고 파닭을 뿜었다.
혼자 허공에 울부짖는 근욱이는 내버려 두고, 중원이 형이 문득 생각난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맞다. 그나저나 너희들, 조진기 망한 얘기 들었냐?"
연국대병원의 이야기꾼, 중원이 형이 부릉부릉 입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