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어나더 레벨(5)
천사연.
산부인과 레지던트 3년 차.
특이사항 : 처음에는 잘해 줌.
그런데 실수 한 번 하는 순간 갑자기 성격이 바뀌면서 악마가 됨.
엄청 깐깐하므로 주의!!
‘분명 인계장에 그렇게 쓰여 있었지.’
원 스트라이크 아웃.
단 한 번의 실수도 안 된다.
즉, 보통의 인턴에게는 이 사람의 그물망을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한 미션이라는 뜻이다.
과연 나는 이번 달에 천사연이라는 미션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
"우리 수술방에 너튜브 스타 오셨네요?"
분명 웃는 눈빛이다.
근데 왜 안 웃는 것 같지?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는 모양인데, 말투가 은근히 날카롭다.
나는 마스크를 쓴 채 꾸벅 인사했다.
"인턴 쌤."
"네."
"리쏘토미 포지션 잡는 거 인계는 제대로 받았죠?"
리쏘토미 포지션(lithotomy position).
산부인과에서 질, 자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쓰이는 특징적인 환자 포지션이다.
즉, 환자의 다리를 양쪽으로 고정하는 자세다.
"네, 잘 받았습니다."
"흐음. 어디 볼까요?"
천사연이 곧 환자 포지션을 살피기 시작했다.
곧, 꼬투리 잡기에 실패한 천사연이 다음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음…… 포지션은 잘 잡았네. 요새도 인턴들끼리 인계장 돌려 보죠?"
"네."
"거기 저에 대해서 뭐라고 써 있어요?"
그러더니, 눈을 희번덕 뜬다.
"인턴들한테 X랄 맞게 구는 인간이라고 적혀 있지 않아요?"
……표정 무서워!
눈 튀어나오는 줄 알았네.
그리고 저렇게 웃으면서 하는 욕이 은근히 더 찰지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아뇨, 꼼꼼히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내 대답에 천사연은 흐응 하고 웃었다.
"미리 말하는데, 시키는 일만 넙죽넙죽 잘하면 그럴 일 없어요. 오케이?"
"예."
그렇게 천사연 선생의 첫 번째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고, 우리는 수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드랩(drape, 방포)을 펴고 난 지 10분이 넘게 지났는데 교수님이 안 오신다.
교수님이 오셔야 칼이 들어가고, 수술이 시작될 수 있다.
이렇게 교수님이 늦게 오실 때는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인턴 쌤, 교수님 오시려면 한참 걸릴 것 같은데 자기소개 한번 해 봐요."
천사연 선생이 말한다.
지금 이 방에서 처음 보는 얼굴은 나뿐이니, 심심풀이로는 제격이었나 보다.
"안녕하세요―"
나는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였다.
다행히 스크럽을 서고 있는 다른 선생님들은 분위기가 좋았다.
"아, 신선한 선생님이구나. 인턴 사이에서 유명하던데요?"
"저번에 뉴스 나왔던 거 잘 봤어요."
그 뒤로도 천사연 선생님은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원래 고향은 어딘지.
그렇게 신상정보를 몇 번 캐물었고, 질문거리가 떨어졌는지 수술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고도 5분쯤 더 기다려도 교수님이 오지 않자, 천사연 선생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분위기 루즈하다. 인턴 쌤이 노래라도 불러 봐요."
"예?"
그렇게 말하는 천사연의 눈빛은…….
뭐랄까, 인턴 기강을 잡겠다는 의지가 강력해 보인다.
아마 그동안 인턴들을 골려 먹을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인 모양이다.
옆에 있던 간호사 선생님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에이~ 선생님, 오늘 처음 온 인턴 쌤한테 왜 그러셔요?"
간호사의 눈빛을 보니, 천사연 선생님 또 시작이시네, 이런 분위기다.
"왜요? 나 때는 인턴들한테 춤추라면 춤까지 췄어요. 요새 인턴들은 하여튼 너무 편한 거 같아."
