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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38화 (138/241)
  • #138 어나더 레벨(10)

    치이익―

    1시간 경과.

    수술실에서는 다들 말이 없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하는 교수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삑, 삑―

    마취과 쪽의 모니터링 기계에서 심박수에 맞춰 작은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그 와중에, 오직 건조한 요구 사항들이 짤막하게 전달되고 있을 뿐이다.

    "메젬바움(metzenbaum, 조직 박리에 쓰는 가위)."

    교수가 간호사 쪽으로 손을 벌린다.

    간호사는 곧바로 교수의 손바닥에 기구를 쥐여 준다.

    착―

    수술기구가 장갑에 달라붙는 소리가 난다.

    이렇게 수술기구를 적절하게 건네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집도의가 수술기구를 잡고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각도로 손에 쥐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숙련된 스크럽 널스(scrub nurse, 수술 간호사)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 볼 수 있다.

    "여기 잡고."

    "예."

    "타이(tie)."

    천사연도 교수의 지시에 따라서 물 흐르듯 움직인다.

    그 와중에, 나는 한 시간째 리차드슨 리트랙터(Richardson retractor, 조직을 당기는 데 쓰이는 수술기구)를 잡은 채 시야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 또한 주의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나의 작은 움직임 하나가 수술 필드의 시야를 바꿔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곧, 어지럽게만 보이던 환자의 복강 내에서, 자궁과 난소가 한 뭉텅이로 환자의 몸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사연아. 보이니? 렉툼(rectum, 직장)이랑 오멘툼(omentum, 대망)까지 퍼져 있어."

    "예."

    <난소암 수술>.

    다양한 복강 내 조직을 절제해야만 하는 수술이다.

    어디를 잘라 내야 하느냐에 따라 최종 수술명에 들어가는 명칭이 50가지가 넘을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 기본적인 원리는 모두 똑같다.

    첫째, 수술로 최대한 잘라 낸다.

    둘째, 나머지는 약으로 항암 치료를 한다.

    말로만 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많은 장기를 잘라 내는 수술인 만큼 위험이 따른다.

    "그리고……."

    교수는 말을 하다가 문득 멈추더니 나를 힐끗 보았다.

    "우리 인턴도 궁금한가 보지?"

    어라?

    나도 모르게 내 몸이 어느새 피사의 사탑처럼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민망함에 머쓱해했고, 교수는 눈으로 웃었다.

    "그런 적극적인 자세 아주 좋아. 인턴이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거든. 이참에 인턴도 이쪽으로 와서 잘 봐 둬."

    "예, 감사합니다."

    교수님은 천사연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교수가 보여 주는 대로 복강 안쪽을 바라보았다.

    "……."

    나는 마스크 아래로 마른침을 삼켰다.

    대망이라고 하는 기름막.

    대장과 소장, 그리고 직장.

    간과 횡경막 등.

    살아 숨 쉬고 있는 정상 장기들과 암 조직이 일부분 퍼져 있는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정상 조직>이 노란색의 지방과 분홍색 조직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면…….

    <암 조직>들은 크고 작은 좁쌀처럼 하얗게 보인다.

    색깔은 하얗지만 사악하기 그지없는 녀석들이다.

    <저희 어머니, 생전 처음으로 해외 구경하시게 됐다고 얼마나 아이처럼 좋아하셨는지 몰라요…….>

    문득 수술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환자를 꼭 건강하게 만들고 싶다.

    평생 가 보지 못한 해외여행도 하게 만들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리차드슨 리트랙터를 당기고 있는데, 교수가 말했다.

    "여기 렉툼(rectum, 직장)도 잘라 내야겠구만."

    자궁을 벗어나 장(腸)까지 진행된 암 때문에, 직장(直腸)의 일부를 절제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우리가 이쪽 하고 나면, 외과에서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연락되어 있니?"

    "네. 교수님."

    천사연이 바로 답했다.

    산부인과 + 외과의 콜라보레이션.

    이를 조인트(joint, 공동) 수술이라고 한다.

    산부인과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나면, 외과에서 들어와 전문 분야인 직장 절제를 시행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조인트 수술은 5시간에서, 상황에 따라서 10시간까지 걸릴 수도 있다.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어."

