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어나더 레벨(12)
나는 우리에게 말을 건 사람을 쳐다보았다.
‘간호사 선생님?’
스크럽 널스 정윤희.
수술방의 최고참 간호사.
천사연이 인턴부터 레지던트까지 커오는 과정을 옆에서 모두 지켜봤을 것이다.
당연히, 천사연 선생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선생님들, 말씀 중에 정말로 죄송한데…… 거즈 개수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거즈(gauze) 카운팅.
수술이 끝날 때 필수적으로 행해지는 절차다.
만에 하나 거즈가 환자의 몸속에 남아 있는 의료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거즈요?"
"예. 아까 처음 셀 때는 맞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하나가 모자라는 것 같은데요?"
거즈를 세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리게이션(세척) 할 때, 그리고 봉합 부위를 닫을 때.
최소 두 번은 세어야만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만약 나중에 환자의 몸 안에서 거즈가 발견되면, 다시 수술방으로 와서 꺼내야만 한다.
그야말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고이기에, 이렇게 철저히 체크해야 한다.
"죄송하지만 다시 열어서 안쪽 한 번 봐주시면 안 될까요?"
간호사 선생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금방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날 도와주시려는 거구나!’
예전에 휴게실에서 커피값으로 <내 편을 한 번은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던 적 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고 있다.
다시 환자의 몸 안을 살펴보아야만 하는 자연스러운 이유를 말이다.
"……정 간호사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한 번 더 봐야겠네요."
"예, 혹시 모르니까 저도 다시 한번 세어 볼게요."
간호사 선생님은 넉살 좋은 눈웃음을 지으며 거즈를 다시 세는 척을 했다.
"시저(scissor, 가위) 주세요."
툭, 툭.
천사연은 거의 꿰맸던 복막을 다시 뜯기 시작한다.
"이거 잡아 봐요."
이윽고 천사연이 수술기구를 나에게 건넨다.
"예."
나는 리차드슨 리트랙터를 잡고 복부를 벌려, 천사연의 시야를 확보해 주었다.
그동안 천사연은 복강 안쪽으로 손을 넣어 장기들 사이를 조심스레 살핀다.
"……."
세척 후의 복강은 깨끗했다.
천사연이 ‘이상이 없다’고 판단할 법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지금 이 복강 안에는 재수술을 하게 만들 만큼, 저명한 출혈 부위가 있다는 것을.
‘분명 있을 거야. 잘 보이지 않지만, 어디엔가 피가 나는 부위가…….’
나는 눈을 집중했다.
문득, 백의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좋은 외과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매의 눈, 여인의 손, 사자의 심장>이라고.
여기에 ‘눈’이 포함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외과의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예민하게 보아야 한다.
사소한 발견 하나가 수술의 결과를 완전히 뒤바꿔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버자이나 스텀프(vagina stump, 자궁을 떼어 낸 뒤 질 입구를 꿰매어 막아 놓은 곳) 쪽에도 없고, 스플린(Spleen, 비장) 쪽 당연히 없고, Bowel(장(腸)) 사이에도 없고……."
천사연 선생이 복강 안에서 거즈를 찾기 위해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그때, 내 눈이 커졌다.
"선생님!"
"……?!"
내 말과 동시에, 복강 구석구석을 살피던 천사연의 손도 멈추었다.
"뭐야, 갑자기. 깜짝 놀랐잖아요?"
"여기요!"
나는 임파선(lymph node)을 떼어 낸 자리를 가리켰다.
천사연이 조심스레 장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쪽.
약간이지만, 피가 고여 있었다.
"……!"
천사연의 눈이 커졌다.
복강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어딘가 출혈이 있게 되면, 중력에 의해 가장 낮은 곳에 고이게 된다.
묘하게도, 임파선을 떼어 낸 자리는 수술 필드의 가장 아래쪽이었다.
"블리딩(bleeding, 출혈)이……."
천사연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 마음도 바빠졌다.
출혈 부위가 어디지?
임파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천사연이 거즈로 눌렀다 떼어 내도 계속 피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
가만히 두면 주변 조직들에 눌려서 지혈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부위였다.
