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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35화 (135/241)
  • #135 어나더 레벨(7)

    "네, 10분이면 될 것 같습니다."

    미선 누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천사연 선생의 눈도 커졌다.

    <뭔 황당한 소리야?>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들이다.

    "영상판독을 그렇게 금방 받아 올 수 있다구요?"

    "급하신 것 같아서요."

    "……뭐,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판독받고 나면 나한테 노티해요."

    천사연 선생은 당황한 얼굴을 내색하지 않으며 몸을 돌렸다.

    물론 상식적으로 10분 만에 판독을 받아 오는 건 말이 안 되지.

    만약 내가 평범한 인턴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각, 또각―

    천사연이 사라지자, 미선 누나는 걱정되는 얼굴로 환자의 차트를 살펴보았다.

    급하게 판독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든 찾아보려는 것 같다.

    "선한아…… 아무리 그래도 10분은 오버잖아. 어쩌자고 그렇게 대답했어?"

    "방법이 있어요."

    "응?"

    "잠깐만 기다려 봐요."

    나는 여유롭게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검색했다.

    ―검색 : 추근덕

    추근덕 선생.

    나에게 약점이 잡혀 있는 영상의학과 펠로우다.

    그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계약을 나름대로 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요즘은 주위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조심하며 쥐 죽은 듯 살고 있다 하니까.

    ‘오랜만에 프리패스 좀 이용해 볼까?’

    나는 문자 메시지를 작성했다.

    [선한] 추근덕 선생님. 117XX321 김성자 환자 복부 CT 판독 부탁드립니다.

    나는 문자를 보내 놓고 내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1분 후.

    띠링!

    추근덕 선생의 답장이 왔다.

    [근덕] 나 밥 먹는 중, 그리고 당직도 아니야.

    얼씨구.

    지금 밥이 넘어가?

    이 양반, 한 달 못 보던 사이에 느슨해지셨네.

    [선한] 아 그러시군요.

    옜다, 사진 첨부.

    나는 저번에 촬영했던 동영상의 캡처 화면을 보냈다.

    한강이 보이는 멋진 호텔 카페테리아의 사진이다.

    경치 참 멋있네.

    그러자 곧바로 오타가 잔뜩 섞인 답장이 날아온다.

    [근덕] ㅠㅠ당직한테 지금 전화해 볼게! 내가 말ㅏ하면 금방 판독해서 보내ㅑ주거야!

    [선한] 5분 안에요 ^^

    [근덕] 알았어!!

    진작 그럴 것이지.

    그리고 5분 후.

    나는 EMR(전자의무기록)의 검사 결과 탭을 새로고침 해 보았다.

    짜잔~

    판독이 올라와 있었다.

    옆에 있던 미선 누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어떻게 한 거야?"

    "독촉 좀 했어요."

    "아니…… 독촉한다고 이렇게 판독이 빨리 나와?"

    또각, 또각―

    그때 천사연이 다시 나타났다.

    10분 동안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나기라도 한 걸까?

    "인턴 쌤, 약속한 10분 다 돼 가는데요? 여기서 느긋하게 앉아 있을 시간 없을 텐데."

    설마 나한테 저 말 하고 싶어서 근처에서 계속 기다린 건가 싶다.

    "방금 받았습니다."

    "……?"

    "안 그래도 막 노티드리려고 했는데요. EMR 확인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천사연은 모니터 앞에 앉아 판독 결과를 확인하더니,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하는 표정이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을까요?"

    "……아뇨, 됐어요."

    또각, 또각.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진다.

    "어휴, 저거 하여튼 나이도 어린 게 개싸가ㅈ…… 아니 아니, 이런 험한 말 하면 안 되지."

    미선 누나는 자신의 입을 짝짝 두드리더니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민국이 엄마, 예쁜 말, 예쁜 말……."

    "자기 최면이에요?"

    "응. 애기들 앞에서 험한 말 하면 안 된대. 이제부터라도 욕하는 습관 고쳐야지, 호호호."

    그렇게 말하며 다시 데이터 작업에 열중한다.