천사연이 그렇게 말한다.
재밌는 성격이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신청곡 받겠습니다."
"……?"
천사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한 눈빛이다.
"발라드, 댄스, 힙합 다 됩니다. 어떤 거 부를까요?"
"진짜 부른다고?"
"예. 수술실 안에서 불러도 괜찮다고 하신다면요."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수술실은 24시간 긴장감이 도는 공간이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수술이 시작되기 전에는, 서로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뭐…… 아무거나 해 보든가요."
"알겠습니다."
크흠흠.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작은 목소리로 감미로운 노래를 시작했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드르륵―
타이밍 좋게 수술실 문을 열고, 60대 후반 교수님이 들어왔다.
노래 가사와 어우러진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풉."
"푸훕."
"아이고, 내가 좀 늦었네. 뭐야. 왜들 웃고 있어?"
교수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예능의 신이 나를 도운 걸까?
다들 웃음을 참느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뭐 재밌는 얘기 하고 있었나 봐? 다들 눈에 웃음기가 가득하네."
"아…… 아닙니다, 교수님."
"화기애애하고 좋네. 그래도 수술 앞두고 긴장감 풀어지지 않도록 해."
"예."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수술대 옆에 섰다.
한편, 나를 보는 천사연 선생의 눈빛이 묘하다.
<이것 봐라?>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랄까.
나는 마스크 아래로 피식 웃었다.
‘암만 심술부려 봐라.’
어릴 때부터 둘째 누나의 온갖 괴롭힘에 단련된 몸이다.
웬만한 심술로는 간에 기별도 안 온다.
* * *
저녁 9시.
치열했던 하루를 끝마치고 쉴 법한 시각.
하지만 우리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미선 누나가 내 옆자리에서 죽어가며 절규하고 있다.
"아, 눈알 빠질 것 같아~!"
우리는 스테이션에서 엑셀표를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일명 데이터 작업.
문장으로 작성된 환자의 차트를 보며, 여러 가지 수치들을 숫자화하여 표로 옮기는 작업이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걸 일일이 손으로 하고 있냐 싶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작업이 동원되어야 하는 순간들도 많다.
문제는, 그 양이 수천 개나 된다는 것이다.
"856XX712 김승규 환자는 HTN(고혈압) 있고, DM(당뇨)는 없고, 수술 병리 리포트에서 림프 노드(lymph node, 임파선) 개수가……."
탁, 탁, 탁.
미선 누나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력하다가 내게 물었다.
"선한아, 네가 지금 2천 번부터 하고 있지?"
"네. 지금 3백 개쯤 했어요."
"헐, 빠르다."
"이거 손에 단축키가 익으면 좀 더 빨라요."
나는 미선 누나에게 몇 가지 단축키를 가르쳐 주었다.
"에휴, 빨리 인공지능이 발달해야 돼. 그래야 우리가 이런 단순노동을 안 하게 되지."
"그럼 저희도 직업 잃을걸요? 환자 치료를 인공지능이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가?"
그렇게 뻘소리를 주고받는다.
"아 정말 어렵네. 나 이런 거 잘 못하는데……."
타다닥―
미선 누나는 화면에 코를 박은 채 조심조심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다.
"악, 다 지워졌어?"
"뭐라구요?!"
"잘못 눌렀나 봐! 나 저장 안 해 놨는데 어뜩해!"
"컨트롤 제트, 컨트롤 제트!"
겨우 살려 냈다.
세 시간의 공이 날아갈 뻔했다.
미선 누나는 안도의 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런데 이거 우리가 해야 하는 거 맞니? 왜 윗사람들 논문 쓰는 데 필요한 데이터 정리를 지금 우리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건 인턴 잡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레지던트의 심부름이다.
일종의 관행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는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아래로 미루는 것이다.
<이거 내일까지 다 해 놔요. 오케이?>
몇 시간 전.
천사연이 툭 하고 우리에게 던져 준 미션이었다.
