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36화 (136/241)

#136 어나더 레벨(8)

나는 귀를 기울였다.

병실 안쪽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란스럽게 얽히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래!"

"엄마. 넣어 둬요!"

"그냥 받아 둬. 수술하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는 거야."

"됐다니까!"

"그래 여보, 수술 전에 괜히 불길하게 이러는 거 아니야!"

무슨 일일까?

다행히 서로 악감정으로 싸우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베드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실례합니다."

그러자 커튼 안쪽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편, 아들, 딸.

세 명의 보호자들이 눈이 시뻘개져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금방이라도 눈물바다가 될 것 같은 분위기다.

그 가운데서, 여성 환자가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시죠?"

"동의서 한 장을 받아야 해서요……."

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접혀 있는 세 장의 편지.

그 겉면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다.

<딸에게>

<아들에게>

<내 사랑에게>

‘유서구나.’

나는 금방 상황을 깨달았다.

혹시 모를 수술 중 사망을 대비하여 유서를 적은 것이다.

그걸 받아야 하는 가족들은 가슴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됐다고 엄마! 나 이거 안 읽어!"

"그냥 잠자코 주머니에 넣어 두라니까. 만약 수술 잘되면 안 읽고 돌려주면 되잖아."

"아 진짜……!"

타악!

딸이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박차고 내 옆을 지나쳐 나간다.

그러자 앉아 있던 환자는 쯧쯧 하고 조용히 혀를 찼다.

"아이구…… 저건 누구를 닮아서 저렇게 성격이 불같을까, 저래."

정순례.

72세의 여성 환자분으로 무척 점잖은 성격이셨다.

낮에 펜과 종이를 부탁할 때도 매우 정중하게 요청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남편분이 울먹이며 내 팔을 잡았다.

"선생님."

"예?"

"우리 안사람이 괜히 걱정하는 거 맞지요? 유서 같은 거 쓸 필요 없다고 말 좀 해 주세요."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정순례 환자의 병은 결코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소암(ovarian cancer).

지금 정순례 환자는 3기가 예상된다.

3기 환자들의 5년 생존율은 타입(cell type)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50%.

달리 표현하면 5년 뒤에 절반은 살아 있지 못한다는 소리다.

나는 보호자에게 말했다.

"수술동의서에 있는 사망 가능성 설명을 듣고 걱정하시는 거죠?"

"예에……."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여기서 지켜보니까, 대부분 환자분들이 수술받고 문제없이 퇴원하시더라구요."

나는 늘 하던 말로 보호자들을 달랬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가족들의 불안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특히 남편분은 벌써부터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니, 그러면 확실히 안전하다고 말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망 가능성이다 뭐다 사람 불안하게……."

그러자 환자가 그를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어휴, 그만 해요. 사람 죽고 살고가 맘대로 되나요? 다들 때 되면 가는 것이지."

"당신은 무슨 말을 그리해!"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에이 씨…… 당신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아이고, 민망스럽게 왜 그래요. 의사 선생님도 듣는데."

정순례 환자는 얼굴을 붉혔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절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부부였다.

연세가 드셔도 저렇게 금슬이 좋기가 쉽지 않을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병원에서 안내해 드리는 대로 치료받으시면 반드시 좋아지실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사인을 받아야 하는 동의서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IV PCA(무통주사).

수술 후 무통주사가 필요한 환자들에게는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중요한 수술동의서는 주치의가 직접 받지만, 이런 자잘한 동의서는 나의 몫이었다.

"혹시 불편한 것 있으시면 바로 말씀 주세요."

"예, 고마워요."

나는 동의서를 받고 베드에서 멀어졌다.

그때, 환자의 아들이 따라 나오더니 내게 물었다.

"저, 선생님."

"예?"

"어머니 둔 아들로서 여쭤보는 건데, 정말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희 어머니 수술하는 교수님 평판이 어떤 편인가요?"

그렇게 물으며 주위의 눈치를 본다.

나에게 솔직한 정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양필순 교수님, 부인과에서 평생 수술만 하신 분이세요. 저희 병원 내에서도 명망이 높으신 분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내 말은 사실이었다.

양 교수님은 난소암 수술 전문이다.

이분에게 수술을 받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기도 할 정도다.

그제서야 아들이 조금 안심한 기색을 띠었다.

"저희 어머니, 원래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여기 병원 몇 차례 입원했었어요."

"아……."

"그나마 올해 좀 좋아지신 것 같아서, 겨울에 해외여행 보내 드리려고 비행기표도 끊어 놨었거든요."

남자가 말을 하다 말고 목울대를 울렁거린다.

"저희 어머니, 생전 처음으로 해외 구경하시게 됐다고 얼마나 아이처럼 좋아하셨는지 몰라요. 선생님, 그러니 꼭……."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수술이 많이 걱정될 것이다.

병원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루어지는 수술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될 겁니다."

나는 그렇게 보호자를 안심시켰다.

남자는 내 위로에도 불구하고 복도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울먹였다.

* * *

잠시 후, 저녁 8시.

부인과 병동은 여기저기 TV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가득했다.

―딴딴 따라단~

오늘의 드라마는 시청률 30퍼센트에 육박하는 『천벌받을 여자』.

매 화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막장 드라마로 안방극장에서 인기가 많았다.

TV 스크린 속 두 여자 배우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열연을 펼치고 있다.

<그래, 유나는 사실 네 딸이야!>

<뭐라고?!>

<네 기억상실도 사실은 내가 약 먹여서 그랬던 거야!>

<왜…… 도대체 왜 그랬어!>

<우리 엄마가 시켰어!>

<으아아! 어떻게 네년이 그럴 수 있어!>

짝짝!

