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어나더 레벨(6)
"형이 왜 거기서 나와요?"
중원이 형이었다.
연국대 공식 스피커 중원이 형이 여기는 웬일이지?
"얌마, 이걸 혼자 다 하려고 하냐?"
"어떻게 알았어요?"
"좀 전에 미선 아줌마한테 들었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거든."
드르륵―
그렇게 말하며 의자를 끌고 내 옆에 앉는다.
설마 날 도와주러 온 건가?
"같이하자."
"그래도 돼요?"
"어. 나 이번 달 꿀 스케줄이라서 한가해."
와, 이럴 수가.
갑자기 중원이 형이 천사로 보인다.
이마에 비치는 형광등이 마치 엔젤 링 같기도 하고.
"형, 나한테 뭐 잘못한 것 있어요? 웬일이래요?"
"야, 동기 좋다는 게 뭐냐? 그리고 저번에 네가 스케줄도 바꿔 줬잖아. 크크크."
아, 그랬던가?
잠시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5월 스토브 리그 때 중원이 형이 언제든 도와주겠다고 나에게 약속을 했었지.
그때 여기저기 베풀어 놓았던 인심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군.
"미선이가 하던 거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나 계속해!"
"네, 고마워요."
나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이런 게 동고동락이라는 걸까?
서로 어려울 때 사이좋게 도와가는 인턴생활이다.
그리고 잠시 후.
중원이 형이 내 옆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절규하며 소리쳤다.
"으악, 다 날렸어!"
……지원군 취소.
"컨트롤 제트, 컨트롤 제트!"
중원이 형은 나보다 데이터 작업을 못했다.
그래도 두 사람이 하니 훨씬 수월했고, 새벽 1시쯤에는 작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 * *
"흐아암."
다음 날 아침.
나는 하품을 하며 기분 좋게 출근했다.
어제 저녁에 몇 시간동안 엑셀표를 붙잡고 있었더니 눈이 좀 뻑뻑하다.
그래도 어제 중원이 형과 힘을 합쳐 미션을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게다가 어제 당직이었는데도 콜도 많지 않아서, 오늘 괜찮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한아!"
"어, 미선 누나."
미선 누나는 나보다 일찍 출근해있었다.
언제 준비해 왔는지,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밀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어제 나 때문에 고생 너무 많았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아이는 괜찮아요?"
"응, 다행히 그 뒤로는 경련 없이, 오늘 아침에 열은 가라앉았어. 경련도 어제 1분 정도 한 거여서 괜찮을 것 같더라구!"
"다행이네요."
나는 안도했다.
어젯밤에 집으로 달려가며 얼마나 걱정했을까?
내가 엄마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별일 없이 무사하다니 그것만으로 다행이다.
"그건 저 주려고요?"
"응, 보답은 안 되겠지만 이거라도 준비해 놨어."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샌드위치는 새벽에 급하게 만든 거라 맛이 있을지 모르겠다, 얘."
"직접 만든 거예요? 너무 예쁘길래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사 오신 줄 알았어요."
"호호호, 얘는. 거짓말하지 마."
퍽퍽.
평소처럼 밝은 표정으로 내 어깨를 친다.
나는 웃으며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오늘은 수술실이 많이 열리지 않는 날이다.
그래서 미선 누나와 나는 병동의 일을 처리하면 된다.
"선한이 네가 어제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일 좀 더 할게. 콜 있으면 나한테 몰아줘!"
"안 그러셔도 돼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 훈훈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병동의 루틴 잡(routine job)을 나누어서 처리했다.
또각또각―
30분 후.
복도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인턴들? 어제 맡긴 데이터 작업 다 해 놨어요?"
천사연이 웃으며 눈을 부릅뜬다.
저 눈빛은, 뭐랄까…….
콩쥐를 바라보는 팥쥐의 눈빛이다.
마치 <내가 없는 동안 구멍 난 장독대에 물을 다 채워 놓았니?> 하고 묻는 것 같군.