    그러다 무슨 키를 잘못 눌렀는지, 화들짝 놀라며 외친다.

    "악 씨이바, 엑셀표 또 날렸어!"

    "예쁜 말, 예쁜 말."

    나는 옆에서 미선 누나에게 주문을 불어넣었다.

    * * *

    병동 인턴.

    수술실 인턴.

    두 업무는 판이하게 다르다.

    수술실에서는 거의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든 편이다.

    그럼 병동이 더 편하냐고?

    꼭 그렇지만도 않다.

    병동 인턴은 몸이 여러 개인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사방에서 온갖 콜이 날아오니까.

    즉, 호불호가 갈린다.

    [선한] 누나, 내일도 제가 수술방 들어가도 돼요?

    [미선] 나는 상관없긴 한데…… 너만 계속 힘들게 수술방 서는 거 아냐? ㅠㅠ

    [선한] 괜찮아요. 전 수술방이 더 재밌어요.

    [미선] 정말?

    [선한] 네. 걱정 마세요.

    나는 미선 누나와 그렇게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요새 수술방에서 일하는 게 더 재미있다.

    왜냐하면 어깨너머로 보고 배울 수 있는 게 많으니까!

    만약 선택할 수 있는 날이면 나는 반드시 수술실을 선택했다.

    송유주 선생님이 말했던 것처럼, 아직 난 수술 경험이 부족하다.

    써젼(surgeon, 외과의)의 길을 걷기로 한 이상, 이번 기회에 착실하게 경험치를 쌓아야겠지.

    ‘그리고, 은근히 이 사람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아.’

    천사연.

    놀랍게도, 이 사람은 실력이 좋았다.

    깐깐한 성격 탓일까?

    남들에게 까탈스러운 만큼, 본인 역시 어시스턴트로서 착실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퍼스트는 저렇게 일하는 거구나…… 배울 점은 배워야겠다.’

    퍼스트 어시스턴트(first assistant, 제1조수).

    비유하자면, 부조종사.

    집도의와 함께 수술을 완성해 가는 핵심적인 역할이다.

    교수와의 호흡도 중요한 부분인데, 천사연의 호흡은 남달랐다.

    가령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수술할 때에는…….

    "타이."

    "석션."

    "반대쪽 잡고."

    ……라는 말이 교수님 입에서 수시로 나왔다.

    하지만, 천사연 선생은 교수님 말보다 더 빨리 몸이 반응했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다음 수술 과정을 예측하고 움직이는 듯했다.

    ‘저 정도면 교수님과 혼연일체 같네.’

    물론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사연은 심지어 교수님의 기분도 잘 맞춰 주었다.

    "모두 수고했어요. 사연아, 잘 봉합해 줘라."

    "네 교수님, 그런데……."

    "……?"

    "다음 달에 해외연수 가시면, 교수님 수술을 못 봐서 어쩌죠? 녹화된 교수님 수술 동영상을 계속 보면서 기다리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으악!

    나는 옆에서 경악했다.

    나 같으면 절대로 낯간지럽고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저런 말 못 한다.

    어쨌든 교수는 기분이 좋아진 듯 웃었다.

    "허허, 그래."

    "네 교수님, 오늘도 많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지잉―

    교수가 나갔다.

    분위기가 민망하다.

    간호사들도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하는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본다.

    "크흠…… 뭘 봐요? 석션이나 열심히 해요. 지금 살라인(normal saline, 생리식염수)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 안 보여요!"

    자기도 아부를 했던 게 민망한지, 나에게 더 역정을 낸다.

    물론 생리식염수는 전혀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지 않았다.

    ‘저 성격만 아니라면 참 배울 점이 많을 텐데.’

    천사연 선생.

    윗사람은 잘 맞춰 주고, 아랫사람은 쥐어짜는 스타일.

    어찌 보면 병원이라는 조직에 가장 최적화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 *

    한편, 수술실 근처에도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바로 수술실 로비 바로 옆에 있는 작은 휴게실이다.

