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32화 (132/241)

#132 어나더 레벨(4)

저벅, 저벅.

수술실로 들어간다.

곧 스크럽 널스(scrub nurse, 수술 간호사)가 손을 닦을 수 있도록 작은 방포를 건네준다.

탁, 탁.

나는 손을 닦았다.

그리고, 스크럽 널스가 벌려 주는 가운 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그동안, 뒤에서는 또 다른 간호사가 내 허리에 맞게 매듭을 지어 주었다.

다음은 장갑을 낄 차례다.

"인턴 쌤, 글러브 몇 번 써요?"

"7번 주세요."

수술용 글러브는 사이즈별로 존재한다.

손 작은 사람들이 주로 쓰는 6번부터, 손 큰 사람들이 쓰는 8번까지.

0.5 단위로 숫자가 커질수록 장갑의 크기도 커진다.

내 손에는 7번이 딱 맞았다.

그렇게 나는 수술에 임할 에이셉틱(aseptic, 무균) 세팅을 마쳤다.

이렇게 세팅을 마친 후에야 환자가 누워 있는 베드에 다가갈 수 있었다.

제1조수로 들어올 레지던트 선생님이 손 씻으러 나가면서 나에게 말했다.

"인턴 쌤, 여기 클로르헥시딘으로 한 번 더 닦아 주면 돼요. 인계받았죠?"

"예."

스윽, 스윽―

나는 링포셉과 컵을 들고 환자의 수술 부위를 소독했다.

그렇게 소독이 끝날 때 즈음, 레지던트 선생님이 손을 씻고 들어왔다.

펄럭―

우리는 드렙(drape, 방포) 양쪽 끝을 잡고 수술 부위를 덮었다.

이제 환자는 복부만이 노출된 채, 나머지 부위는 모두 하늘색 드렙으로 덮였다.

준비 완료!

이제 주연의 등장을 기다리면 된다.

‘수술방의 주연이라 하면 당연히 …….’

지잉―

때마침 수술방 문이 열리고, 우리는 고개를 숙이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 그래요."

아침 7시 40분.

수술방의 주연 등장이다.

첫 수술에 들어오는 교수님들은 저마다 다른 성향을 나타내곤 한다.

바쁘게 다른 일을 하다 오느라 정신없는 분도 있고, 그래서 가끔은 짜증을 내기도 한다.

반면,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고자 긍정 에너지를 내뿜는 분도 있다.

다행히 오늘은 후자다.

"자, 오늘도 힘내서 최선을 다해봅시다."

"네, 교수님."

"달이 바뀌었나 보구나. 인턴 선생님도 바뀐 거 같은데?"

"네, 인턴 신선한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열심히 말고 잘해야지?"

"네!"

"김 간호사 오랜만이네? 출산휴가 갔었다고 들었는데 금방 왔네? 딸이라고 했었나? 건강하지?"

"네, 덕분에요. 기억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수술실의 사람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기에, ‘눈’과 ‘목소리’로 감정을 주고받는다.

성격이 나긋나긋한 산부인과 교수님이 수술방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첫 수술 환자는 자궁경부암 환자였다.

예방 백신과 국가 검진을 통해 발생률이 줄고 있지만, 여전히 부인과 암 중에서 가장 흔하다.

오늘의 수술은 <광범위 자궁 절제술>.

말 그대로 암이 퍼져 있는 환자의 난소와 자궁, 그리고 주위의 임파선 모두를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교수(집도의)

―수술방 간호사

―제1조수

―제2조수

보통 필드의 인원은 이렇게 구성되며, 필드 바깥에도 여러 필수 인원들이 있다.

―마취과 의사

―서큘레이팅(순환) 간호사

등등.

나 빼고 다들 베테랑이다.

이들 사이에서 내가 해야 할 일?

간단히 말하자면, 교수가 시키는 일을 수행하면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석션(suction)."

"예."

쉬이익―

나는 에어 석션에 집중했다.

교수님이 복부를 절개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기구로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간단하지만 소홀히 해선 안 되는 일이기도 하지.’

보비(bovie, 전기칼)를 사용하면 살과 조직에서 연기가 발생한다.

