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41화 (141/241)

#141 어나더 레벨(13)

‘이 시간에 누구지?’

나는 베드 앞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멈춰 섰다.

커튼 안쪽.

발목이 살짝 보이는 하늘색 수술복 바지에, 낮은 굽의 구두를 신은 다리가 보였다.

스륵―

커튼을 살짝 열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인턴?"

천사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열심히 쥐어짜고 있다.

JP 배액관(Jackson―Pratt drain).

기다란 플라스틱 관이 복강 안으로부터 나와서 수류탄처럼 생긴 통에 연결되어 있는 배액관이다.

즉, 복강 안에서 나오는 피를 밖으로 빼내는 기구다.

"무슨 일이에요. 여기 환자한테 따로 오더(order) 난 거 없을 텐데?"

나는 막 대답을 하려다 천사연 선생이 스퀴징(squeezing, 쥐어짜기) 하고 있는 JP 라인을 바라보았다.

‘어디 보자. 피의 색깔은…….’

생각보다 묽다.

물에 타서 옅어진 느낌의 선홍색이랄까?

즉, 복강 내 출혈은 미미하다는 뜻이다.

모니터에 나타나는 바이탈 사인도 안정적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내가 봤던 <출혈로 인한 재수술>은 확실히 막았다고 볼 수 있겠어.’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대답했다.

"환자분 걱정이 돼서 와 봤습니다."

"……환자 포스트옵(post―op, 수술 후) 상태 좋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예."

천사연의 말대로였다.

환자의 상태는 괜찮아 보인다.

다만 진통제의 영향인지, 반쯤 세워 놓은 침대에서 눈을 감고 있다.

눈을 뜨고 싶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는 표정이다.

"엄마, 잠 깨 봐. 선생님이 오늘 심호흡운동 해야 된다고 했잖아."

옆에 있던 딸이 환자의 어깨를 두드려 깨운다.

어느 수술이든, 전신마취 후에는 무기폐를 조심해야 한다.

장시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고 난 직후이기 때문이다.

만약 수술 후 통증과 진통제의 영향으로 숨을 제대로 못 쉴 경우, 폐가 제대로 펴지지 않을 수 있다.

"인턴 쌤, 온 김에 여기 환자 심호흡하는 거 도와줄래요?"

"네."

나는 천사연의 말에 환자 옆으로 다가갔다.

그때, 정순례 환자가 몽롱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여기 선생님들은 원래 이렇게 다 친절하세요? 여자 선생님도, 남자 선생님도 두 분 다 너무 친절하시네."

천사연이 친절하다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곧 천사연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한다.

"어휴, 아니에요. 환자분들 치료해 드리는 게 저희 일인 걸요, 어머니."

……아우, 간지러!

목에 닭살 돋았다.

천사연은 교수를 대할 때보다 환자를 대할 때 훨씬 더 사근사근했다.

그동안 인턴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가식?

어쩌면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환자를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머니, 그럼 저는 가볼게요. 여기 인턴 선생님이 잘 도와주실 거예요."

"예, 고마워요."

차락―

천사연은 커튼을 걷고 나갔다.

역시 의사로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인턴들의 꼬투리를 잡던 모습이 변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환자를 돕는 동안, 옆에서 딸이 말했다.

"하여튼 엄마는 호들갑이야. 이렇게 수술 잘 끝날 걸."

"알았어, 미안해."

"다음부턴 유서 같은 거 쓰기만 해 봐."

딸은 엄마에게 핀잔을 주었다.

물론 이 수술의 결과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었는지를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딸, 예전에 유럽 여행 한 적 있었지?"

"응."

"어느 나라까지 가 봤어?"

"갑자기 왜? 유럽이고 뭐고 관심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정순례 환자는 미소를 짓더니 이번에는 내게 물었다.

"선생님, 거기가 어디였죠? TV에서 보던 곳. 크로…… 뭐였더라, 기억이 잘 안 나네."

"크로아티아요."

"그래, 맞아요."

"갑자기 웬 크로아티아?"

"거기가 어떤 데냐면……."

정순례 환자는 몽롱한 와중에도 신나게 설명을 시작했다.

몸에 수분이 빠져 수척해진 얼굴, 힘없이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 눈빛에는 약간 활기가 돌아온 듯했다.

딸은 엄마의 손을 꼭 쥐었다.

"그래. 항암 치료 잘되면 꼭 가자."

"어휴. 됐어. 가자는 뜻이 아니라……."

"내가 엄마랑 가 보고 싶어서 그래. 완치되면 꼭 가 보자."

"그래, 알았어."

나는 두 사람의 따스한 대화에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몇 년 후쯤.

정순례 환자는 이국의 공원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햇살이 부서지는 나무 그늘 아래, 에메랄드색으로 빛나는 호숫가와 수 갈래로 쏟아지는 폭포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한,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대할 수도 있는 거니까.

"환자분, 수술 정말 잘 견뎌 내셨어요."

나는 환자를 다독인 뒤 일어섰다.

물론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심장 관련 합병증을 완전히 막았는지 적어도 이틀 동안은 확인이 필요하다.

앞으로의 항암 치료 또한 고된 과정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이 환자가 무사히 이겨 내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기를.

* * *

잠시 후.

나는 병실을 나왔다.

그러자 복도에서 팔짱을 낀 채 기다리던 천사연이 말했다.

"심호흡은 충분히 가르쳐 줬어요?"

깜짝이야.

하얀 가운을 입고 벽에 딱 붙어있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카멜레온이야?

마침 묻고 싶었던 것도 있었기에 나는 자연스레 질문했다.