    EMR(전자의무기록)을 확인할 수 있게 컴퓨터가 몇 대 놓여 있고, 작은 테이블과 함께 구석에 커피머신도 있다.

    "하암."

    나는 마스크를 벗고 커피머신 앞으로 걸어갔다.

    요즘 천사연 선생이 시키는 엑셀 작업 때문에 수면이 조금 부족하다.

    얼른 다음 수술 전에 잠을 깨야 했다.

    ‘만약 졸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어떻게 신성한 수술방에서 졸 수 있냐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아주 가끔 있다고 들었다.

    잠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정된 자세로 몇십 분간 조직을 당기고 있으면 졸음이 쏟아진다.

    곧, <서 있어도 졸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 졸아 버린다면 아주 영혼이 빠질 정도로 혼이 나겠지만.

    ‘커피의 신이시여. 오늘 한나절도 맑은 정신으로 깨 있게 해 주소서.’

    위이잉―

    커피머신이 알았다며 내 기도에 응답한다.

    곧 진한 원두 냄새가 휴게실에 퍼진다.

    커피를 한 잔 뽑으며 다음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

    "괜찮아요? 천사연 선생님 때문에 힘들지는 않구요?"

    산부인과 수술방 간호사 선생님이다.

    내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묻는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구, 고생이 많아요."

    "간호사 선생님도 커피 한 잔 드릴까요? 평소에 노란색으로 드시죠?"

    "어머, 고마워요. 제가 노란색 캡슐 먹는 건 어떻게 아셨대? 눈썰미도 좋으셔."

    나는 캡슐커피에 캡슐을 하나 더 넣었다.

    수술방 간호사 선생님은 푸근하게 웃었다.

    마흔 중반 정도의 여성.

    그동안 수술방 경력만 10년이 넘으신다고 한다.

    실제로 교수의 옆에서 수술을 돕는 모습을 보면 내공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성함이 신선한이라고 했던가요?"

    "네, 맞습니다."

    "선한 쌤은 좀 신기하네요."

    "제가요?"

    "매달 인턴 선생님들은 천사연 선생님한테 마른걸레처럼 쥐어짜여서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어떤 인턴 선생님들은 화장실에서 몰래 울고 오기도 하구요."

    그 정도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괴롭히시지는 않으시던데……."

    "트집을 못 잡고 있으니까요."

    "아."

    "선한 선생님 보면, 처음이라 좀 서툴긴 해도 트집 잡힐 구석이 없어요."

    실제로 매번 천사연 선생은 쌍라이트를 켜고 나를 쳐다보기 일쑤였다.

    <뭐 하나만 잘못해 봐!>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을 계속해서 보낸다.

    하지만 며칠째, 나는 그물망에 걸리지 않고 있었다.

    ‘뭐, 앞으로도 트집 안 잡히면 되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불과 몇 주 전.

    나는 곡담에서 죽어 가는 환자의 심장을 보았다.

    개흉 수술!

    심장 마사지와 수처!

    그때의 흥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그래서일까.

    옆에서 레지던트가 트집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것은, 나뭇가지에 부는 잔바람처럼 느껴진다.

    "혹시 천사연 선생님이 꼬투리 잡고 혼내시려 하시면 제가 한 번은 편들어 드릴게요."

    "정말요?"

    "커피 타 주신 값은 해야죠."

    "와, 커피값이 너무 후하신데요?"

    나는 수술방 간호사 선생님에게 웃으며 답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천사연.

    꼬투리를 잡히지 않는 나.

    우리 두 사람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렇게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우리 둘 사이의 신경전에 기어코 변화가 생기는 날이 왔다.

    * * *

    오후 6시.

    나는 병동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동의서 한 장만 받으면 일단은 당장 급한 콜들이 모두 마무리된다.

    ‘어디 보자…… 내일 암 수술이 예정된 환자분이시구나.’

    나는 동의서를 들고 병실 쪽으로 향했다.

    그때, 안쪽에서 여러 사람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언성이 제법 높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서로 싸우기라도 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며 말려야 한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826호 병동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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