내 대답은 예스다.
왜냐하면, 어제 장독대의 구멍을 메워 줄 두꺼비가 왔다 갔거든.
"다 했습니다."
"내 그럴 줄…… 응? 뭐라구요?"
"다 해서 메일로 회신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연 선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표정이다.
그리고 잠시 후 스테이션에서 엑셀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하루 만에 다 했네?"
고생했다, 수고했다 같은 빈말이라도 없다.
오히려 트집을 잡지 못해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왜 항상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일까?
괜히 김뱀에 이은 두 번째 빌런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체크해 보고 더 필요한 부분 있으면 얘기할게요. 대충 채워 놓은 부분 있으면 안 되는 거 알죠? 이런 것도 다 진료의 일부예요."
"예."
또각, 또각.
천사연이 사라진 후 미선 누나가 성질을 냈다.
"선한아. 방금 저 선생님 말하는 거 봤어? ‘정말 하루 만에 다 했네’라고 중얼거리는 거?"
"저도 들었어요."
"와, 어이없네. 애초에 하루 만에 다 못 할 것 같으면 왜 우리한테 준 거야?"
미선 누나가 성질을 냈고 나는 피식 웃고 넘겼다.
샌드위치가 맛있네.
저런 일 하나하나에 분통 터트리면 인턴 일 못 한다.
* * *
부인과 인턴 1주일째.
나는 점점 수술실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하루에 3~4번의 수술에서 스크럽(scrub)을 서는 것은 매 순간 배움의 기회이기도 했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복강 내부의 모습은 하나하나 소중한 교과서 같았다.
또한 교수님의 손놀림에서도 배울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보비(bovie, 전기칼)를 쓸 때는 전기로 녹인다고 생각해야 되는구나. 칼처럼 힘으로 눌러서 자르는 게 아니었어…….’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 바로 그 서당 개다.
이렇게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이 큰 경험이 된다.
‘몸속에서 림프 노드(lymph node, 임파선)가 저렇게 관찰되는구나. 그리고 떼어 낼 때는 레이어(layer, 층)를 잘 찾아 들어가는 게 중요하겠어.’
나는 내가 미래에 집도의가 되는 순간들을 상상하며 매 순간 집중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어시스트도 쉬워졌다.
내가 아니라 집도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우리 인턴 선생님은 내가 딱 필요할 때마다 잘 도와주네. 우리 1년 차들보다 나은 것 같은데?"
몇몇 교수님들은 그렇게 지나가는 말로 칭찬을 던지기도 했다.
빈말인지는 몰라도 기분은 좋았다.
또 하루는 이런 적도 있었다.
"요새 인턴들은 타이 연습 따로 하고 있나?"
수술의 마무리 과정에서 복강 안을 이리게이션(irrigation, 세척)하던 교수가 물었다.
수술 도중 여유가 있을 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꽤 일반적인 일이었다.
옆에서 복강 안을 석션 하고 있던 나는 얼른 대답했다.
"예, 틈틈이 시간 내서 하고 있습니다."
"1분에 타이는 몇 개나 할 수 있지?"
타이(tie).
말 그대로 실을 매듭 묶는 행위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외과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인 옷의 단추에 실을 걸어 타이 연습을 하기 마련이다.
1분에 몇 개, 그런 식으로 재 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요령껏 대답했다.
"30개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교수는 재미있다는 듯 나를 힐긋 바라보더니, 옆에 있던 스크럽 간호사에게 말했다.
"간호사 선생님, 여기 인턴한테 2―0 블랙 실크(Black Silk, 봉합사) 하나 줘 봐요. 잘하나 보게."
수술 중에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테스트였다.
가끔 이런 경우도 있다.
대학병원은 기본적으로 환자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후학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교수님들은 이렇게 돌발적인 질문이나 테스트, 강의를 통해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건 자신 있지.’