이 연기가 생각보다 꽤 맵고 눈이 따갑다.

또한, 이 연기가 발암물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교수님들 중 기관지가 약한 분들은 연기에 특히 예민하기에, 내가 제때 연기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

안 그러면 나긋나긋했던 교수님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물론 그 외에도 내가 할 일은 많았다.

"여기 잡고 있어 볼까?"

"예."

"좀 더 당겨."

"예."

이 두 가지가, 앞으로 내가 가장 많이 듣게 될 두 명령문이었다.

<잡아>.

<당겨>.

사실상 인턴들이 스크럽을 설 때 가장 많이 수행하게 되는 작업들이다.

교수님이 절개 부위를 벌린 채 나에게 넘기면, 그 정확한 각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된다.

"……."

치이익―

교수는 별다른 말 없이 수술에 집중했다.

옛 현인이 그런 말을 했던가?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은 것이다, 라고.

교수로부터 아무 말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상황이다.

실제로 별말을 하지 않는데도, 수술방 간호사는 제때제때 필요한 기구들을 전달하고 있었다.

"쓰읍."

문득, 조직 박리에 집중하던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는 것일까?

내 쪽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교수의 눈매로 미루어 볼 때 그런 기색이었다.

‘좀 더 벌려야겠다.’

스윽―

나는 내 손에 쥐어진 아미(Army―navy retractor, 당기는 용도의 수술 기구)를 조금 더 힘을 주어 당겼다.

그러자 교수의 눈빛이 다시 평온해지면서 수술이 재개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좀 답답했었는데, 이번에 바뀐 인턴은 센스가 좀 있네."

그냥 단순히 지나가며 물건을 툭 떨어트리듯 하는 칭찬이었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다.

무대 위에서는 주연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연들이 받쳐 주어야 비로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도 빛을 낼 수 있는 법이다.

* * *

4시간 후.

수술이 끝났다.

다행히 첫 수술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다.

‘휴우.’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다.

그럴 만도 했다.

4시간은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힘든 시간이니까.

나도 녹초가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수고들 했어요. 마무리 부탁해."

"예."

지잉―

교수님이 나간다.

집도의는 가장 늦게 들어오고, 가장 먼저 퇴장한다.

이제 마무리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레지던트 선생님을 도와 수술 부위 봉합을 마무리했다.

"환자분, 정신 드세요? 수술 잘 끝났습니다. 심호흡 잘하시면 목에 있는 것 뽑아 드릴게요."

곧 마취과 의사가 환자를 깨운 뒤, 삽관되어 있던 e―tube를 뽑고 우리에게 사인을 보냈다.

수술의 종료를 알리는 사인이었다.

하루 4건.

오늘 내가 배정된 수술방에서 열리는 수술의 개수다.

수술과 수술 사이에는 딜레이(delay, 지연)가 최소한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당연히 마무리 작업도 빠릿빠릿하게 진행한다.

"하나, 둘!"

"엿차."

우리는 힘을 합쳐 환자를 수술베드에서 옮겼다.

그러고 나면, 내가 스트레처 카를 운전하여 환자를 회복실로 이송해야 한다.

드르륵―

나는 이송을 마친 뒤 핸드폰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디 보자…… 다음 수술 준비까지 남은 시간 13분!’

아직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가 남아 있다.

검체(specimen) 운반.

암의 경우에는 조직을 떼어 내서 검사해야 한다.

여기서 세부적인 병기(stage)가 결정되고, 추후 항암/방사선 치료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즉, 수술 검체는 두말할 것 없이 매우 중요하다.

‘이거, 잃어버리거나 하면 정말로 큰일 난다!’

나는 검체를 한쪽 팔로 꼭 끌어안고 병리실로 향했다.

그렇게 검체를 제출한 뒤 문서에 사인을 하면 된다.

여기까지 끝내야 비로소 내 임무 완료다.

즉, 수술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인턴이 있는 셈이다.

‘남은 시간 11분!’

그 안에 허기를 채워야 한다.

점심시간?

그런 게 어딨어?

식사 시간이란 게 따로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수술방의 스케줄에 빈 공간은 없다.