    교수가 다시 손을 바삐 움직이며 말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암 수술은 하나의 치열한 전쟁이나 다름없다.

    환자 본인에게도, 우리 의료진들에게도.

    * * *

    3시간 경과.

    한참을 집중하던 교수는 문득 낮은 침음을 흘렸다.

    "음…… 됐어."

    투욱―

    교수가 마침내 절제된 환자의 자궁을 절제해 트레이 위에 올려놓는다.

    곧 시뻘건 조직은 간호사의 손에 의해 검체통으로 이동된다.

    "이제 외과 불러 줄래요?"

    "예."

    드디어 전반전 종료인가?

    나는 비로소 어깨에 힘을 뺐다.

    서늘한 수술방의 온도에도 불구하고, 등에서 땀이 살짝 흐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몸에 힘을 빼자 어깨가 뻐근하고 팔이 저려 왔다.

    지잉―

    잠시 후, 수술방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외과의사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변규남 선배님?’

    분명 외과 변 선생이다.

    마스크를 썼지만, 펑퍼짐한 하체와 특유의 걸음걸이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나를 향해 우스꽝스럽게 눈을 찡긋 하고 윙크를 하는 걸 보니 확실히 맞다.

    <그동안 잘 있었어 후배님? 흐흐흐.>

    그렇게 눈빛으로 묻는 듯하다.

    오랜만에 이런 곳에서 만나니 반갑군.

    아마 외과 교수님을 따라서 제1조수로 따라온 모양이다.

    나는 말없이 눈짓으로만 인사했다.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반갑구만!>

    <삭발했던 머리는 그동안 많이 자라셨나 모르겠네요? 수술모를 쓰고 계셔서 잘 안 보이네요.>

    <닥쳐, 흐흐흐.>

    우리는 그렇게 아이컨택으로만 대화했지만, 교수들은 서로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이야말로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어, 신 선생."

    "여기 투머(tumor, 종양)가 먹은 부분 절제하면 되죠?"

    "맞아. 잘 좀 부탁해."

    "CT 봤는데, 이 정도는 선생님이 그냥 하셔도 됐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이 사람아. 확실히 하려면 외과에서 해 줘야지."

    "하하. 그런데 저희 과에서 저랑 레지던트 한 명만 내려왔거든요. 산부인과 인턴 좀 빌려 쓰겠습니다."

    "어, 그래 그래."

    산부인과 교수님은 흔쾌히 나를 빌려주기로 했다.

    마치 그런 상황 같다.

    학창 시절에 옆 사람에게 지우개 빌려주는 것 같은…….

    졸지에 공용 지우개가 된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마 인원 교대를 하며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지우개는 지우개다운 역할을 해야지.

    비록 닳아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집중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변 선생이 옆자리로 와서 무릎으로 내 다리를 툭 친다.

    <힘내라, 짜식. 인턴은 원래 구르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때 수술방을 나가려던 산부인과 교수님이 뒤돌아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맞다. 그리고 이 환자, 좀 이상한 게……."

    이상한 거라니?

    방금 수술 도중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나는 교수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 환자 PCI(관상동맥 중재술) 히스토리(history, 과거력) 있는 환자야. 그런데, 약 끊었다고 그랬는데 제대로 안 지킨 것 같아."

    "아. 그래요? 아스피린이요 아니면 클로피도그렐?"

    "클로피도그렐인 거 같은데, 이 정도면?"

    교수님들은 대화는 빨랐다.

    그냥 척 하면 척 하고 알아듣는 사람들끼리의 대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목소리들이었지만, 나는 집중해서 귀담아들었다.

    클로피도그렐(clopidogrel).

    피를 묽게 하는 약이다.

    관상동맥에 스텐트를 넣은 환자들이 혈전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먹는다.

    하지만, 수술을 앞두고는 출혈 가능성을 대비하여 5―7일 전에 약 복용을 중단해야만 한다.

    그런데 정순례 환자는 그 약 끊는 걸 제대로 안 지켰다는 걸까?

    "심한 정도는 아닌데, 신경 좀 써야 될 것 같아."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

    천사연 선생 역시 교수를 따라서 수술방을 나갔다.

    스크럽을 서고 있던 널스 역시 이 타이밍에 교대를 했고, 결국 원래 멤버 중에는 나만이 필드에 남았다.