곡담에서 수처 연습을 하면서, 핸드타이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교수님이 드렙(drape) 한쪽에 걸어 주신 블랙실크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손에 익은 대로 핸드타이를 시작했다.
<정방향>과 <역방향>을 번갈아 가면서…….
정―정―역―정.
이렇게 묶으면 절대 실이 풀리지 않는다.
‘1분에 30개는 너끈히 넘겠는데?’
좀 더 빠르게 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손을 본격적으로 움직이려 하는데, 교수님이 웃으며 말했다.
"됐어, 그만해도 돼. 손 돌아가는 게 연습 좀 했구만. 타이 매듭으로 탑 좀 쌓아 봤겠어, 이 친구."
그러더니, 수술도구를 손에서 놓으며 이번에는 천사연 선생에게 말한다.
"사연아. 마무리할 수 있지?"
"예, 교수님."
"인턴이 딱 봐도 연습이 잘돼 있는 친구인 것 같은데. 잘 가르쳐 가면서 같이 마무리하도록 해."
"네."
천사연은 나긋나긋하게 웃는 눈짓으로 대답한다.
지잉―
교수는 문을 나섰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긋나긋했던 천사연의 말투가 금방 바뀌었다.
"어머, 인턴 쌤은 정말 좋으시겠네요? 너튜브 스타에, 교수님한테도 예쁨받고."
주위에서는 또 시작이군, 이라는 분위기였고 나도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타이를 그렇게 잘하시니까 커팅도 잘하겠네? 씨저(scissor, 가위) 들고 내 옆에서 보조 잘해요."
"예."
나는 군말 없이 천사연을 도와 가위로 실을 커팅했다.
호랑이 없는 굴에서는 여우가 왕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교수 없는 수술방에서는?
레지던트가 왕이다.
천사연 선생은 잠시 왕이 된 기분을 만끽하듯 의기양양하게 봉합을 진행했다.
<교수님이 칭찬해 주니까 뭐 좀 시켜 줄 줄 알았지? 천만에. 가위 들고 내 실이나 잘라!>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다.
내 기분?
아무렇지도 않다.
솔직한 심정으로, 뭐 어쩌라고 싶었다.
‘그동안 나도 머리가 좀 컸나 보네.’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인턴 6개월 차.
이제는 레지던트들의 웬만한 말에는 타격도 별로 받지 않는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물론 그들이 나보다 훨씬 경험도 많고 높은 사람인 건 맞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하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일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상황을 내가 컨트롤해서 적응할 수 있는지 알아 가는 것 같다.
천사연 선생님도 결국엔 그 다양한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다.
슬기롭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도 내 성장의 일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 * *
그 후 며칠.
테스트는 틈만 나면 계속되었다.
저녁 7시 반쯤, 미선 누나와 스테이션에서 병동 일을 함께 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인턴들, 54호에 김성자 환자 앱도멘(abdomen, 복부) CT 판독받아 올래요?"
복부 CT검사는 부인과 수술 전에 반드시 행해지는 검사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천사연의 요구는 터무니없었다.
"8시 전에 받아 올 수 있죠?"
"예?"
미선 누나가 놀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30분밖에 안 남아 있었다.
정상적인 코스를 밟아서 판독 신청을 한다면, 30분 안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요, 못 하겠다는 표정이네?"
"아니, 그게……."
미선 누나가 머뭇거리자, 천사연의 눈이 번뜩 빛났다.
"나 때는 영상의학과 달려가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을 하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판독 결과 들고 왔어요."
갑자기 꼰대 공격 시전이다.
미선 누나의 뒤통수만 보이는데도, 당황해 하는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안 돼!
저러다 꼬투리 잡히면, 이번 인턴 끝날 때까지 괴롭힘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내가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천사연이 이번에는 나를 보며 묻는다.
"몇 분 안에 될 것 같아요?"
"10분 주십시오."
"너무 느ㄹ…… 뭐라구요, 10분?"
천사연이 당황한 듯 되묻다가 콜록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