주인공이 악역의 뺨을 왕복으로 후려친다.

그러자 마치 스포츠 경기 결승골이 터진 것처럼 여기저기서 아주머니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아이구 잘한다!"

"저 나쁜 것은 더 때려야 돼!"

"속이 다 시원하네!"

이것은 부인과 특유의 풍경이었다.

인기 있는 드라마가 있으면 환자와 보호자들이 다들 옹기종기 모여서 관람한다.

병실 안이든, 스테이션 사이에 있는 휴게실에서든.

심지어 나도 오가며 몇 번 보았더니 스토리를 파악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넌 천벌받을 거야! 으아아!>

여자 주인공이 절규하며 손을 들어 올린다.

그때,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헐레벌떡 등장한다.

<자기야 그만해!>

<형석 씨, 이거 놔요!>

<그래 봤자 어차피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실 난 네 숨겨진 배다른 오빠란 말이야!>

<뭐라고요?>

쿠웅―

빠밤 빠라바밤―

장엄한 배경음악으로 이번 화가 마무리된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어머니들이 벌떡 일어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방 뭐시여?!"

"저건 웬 미친 소리래?"

"아이고, 미치겠다. 내 저런 막장 드라마 다시는 안 본다."

어머니 환자들은 투덜대며 흩어졌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저렇게 욕을 하시면서 다음 화를 보게 될 것임을.

나는 스테이션에 앉아 있는 미선 누나에게 물었다.

"저 드라마 인기 많은가 봐요?"

"어, 장난 아니야. 완전 흥미진진하더라."

"누나도 봐요?"

"내가 좀 아줌마 취향이잖아, 물론 이제는 진짜로 아줌마 맞지만. 호호호."

미선 누나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때,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정순례 환자.

병실이 갑갑했는지, 휴게실로 나와서 티비를 보고 들어가는 중이셨던 모양이다.

"선생님, 이거 돌려드려야죠."

"아, 네."

뭔가 했더니 볼펜이었다.

낮에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빌려 간 것이었다.

나는 환자분이 내민 볼펜을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

"불편하신 건 없으세요?"

"예에, 괜찮아요…… 아까는 저희 가족들이 괜히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밤 12시부터는 물도 마시시면 안 되는 거 잊지 않으셨죠?"

"그러믄요."

"새벽에 일어나셔서 관장도 하셔야 하니 일찍 주무시는 게 좋아요."

"예, 고맙습니다."

정순례 환자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일 수술이 두려울 법도 한데, 무척 침착하고 강단 있는 성격이신 듯했다.

병실로 돌아가는 정순례 환자의 작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복잡한 심정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몸이 안 좋아서 몇 차례 입원했다고 하셨지. 어디가 안 좋으셨을까?’

딸깍, 딸깍―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차트를 확인했다.

EMR(전자의무기록) 화면을 내리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그동안 봤던 환자들의 케이스랑 좀 다른데?’

정순례

F/72

[과거력]

s/p PCI (6months ago, 본원)

on DAPT

6개월 전.

환자는 심장 기능이 떨어져서, 심장 관상동맥에 스텐트(stent)를 넣는 시술을 받았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항혈소판제제를 복용 중인 상태였다.

‘가뜩이나 심장에 문제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암 수술이라니…….’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가끔 세상은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량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한꺼번에 불행 폭탄을 안겨 주기도 하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럴 땐 수술 후 경과가 위험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볼펜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가며 생각에 잠겼다.

또각, 또각―

때마침 천사연 선생이 스테이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천사연 선생을 따라갔다.

"선생님."

"뭔데요?"

"내일 오전에 있을 난소암 수술 환자분 말인데요."

"정순례 환자?"

"예. 혹시 PCI 히스토리(history, 과거력)가 내일 수술과 얽혀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궁금해서요."

우뚝.

천사연이 걸음을 멈춘다.

그러더니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며 물었다.

"인턴이 그런 건 왜 신경 써요? 신경 쓰면 뭐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달라지는 건 아니어도……."

"그냥 궁금하다?"

"예. 걱정되기도 하고요. 수술 후에 스텐트 혈전(stent thrombosis)의 위험이 더 커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혈전(thrombosis).

사람의 피는 혈관이 손상되면 기본적으로 굳는 성향이 있다.

상처에 딱지가 생기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그 피딱지가 바로 피가 굳은 것이다.

이렇게 피가 굳는 현상이 몸 안에서 발생하면 <혈전>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이 혈전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혈전이 생겨서 몸속을 떠돌다가 중요한 혈관을 막아 버린다면?

큰일이 일어난다!

(1) 뇌혈관이 막히면 = 뇌졸중.

(2) 심장혈관이 막히면 = 심근경색.

(3) 폐동맥이 막히면 = 폐색전증.

위 세 가지 모두, 환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서운 놈들이다.

정순례 환자의 심장 혈관에 있는 스텐트에 혈전이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회진 중에 교수님이 하는 말씀이라도 들었나 보네요?"

천사연의 뾰족한 질문에 나는 대답했다.

"아뇨, 차트를 보다가 문득 우려가 되어서요."

"차트?"

"예."

"……그러니까, 내일 어시스트 들어갈 환자의 차트를 미리 까 봤다는 거죠?"

"……?"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내일 나도 수술에 참여해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인턴들은 워낙 바쁘다 보니 차트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고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어차피 시키는 일만 하면 되니, 대략 어떤 수술인지만 알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고집이라고 해야 할까.

어시스트를 서기 전, 환자의 차트를 꼼꼼하게 읽어 두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았다.

"흐음……."

천사연은 잠시 말을 아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여태까지 나를 대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잠깐 이리로 와 볼래요?"

무슨 의도인지, 천사연은 내게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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