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39화 (139/241)

#139 어나더 레벨(11)

‘데자뷰인가?’

눈에 익숙한 장면이다.

사방이 하늘색 벽으로 된 정사각형 공간.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무영등은 방 한가운데를 비추고 있었다.

‘이건…… 방금 전 수술방 그대로잖아?’

무영등 아래 환자가 누워 있다.

그 주위로 수술모를 쓴 사람들이 머리를 모아 환자의 복부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모두 똑같은 수술모와 수술복을 입고 있기에 첫눈에 알아볼 수는 없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집도의 = 양필순 교수.

퍼스트 = 천사연.

세컨드 = 신선한.

그리고 스크럽 널스(scrub nurse, 수술방 간호사)까지.

방금까지 내가 참여 중이었던 수술의 인원과 다른 게 없다.

마치 과거의 한 장면을 그대로 따와서 컨트롤 C + 컨트롤 V를 누른 것 같다.

‘어떻게 된 거지? 여태까지 과거의 장면을 다시 보여주는 경우는 없었는데…….’

설마 내 능력의 패턴이 달라진 건가?

아니면, 내가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나는 고개를 돌려 폴대에 걸려 있는 환자의 나이와 성별, 이름을 바라보았다.

[15]

정순례

F/72

15번 방.

환자는 역시 정순례 환자.

점점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틀린그림찾기를 하듯 주위를 살펴보았다.

벽면에 있는 보드판을 바라보았더니, 심지어 수술 날짜까지 똑같다.

그런데, 그 와중에 다른 부분 하나가 있었다.

‘잠깐…… 수술명이 달라!’ <블리딩 컨트롤(Bleeding control)>.

출혈 때문에 지혈을 위해 다시 수술방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윽고 벽면에 있는 시계까지 확인한 뒤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19:40]

지금으로부터 약 6시간 후의 미래였다.

‘재수술이구나!’ 재수술(re-op.).

전신마취를 다시 해야 하고, 한 번 닫았던 몸도 다시 열어야 한다.

안 그래도 고령에 심장 문제까지 가지고 있는 정순례 환자인데, 몇 시간 만에 재수술이라니?

‘자칫하면 환자의 예후가 훨씬 나빠질 수도 있어!’

스윽-

나는 수술 필드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필드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교수의 눈빛도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그 맞은편에 서 있는 나와 천사연도 마찬가지였다.

마취과 교수가 필드 쪽으로 머리를 내밀고 다급히 외친다.

"지금 수혈 계속하면서 약도 많이 쓰고 있는데, 혈압이 잘 안 잡혀요. 출혈 부위는 찾았나요?"

그러자 곧바로 양필순 교수가 대답했다.

"잠시만 버텨 주세요, 금방 해결할 테니!"

그러고는 한 손으로 배 속에 고여 있는 핏덩이(hematoma, 혈종)를 손으로 걷어 낸다.

수술실의 공기가 긴박해진다.

복강 안의 출혈 때문인지, 모니터에서 관찰되는 혈압과 맥박은 정상치를 자꾸만 벗어나려 한다.

"석션!"

"네!"

"이런, 썅. 도대체 어디서 피가 나는 거야?"

양필순 교수님이 입에 험한 말을 담는 것을 처음 봤다.

그만큼 상황이 힘들다는 이야기다.

바빠지는 수술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일그러지더니 다른 화면이 펼쳐진다.

‘……여기는 또 어디지?’

작은 방.

벽 색깔과 테이블을 보니 딱 봐도 우리 병원이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는 양필순 교수님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맞은편에는 보호자 두 명이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교수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일단은 중환자실에서 며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술 전에도 걱정했던 심장 문제 관련 합병증이 온 것 같아요."

그러자 딸이 다급히 묻는다.

"혹시 재수술 때문에 이렇게 된 것 아닌가요? 네? 처음 수술 잘못된 거 때문이냐고요!"