도저히 하루 만에 할 수 있는 양이 아닌데도 그렇게 전달해 준 것이다.
말로만 듣던 천사연의 악명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누나 덕분에 프리옵(pre―op, 수술 전 준비)은 빨리 끝났으니까 둘이 나눠서 하면 금방 할 것 같아요."
"그래……."
미선 누나는 한숨을 푹 쉰다.
병동 바닥이 푹 꺼질 것 같은 한숨이다.
"그런데 미선 누나, 무슨 일 있어요?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네요."
내 질문에 미선 누나는 주저하다 대답했다.
"사실…… 우리 애기가 열이 좀 난대서."
"열이요?"
"응. 좀 아까 연락이 왔는데 애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토한다고 해서. 열 재 보니까 39.2도래."
열이 39도 이상이라…….
걱정이 될 만하다.
아이가 아픈데, 자신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고 돌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이 손에 안 잡히지 않을까?
"근데 집에 남편도 있고 괜찮을 거야. 원래 애기들이 열이 잘 나잖아……."
따르르―
그때 미선 누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조심스레 전화를 받던 미선 누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 경련?"
드르륵―
미선 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스테이션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전화를 계속한다.
"언제부터 했어. 열이 몇 도인데?"
그렇게 한참을 통화한다.
표정이 심각하다.
그러더니 점차적으로 언성이 높아진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일하느라 그런 거잖아…… 지금 나 원망하는 거야? 화내지 말고 일단 애기부터 잘 봐 봐. 토는 안 했어?!"
목소리가 커진다.
멀찍이서 대충 들어 보니, 얼추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열성경련(febrile convulsion).
만 3개월에서 5세 사이의 아이에게 발생하는 발작 질환이다.
소아의 뇌는 열에 쉽게 흥분하는 성향을 지니기에, 열이 나면 경련을 일으킬 수 있다.
대개 2~3분 정도의 경련은 건강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경련이 중첩되어 30분 정도 지속되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칫하면 아이의 뇌에 영구적인 손상을 줄 수도 있다.
"누나,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미선 누나가 자리에 돌아오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냐, 괜찮아. 경련 1―2분 하고 말았대. 병원 가 보라고 했어. 아직 할 일 많잖아. 이거 많이 남았는데……."
그렇게 말하며 미선 누나는 다시 키보드를 붙잡는다.
하지만 입술에 핏기가 없고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아무리 의사들이라도, 소중한 가족이 아프다고 했을 때 패닉에 빠지게 되는 건 마찬가지다.
딸깍―
나는 손을 뻗어 미선 누나의 모니터를 껐다.
"누나, 들어가세요."
"……."
"일이 아무리 바빠도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내 말에, 가만히 있던 미선 누나가 갑자기 뚝뚝 눈물을 흘린다.
으악, 갑자기 왜 울어?
"아 갑자기 눈물이 왜 나냐, 미안 미안."
미선 누나는 황급히 천장을 보며 손부채질을 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다.
공동책임인 인턴 잡의 특성상, 서로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
그런데 육아와 병행을 하고 있으니, 아마 그동안 주위 눈치를 많이 봤을 것이다.
"괜찮아요, 제가 손 빠르니까 나머지는 저 혼자 할게요. 낮에 누나가 제 일도 많이 도와줬잖아요."
"……."
"누나가 했던 거 다 저장해서 저한테 넘기고 빨리 애기 보러 가요."
"고마워 선한아……."
미선 누나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잠시 후.
나는 스테이션에 혼자 남아 한숨을 푹 쉬었다.
내 눈앞에는 수천 개의 엑셀 시트가 안녕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언제 혼자 다 하냐."
하얀 건 엑셀 시트요, 까만 건 데이터로다.
여태까지 했던 속도로 미루어 볼 때, 전부 다 하면 새벽 3시가 넘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키보드를 몸 앞으로 당겼다.
"어이, 선한이."
그때, 누군가 병동 문을 열고 등장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있었다. 나를 도와줄 지원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