하지만 이 환자는 항혈소판제제(clopidogrel)를 먹었던 환자!
일반적인 환자들과는 달리, 피가 굳는 속도가 현저히 느린 상태다.
"보비(bovie, 전기칼) 주세요."
천사연이 빠르게 말했다.
보비는 조직을 가를 때에도 사용되지만, 지혈(coagulation)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조직을 가를 때에도 지혈하면서 가르는 형태다.
치이익―
천사연은 조직을 태웠다.
하지만 여전히 피는 스멀스멀 올라온다.
보비 끝에는 애꿎은 새까맣게 탄 피딱지들만이 달라붙고 있었다.
천사연의 다음 말이 빠르게 이어진다.
"타코콤이랑 글루 가져다주세요."
타코콤, 글루.
둘 다 수술 필드에서 지혈을 돕는 물질들이다.
꾸욱―
천사연은 그것들을 바른 뒤 거즈를 뭉쳐 눌렀다.
이 방법을 통해서 연부조직(soft tissue)에서 나는 출혈은 대부분이 잡힌다.
즉, 천사연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것이었다.
"뭘 쳐다봐요? 지금 출혈 부위 찾았다고 으스대는 거예요?"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어떻게 지혈하시는지 보고 배우는 중이였습니다."
"……."
내 말에 천사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나를 더 쏘아붙였겠지만, 지혈이 잘되지 않는지 당황해 하는 눈치다.
귀 아래 목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이 보였다.
몇 초 후.
천사연은 거즈를 슬그머니 떼 보았다.
여전히 시뻘건 피가 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
천사연의 동공이 흔들린다.
놀란 것 같기도,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주저할 시간이 없기에, 천사연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교수님한테 연락해요."
"네!"
서큘레이팅 너스(circulatiing nurse, 순회 간호사)가 수술실 벽면에 있는 전화를 들어 올린다.
천사연은 그 수화기에 얼굴만 가져다 대고 말했다.
"교수님, 사연이입니다. 방금 수술하신 정순례 환자……."
몇 분 후.
지잉―
교수님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곧바로 간호사들이 입혀 주는 가운으로 몸을 집어넣으며 말한다.
"출혈 부위가 있다고? 어디 볼까?"
간호사가 교수의 머리에 헤드라이트(head light)를 씌워 준다.
곧 복강 안을 살펴보던 교수의 눈도 커졌다.
"내가 이걸 놓쳤나? 분명 아까는……."
교수가 당황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수술 중에 충분히 지혈이 된 줄 알았는데, 잘 안된 모양이네. 까닥해서 놓쳤으면 리오피(re―op, 재수술) 할 뻔했네."
교수는 한손에 보비, 다른 한손으로는 포셉으로 거즈를 들고 출혈부위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몇 번의 보비 사용 후, 교수는 출혈 주위 주변을 꿰매어 지혈하기 시작했다.
역시 교수님은 달랐다.
평생 수술만 해 온 분답게, 지혈을 하는 기술이 능숙했다.
임파선을 떼어 낸 부위, 연부조직의 출혈과 그 주위의 얇은 베인(vein, 정맥)에서 나오는 출혈을 모두 컨트롤했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지혈 과정들을 머릿속에 차근차근 집어넣었다.
"이제 잡혔네."
잠시 후.
교수는 지혈이 끝난 뒤 손을 멈추고 말했다.
"……나도 이제 은퇴할 때 됐나 보다. 원래 이런 거 놓친 적이 없었는데."
그러더니 우리 쪽을 힐긋 보며 말을 잇는다.
"역시 우리 사연이가 참 믿음직스러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칫 내가 놓칠 뻔한 출혈인데 잘 잡아냈으니 칭찬받아야지."
교수님이 거듭 칭찬을 한다.
그럴수록 천사연의 귀가 더욱 빨개진다.
주위 간호사들의 분위기도 묘해진다.
그 가운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인턴 일에 집중했다.
* * *
수술 종료.