옆에 있던 아들이 조용히 딸을 말린다.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화낸다고 상황이 바뀌는 게 아니잖아."

물론 그렇게 말하는 아들의 눈빛도 침울하다.

양필순 교수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연다.

"……말씀드렸다시피, 심장에 스텐트를 가지고 있는 환자는 언제든 수술 후에 이런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교수의 말이 한동안 이어진다.

하지만, 듣지 못한다.

딸은 얼굴을 감싼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이번에는 아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선생님. 지금 수술한 지 이틀째인데, 며칠 정도 중환자실에 있는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으신 거죠?"

"자세한 건 중환자실을 전담하고 있는 교수가 설명하겠지만, 연세가 있다 보니 코스가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

"……저도 자주 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교수가 사라진 자리에는 천근보다 무거운 적막이 가득했다.

딸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 어떡해?"

"아직 모르잖아. 잘 회복되실 거야."

"만약 잘못되면?"

"……."

"나 이대로 엄마 못 보내. 이렇게 마지막까지 아프기만 하다 가면 안 되잖아, 우리 엄마……!"

딸의 목소리가 점점 울먹임으로 젖어 든다.

바다 밑바닥만큼 깊은 슬픔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때 눈앞의 시야가 다시 일그러지고, 다시 수술방으로 바뀐다.

* * *

파앗―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밝고 서늘한 수술방.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내 손에는 시저(scissors, 가위)가 들려 있고, 눈앞에는 이제 막 닫히기 시작한 정순례 환자의 복부가 보인다.

‘……또 환자가 위험해지는 미래를 봤어!’

두근, 두근.

가슴이 거칠게 뛴다.

수술 도중에 미래를 본 것은 처음이라 정신이 아찔했다.

보호자들의 눈물 섞인 목소리가 아직까지 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정신 차리자!’

동요하면 안 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지금 이 미래를 바꾸고 환자를 구해 낼 수 있는 건 오직 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집중력을 다잡으며 생각했다.

‘방금 내가 본 미래를 정리하자면…….’

오늘 저녁 7시 40분.

정순례 환자는 출혈로 인한 재수술을 받게 된다.

그 후 심장 관련 합병증으로 중환자실에 가게 되고, 환자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피가 굳는 것을 억제하는 약(Clopidogrel).

―출혈로 인한 재수술.

―블리딩 컨트롤.

―그리고 심장 관련 합병증.

흩어져 있던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비로소 머릿속에서 조각들이 착착 맞추어지기 시작한다.

‘내가 우려했던 폭탄이 반대방향으로 터진 거야!’

머릿속에 양쪽으로 당겨지는 줄다리기를 그려 보자.

← : 출혈(bleeding)

→ : 혈전 생성(thrombosis)

이 두 가지 문제는 연속선상에 있다.

그렇기에 수술을 할 때 잘 컨트롤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요소이기도 하다.

← 먼저 왼쪽으로 가 보자.

만약, 피가 굳는 성향이 너무 약해지면?

혈액이 응고되지 않아 출혈이 잘 멈추지 않는다.

지혈이 안 되면 수술이 힘들어지고, 이후에도 각종 합병증이 생길 수 있다.

→ 이번엔 오른쪽으로 가 보자.

반대로, 피가 너무 잘 굳으면?

지혈은 쉬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가 너무 끈적해서 혈전이 생기기 쉬워진다.

이런 혈전이 중요혈관을 막아버리면 목숨을 위협하게 된다.

Q. 그렇다면, 수술 전에 환자의 피를 어느 정도로 끈적하게 할 것인가?

A. 적당히!

뭐든 그렇지만 이 <적당히>라는 말은 어렵다.

출혈이 잘 멈추되, 혈전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샤워기에서 온수와 냉수 사이의 온도를 맞추는 것보다 5백만 배쯤 어려운 일이다.

‘정순례 환자는 혈전이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출혈 문제가 생길 거야. 그래서 재수술을 받게 된다는 건데…….’

과연 이 환자가 재수술 과정을 거치면서 괜찮을까?