    나는 이번에는 외과의 제2조수가 되어 정순례 환자의 수술을 계속하게 되었다.

    * * *

    다시 1시간 경과.

    외과 수술도 마무리되었다.

    다행히 절제해야 하는 대장의 영역은 크지 않았다.

    약간의 유착 때문에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지만, 수술은 모두 마무리될 수 있었다.

    3기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는 양호한 편이었던 것이다.

    "다들 고생했어. 다시 산부인과 선생님들 부르고 우리는 나가지."

    "예."

    "우리 인턴 선생님은 좀 더 고생해야겠네. 졸지에 우리 쪽 세컨(second assistant, 제2조수)까지 서느라 고생했어."

    "아닙니다."

    교수가 툭 던진 말에 나는 가볍게 답했다.

    ‘으갸갹.’

    우두둑―

    허리를 폈다.

    물론 양손은 여전히 수술 필드에 올려 있는 채다.

    가슴 위로 손이 올라오면 언제든 오염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무릎을 번갈아 굽히면서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다리를 스트레칭했다.

    그때 변 선생이 교수님의 뒤를 따라 수술방에서 나가다 말고, 후다닥 내 쪽으로 돌아와 속삭인다.

    "선한아."

    "예?"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다."

    중요한 말이라고?

    변 선생이 모처럼 진지한 표정이다.

    그는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 이 수술 끝나면 오늘 업무 끝이다."

    "……좋으시겠네요."

    "좋겠지? 흐흐. 너는 이거 끝나면 10분 뒤에 또 수술방 서지?"

    보아하니, 나를 놀리기 위해 굳이 발걸음을 되돌려 내 옆으로 온 모양이다.

    "어우, 인턴들은 빡세서 어떻게 사나 몰라? 우히힛!"

    변 선생이 커다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수술실에서 퇴장한다.

    어우, 얄미워.

    딱밤 때려 주고 싶다.

    사람이 참 일관적이랄까.

    나는 마스크 아래로 피식 웃고 제자리에서 계속 스트레칭을 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네.’

    수술이 잘 끝났다.

    물론 모든 경과가 내 쪽에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수술방으로 돌아온 산부인과 교수님의 이야기로 말미암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투머(tumor, 종양) 퍼진 게 심하지 않은 편이었어. 수술도 잘된 것 같고, 그렇지?"

    "네. 교수님 솜씨 덕분에요."

    천사연이 또 숨 쉬듯 자연스럽게 아부를 한다.

    교수님은 다시 배 안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닫자. 고생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지잉―

    교수가 나간다.

    이제 마지막 이리게이션(irrigation, 세척) 하고 봉합만 하면 수술 종료!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탁 풀린다.

    천사연은 나를 힐긋 보더니 말한다.

    "왜 그래요. 혼자 5시간 동안 연속으로 스크럽 섰더니 힘들어요? 나 때는 말이에요, 흉부외과에서 10시간짜리 수술도 들어간 적 있었어요."

    천사연이 또 꼰대 공격을 시도하면서, 복강 안을 세척하기 위해 생리식염수를 붓는다.

    이리게이션.

    수술의 주요 과정(main procedure)이 끝나고 나서 환자의 몸속을 마지막으로 씻어 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출혈 부위를 확인하기도 하며, 몸속에 남은 거즈가 없는지 체크하기도 한다.

    곧, 이리게이션이 끝났다.

    이제 복부를 닫기 위해 천사연 선생은 니들홀더를 들고, 나는 씨저(scissor, 가위)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기분이 싸하지……?’

    나는 어젯밤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던 환자의 컨디션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괜히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만약 문제가 될 상황이었다면 교수나 천사연이 놓쳤을 리 없다.

    그들은 나보다 부인과에서 수백 번이나 더 많은 경험들을 쌓아 온 사람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

    파앗―

    시간이 느려진다.

    곧이어 무영등으로 비추어진 눈앞이 어두워진다.

    정전?

    아니, 그럴 리 없다.

    연국대병원의 수술실은 비상전력체계를 사용하고 있기에 정전이 될 일이 없다.

    이건, 내 시야가 어두워진 거다.

    ‘어라? 잠깐만…….’

    뭔가 좀 이상하다.

    이건 미래를 보여 주는 게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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