교수님은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출혈을 이중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드물게 마지막 봉합까지 직접 수행하고 나갔다.
검체를 전달하는 것까지 완료되자 드디어 내 할 일이 끝났다.
"후우."
나는 마스크의 위쪽 끈을 풀고 목 아래로 늘어트렸다.
거울을 보니 얼굴 한가운데를 마스크 자국이 가로지르고 있다.
정말 길었던 수술이다.
어느덧 오후 2시.
앞 수술이 오래 걸린 만큼, 뒤 수술도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즉, 오늘의 퇴근 시간이 언제가 될지 예측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서 준비하자!’
타닥―
나는 휴게실로 향했다.
밥은 고사하더라도, 일단 물 한 잔은 마셔야겠다.
아까부터 목구멍에 가뭄이 든 것처럼 갈증이 난다.
벌컥벌컥―
크으.
물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심지어 달다.
관우가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와 마시는 술도 이렇게 달지는 않을 거다.
물론 내가 해낸 일은 그와는 정반대로 사람의 생명을 살린 일이었지만.
‘좋아, 이걸로 일단 재수술은 막았겠지?’
꾸깃!
나는 종이컵째로 주먹을 쥐었다.
이걸로 확실히 심장 합병증이 올 확률은 낮아졌다!
물론 아직 방심하기에는 이르다.
환자는 여전히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
내가 미래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늘부터 정순례 환자의 포스트옵(post―op, 수술 후) 과정을 확실히 신경 써야겠어.’
그때, 복도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천사연이었다.
휴게실 입구에서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밌어요?"
"예?"
"간호사들 앞에서 나 쪽 주니까 재밌냐구요."
왜 저래.
설마 방금 일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건가?
심사가 어지간히도 꼬인 사람인 모양이다.
"그런 거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예?"
"혹시, 세척할 때 출혈을 발견해놓고 내가 닫을 때까지 가만히 보고 있었던 거 아녜요?"
뭐라고?
정말 심성이 꼬인 사람이군.
아무래도 방금 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모양이다.
환자의 재수술을 막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는 게 정상일 텐데 말이다.
"천사연 선생님."
움찔.
천사연은 팔짱을 풀었다.
그러더니 당황한 듯 어깨를 움츠리며 묻는다.
"……왜, 왜 갑자기 목소리 깔아요?"
나는 차분히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도 확신이 없어서 뒤늦게 말씀드렸던 겁니다."
"……."
"일부러 환자의 이상을 눈치채고도 늦게 말했냐고요? 제가 쓰레기도 아니고, 그런 짓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천사연은 당황한 듯한 표정이다.
아마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인턴이 이렇게 강하게 반발할 줄은.
나는 쐐기를 박았다.
"어떤 인턴 잡(job, 일)이든 더 주셔도 괜찮습니다."
"……."
"사소한 걸로 질책하셔도 다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그런데, 최소한 환자를 위해서 했던 일은 잘했다고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기다렸다.
천사연은 팔짱을 끼고, 풀었다가, 짝다리를 풀고, 머리를 만지고, 벽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아, 그, 뭐, 그래요.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꾸벅.
나는 천사연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뒤 그녀를 뒤로하고 휴게실을 나왔다.
잠시 후.
나는 복도로 나와 잠깐 뜨거워졌던 머리를 식혔다.
……레지던트 3년 차와 맞먹고 말았다.
"아, 씨. 내 인턴 평가 점수."
너무 대들었나?
그래도 나는 환자를 위해 행동했으니 후회는 없다.
C를 줄 테면 C를 주든가!
일이나 하자.
나도 저렇게 심사가 꼬인 사람에게 굽혀 가면서 점수를 구걸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 * *
저녁 7시 40분.
오늘의 모든 수술이 끝났다.
다행히 재수술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정순례 환자는 괜찮을까?’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다.
물론 배도 고프다.
점심도 걸렀고, 이미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얼른 밥도 먹고 씻고 쉬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는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먼저다.
나는 수술복 차림 그대로 병동으로 올라갔다.
‘응?’
나는 병실의 정순례 환자 자리 앞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