심장에 이미 문제가 있어 스텐트(stent)를 가지고 있는 고령 환자.

출혈로 인한 재수술 과정에서 환자에게 쏟아붓는 각종 혈액제제와 불안정한 혈압은, 수술 후 심장 관련 합병증과 강한 관련이 있다.

그 결과가 바로, 내가 본 미래인 것이다.

‘재수술은 안 돼!’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물론 심장 합병증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확률을 최소화하려면 수술은 한 번으로 깔끔하게 끝내야 한다.

어떻게?

출혈을 미리 막자!

지금은 오직 그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다.

‘분명 지금 이 수술에서 놓치고 나가는 <출혈 부위>가 있을 거야……! 그것부터 다시 살펴봐야 해.’

그런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첫째.

나는 출혈 부위를 모른다.

꿈 속에서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어디서 피가 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시 살펴보자고 할 수 있을까?

둘째.

출혈 부위를 찾는다 해도, 컨트롤하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교수님은 이미 퇴장하고 천사연만 남아 있다.

즉 호랑이가 굴을 나가고 여우와 토끼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천사연이 출혈 부위를 컨트롤할 수 있을까? 재수술까지 가게 되는 출혈인데, 레지던트만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따악!

복막을 꿰매던 천사연이 니들홀더(needle holder)로 내 손등을 때렸다.

"뭐 하냐고요, 실 안 잡고?"

천사연의 눈썹이 곤두선다.

내가 생각에 집중한 것은 고작 몇 초 정도인데도 화가 난 모양이다.

"옆에서 재깍재깍 실 당겨 줘야 내가 빨리 꿰맬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천사연은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난 지금 사소한 신경전에 휘말릴 때가 아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요?"

"아까 복강 안에서 출혈 부위를 본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취했다.

그러자 천사연의 눈빛도 조금 전과는 달리 사뭇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출혈? 어디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이쪽 각도에서 잘 보이진 않았는데…… 이리게이션(irrigation, 세척) 도중에 핏줄기가 약간 올라온 것 같아서요."

나는 에둘러 거짓말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출혈 부위 후보가 너무 많다.

여러 장기를 절제했기 때문에 의심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까 교수님이 확인했고, 내 눈으로도 한 번 더 확인했어요. 이상 없어요."

천사연의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다시 보면 어떨까요?"

내 말에, 천사연의 눈썹이 대번에 치켜 올라갔다.

"장난해요?"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이 전에 없이 사납다.

"벌써 복막 반쯤 꿰맨 거 안 보여요?

"출혈을 내버려 두면 환자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척할 때 문제없었다니까? 지금 인턴 주제에 얼마나 건방진 소리 하고 있는지 알아요?"

천사연이 점점 언성을 높인다.

"몇십 년 동안 수술만 하신 교수님도 못 보고. 나도 못 본 걸…… 이제 막 병원생활 반년 된 본인이 봤다고?"

쿡, 쿡.

한 단어, 한 단어 찌르듯이 말한다.

분위기가 싸해지자, 주위의 간호사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움직임이 멈춰 있다.

<인턴 vs. 3년 차 레지던트>.

얼핏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대결 구도다.

햇병아리 같은 인턴이 감히 레지던트에게 대들다니?

병원이라는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예지는 모두 현실화되었다.

그걸 알고 있는 나는 환자의 안전을 위해서도 절대로 굽힐 생각이 없다.

"……."

천사연도 물러서지 않는다.

물론 한 번 더 꼼꼼하게 수술 부위를 살펴보는 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수술방 간호사들이 모두 쳐다보는 앞에서 인턴 말을 따른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무조건 설득해야 해.’

정순례 환자.

문득, 수술 전에 담담하게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대로라면 그 편지들이 정말 유서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수술방에는 정적이 흐르고, 우리는 줄다리기를 하듯 팽팽한 신경전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 선생님들?"

그때, 뜻밖의 구원투수가 우리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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