"네. 그런데 심장 문제는 괜찮을까요? 혈전 생성을 막는 약들도 멈춘 상태인데……."

나는 신중히 물었다.

다행히 돌아오는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잠깐 끊었던 항혈소판제제는 출혈 없는 거 확인되면 바로 들어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사연은 머뭇거렸다.

그러고 보니 병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나에게 무언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

"아니에요."

천사연은 평소처럼 뾰로통하게 말하고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뭐야, 왜 나를 기다린 거지?

사람 싱겁네.

‘아까 맞먹었던 일 때문인가, 괜히 얼굴 보는 게 어색하네.’

꼬르륵―

문득, 그제야 배가 고팠다.

저녁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 아침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밥이나 먹자.

이러다간 환자 치료하다가 내가 먼저 쓰러지겠다.

‘직원식당은 문 닫은 지 오래고…… 일반 구내식당으로 가면 뭐라도 먹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데, 그때.

타악―

닫히는 문 사이로 구둣발이 들어온다.

어느새 발걸음을 돌려 다시 나타난 천사연이 묻는다.

"그, 혹시, 식당 가요?"

"예?"

오늘의 교훈.

닫힘 버튼을 빨리 누르자.

* * *

구내식당.

중원이 형이 몇 명의 인턴들과 함께 나오고 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뒤 띠용 하고 눈이 커진다.

"어? 선한…… 아, 안녕하세요."

나에게 인사하려다, 내 옆의 천사연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우리를 번갈아 쳐다본다.

옆에 있던 인턴들도 천사연의 악명을 알고 있는지 하나같이 뜨악한 표정들이다.

<뭐야, 왜 둘이 밥을 먹으러 와?> 하는 표정들이다.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하다.

나는 왜 친하지도 않은 이 사람이랑 밥을 먹으러 오게 된 걸까?

잠시 후.

나는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천사연은 굳이 나를 끌고 와서 밥을 사 줬다.

……마주 앉은 게 좀 어색하군.

하지만, 곧 내가 한이 맺혔던 함박스테이크가 눈앞에 놓이자 어색함은 잊혔다.

"천사연 선생님은 안 드세요?"

"먹을 거예요."

천사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앞에서 젓가락을 드는 둥 마는 둥 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식사를 시작했다.

맛있다!

하루 종일 굶다가 뭘 먹으니 비로소 살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데려와 놓고 도리어 자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천사연은 젓가락을 콩나물 사이로 깨작깨작 하더니 갑자기 툭 하고 묻는다.

"평소에 사회생활 잘하나 봐요?"

"예?"

"스크럽 널스(scrub nurse, 수술방 간호사) 선생님이 일부러 연기까지 해 가면서 편도 들어주고."

역시 천사연.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아까 수술 도중, 간호사 선생님이 거즈를 세는 척 연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입 안의 음식을 핑계로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천사연의 말은 이어졌다.

"내가 지랄 맞다고 소문 자자하죠?"

"아닙니다."

"그쪽도 나중에 레지던트 돼 보면 알아요. 인턴들 풀어 주고 착하게 대하기만 하면 얼마나 개판 되는지."

다시 콩나물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려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옛날에 어떤 인턴은 한 사람한테 뽑은 피로 3명의 검체를 제출했다니까? 3명 랩(lab, 피검사) 결과가 다 같아! 거짓말 같죠? 진짜라니까."

나는 놀랐다.

그건 좀 너무한데?

귀찮으니 환자들의 피 검사를 아무렇게나 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인턴이라도 그런 짓을 하는 녀석이 있다고?

"정말요?"

"또 어떤 일도 있냐면……."

흥분한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좀 새로웠다.

그동안 나는 인턴의 관점에서 레지던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윗사람들의 입장은 또 달랐다.

인턴 = 소속 없음.

달리 말하면 책임감도 그만큼 적다.

물론 대부분은 열심히 하려 노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몸이 힘들다 보니, 은근슬쩍 적당히 눈치를 보아 가며 대충 일을 처리하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데, 천사연은 그런 경우를 몇 번 보았던 모양이다.

"그런 꼴 보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 줄 알아요?"

쪼아야 한다!

잘해 주면 오히려 느슨해져서 사고 친다!

무조건 혼내야 된다!

탈탈 털어야 그나마 사람 된다!

그것이 천사연 나름대로의 원칙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꼬투리를 잡으려고 노력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멈추었다.

듣다 보니, 천사연도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사연이 있는 듯했다.

그래, 고충이 있겠지.

레지던트들도 인턴 때문에 분명 힘든 점이 있을 것이다.

"뭐,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너무 야박하게 생각하지 말라고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이것도 기회인데, 뭐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 있어요? 인턴 하면서 뭐가 제일 힘들어요?"

천사연의 갑자기 부드러워진 어투에 나는 조금 놀랐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아닙니다. 선생님 옆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정도의 대답을 하는 게 사회생활로서는 정답이겠지.

하지만, 나는 할 말은 하기로 했다.

"논문을 위한 데이터 작업은 줄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그게 원래 인턴 잡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환자들을 위한 연구이긴 하지만요."

투욱.

천사연은 그릇에 막 집어 올리던 콩나물을 떨어트리며 당황한 표정이다.

<불만을 말하란다고 진짜 말해?>

딱 그런 표정이다.

"저는 괜찮은데, 저랑 같이 일하는 김미선 인턴 선생님, 이제 돌 지난 애 엄마입니다. 데이터 때문에 3일 동안 애 얼굴 못 보고 있어서, 배려 좀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 말했다.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나는 반응을 기다렸고, 이어지는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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