한 수술이 끝나고 다음 수술이 시작되기 전, 수술방을 청소하는 시간이 10―20분 정도 존재한다.

바로 이 짧은 시간이 우리 인턴이 화장실에서 볼일도 보고, 밥도 먹어야 하는 시간이다.

‘서두르자. 밥 안 먹으면 오후 버티기 힘들다!’

식사는 어디서 하냐고?

지하 직원 식당까지 갔다 오려면 한세월이다.

1분이 아쉬운데 거기까지 갈 순 없지.

이런 수술방 식구들을 위해, 수술실 라운지(lounge, 휴게실)에 식당아주머니께서 밥차를 끌고 오신다.

식사도 수술방 근처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밥이 있으려나?"

타닥―

나는 수술방 라운지로 향했다.

오늘의 메뉴는 함박스테이크와 샐러드, 그리고 스프였다.

몇 달 동안 파악된 연국대 식당밥 메뉴 로테이션 중에서 최상급!

잘 다져진 패티 형태의 함박스테이크는 식감이 훌륭했다.

‘갑자기 배고파지네.’

예전에 근욱이가 함박스테이크 두개 가져가려다가 식당 아줌마한테 한 소리 들었었지…….

과연 라운지에 함박스테이크가 남아 있을까?

"안녕하세요, 이모님!"

"아이고, 선한 쌤이네."

식사를 배달해 주는 이모님은 두 달 전 신경외과 스케줄 때 친해진 분이었다.

"별일 없으셨죠?"

"그럼. 마침 밥 딱 하나 남았네."

휴, 가까스로 세이프했다.

오늘 메뉴 정도면 금방 매진되는데, 운이 좋은 것 같다.

나는 마지막 하나 남아 있던 밥을 들고 자리로 향했다.

이미 몇몇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고 있었다.

‘5분 컷 한다!’

나는 밥을 내려놓으며, 동시에 스마트폰을 들어 병동의 상황을 체크했다.

[선한] 누나, 병동에 별일 없죠?

[미선] 응, 수술방은 괜찮아?

[선한] 첫 수술은 잘 끝난 것 같아요.

[미선] 그래, 잠깐만.

띠링―

갑자기 사진 하나를 보낸다.

[미선] 우리 애기 사진 보고 힘내렴. 호호호!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게 자기 아이들인 모양이다.

함박스테이크 조각 하나를 막 입에 넣으려고 하는 그때.

핸드폰의 메시지창이 갑자기 까맣게 변하며 모르는 네 자리 번호가 떴다.

―7015

딱 봐도 15번 방이다.

전화를 받자 간호사가 말한다.

"15번 방 카인(car―in)이요."

환자가 도착했으니 들여보내라는 소리였다.

"네, 갑니다."

나는 얼른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애석하다.

함박스테이크가 눈앞에 있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나는 눈물을 흘리는 김첨지의 심정으로, 함박을 반으로 잘라 입 안에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밥도 다 못 먹고 가는 거야? 이거라도 좀 더 먹어."

이모가 안타깝다는 듯, 부식으로 나온 요구르트를 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가사하니다이모."

나는 볼에 음식물을 저장한 다람쥐처럼 대답한 뒤 라운지를 나섰다.

지극히 평범한 수술방 인턴의 일상이었다.

* * *

예전, 인터넷에서 기사를 본 적 있다.

<회사가 왜 힘든가요?>

그에 대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꽤 인상적이었다.

―인간관계 스트레스 72%

―업무가 힘들다 28%

즉, 일보다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병원도 다르지 않다.

오전 업무가 바쁘긴 했지만, 함께 일한 스크럽들이 모두 친절했기에 나는 수월함을 느꼈다.

‘이번 수술에는 어떤 선생님들이 들어오려나?’

오후 첫 수술 환자의 포지션을 잡고 있는데, 이번 수술의 담당 레지던트가 수술방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 목소리 익숙한데?

분명 중원이 형이 탈탈 털릴 때 들어 봤던 목소리다.

부인과의 빌런, 천사연.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새로운 인턴 쌤이네?"

말투가 의외로 사근사근하고 친절하다.

그 순간, 나는 인턴들이 인계장에 적어 놓았던 흥미로운 문구를 떠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