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어나더 레벨(3)
성격 나쁜 선생님이라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
얼굴을 보면 만면에 선해 보이는 웃음이 가득하다.
<산부인과 천사연>.
가운에 그런 이름이 써 있는 것이 보인다.
"아까 홍세연 환자, 파라센테시스(paracentesis, 복수천자)는 제대로 했겠죠?"
싱긋 웃으며 묻는다.
심지어 친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자 중원이 형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답한다.
"엇, 방금 끝냈고, 2.5L 배액했습니다."
"어차피 곧 떠날 과라고 대충 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그래요?"
천사연 선생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그런데 왜 엑셀 채우는 거는 개판으로 해 놨을까?"
"예?"
"이리 컴."
까딱까딱.
천사연은 검지를 올려 손가락질했다.
중원이 형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 모니터 앞에 앉았다.
"여기 보여요?
"예, 분명히 잘 기입했는데……."
"여기 2325번 환자 병리 레포트에는 절제된 림프노드(lymph node, 임파선) 개수가 13개라고 돼 있는데, 왜 엑셀표에는 31이라고 돼 있을까?"
"엇……."
"이렇게 숫자 틀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희번덕―
눈을 부릅뜨는데, 입은 여전히 웃고 있다.
마치 호러 무비에 나올 것 같은 언밸런스한 표정이었다.
"제가 뭐랬어요? 시키는 것만 잘하면 된다 그랬죠?"
"예……."
"근데 왜 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했을까? 아니, 텍스트로 적혀 있는 것 그대로 옮기는 것도 못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피곤해서 잠시 헷갈렸나 봅니다……."
"핑계 안 되는 거 알죠?"
"예……."
"마지막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탈탈탈.
웃는 얼굴로 사람을 저렇게 털 수도 있구나.
갈굼의 새로운 영역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천사연의 갈굼은 10분 가깝게 이어졌다.
"인계 끝나면 하나하나 대조해서 다시 고쳐 놔요. 오케이?"
"예……."
잠시 후, 천사연이 사라지자 중원이 형은 몸무게가 2킬로는 빠진 듯한 얼굴로 속삭였다.
"저분이 제일 요주 인물이야. 천사연."
천사연이라.
성격 특이하네.
물론 중원이 형이 실수한 건 맞지만, 웃는 얼굴로 저렇게 사람을 쥐어짜는 건 처음 봤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중원이 형이 덧붙였다.
"혹시 레지던트 3대 빌런이라고 들어 봤냐?"
어?
언젠가 들어 봤던 것 같다.
레지던트들 중 세 명의 빌런이 있다고.
저 사람이 김뱀에 이은 두 번째 빌런이구나!
"저렇게 웃는 얼굴에 속지 마라. 천사연 선생님한테 한 번 걸리면 나처럼 한 달 내내 시달릴 수도 있으니까."
잠시 후.
엘리베이터로 돌아가며 미선 누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휴, 저 선생님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엄청 무섭네…… 나이는 어린 것 같은데 웃으면서 사람 쥐어짜는 것 좀 봐."
벌써부터 두려운 모양이다.
반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빌런이라고?
솔직히 별로 걱정 안 된다.
왜냐하면, 김뱀도 사실 그리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거든.
말이 좀 표독스럽고 후배들 갈구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일은 잘했으니까.
심지어 나와 꽤 우호적인 관계가 되기도 했었지.
"저희가 일만 잘하면 문제없을 거예요."
"선한이 너는 참 낙천적이구나."
"같이 한 달 잘해 봐요."
"응, 그래!"
* * *
산부인과.
영문 약자로는 OBGY(OBstetric GYnecology)라고 부른다.
흔히들 그렇게 생각한다.
산부인과? 거기 아이 낳으러 가는 곳 아니야?
하지만 이는 산부인과의 절반만을 바라본 것이다.
출산이 아니더라도, 여성에게 필요한 진료들이 많다.
임신합병증 관리.
성병, 골반염.
난소암, 자궁경부암.
자궁내막증.
월경과 관련된 각종 이상.
등등…….
그렇기에 산부인과는 크게 <산과 OB>와 <부인과 GY>로 나뉜다.
―1, 2주 차 : 부인과
―3, 4주 차 : 산과
이번 달, 나와 미선 누나에게 할당된 스케줄은 이랬다.
9월의 첫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 6시 40분.
나는 조금 일찍 일어나 씻고 수술방으로 향했다.
[미선] 오늘은 수술방 3개 열리니까, 한 명은 병동콜 받고, 한 명은 수술방 들어가면 될 것 같아.
[선한] 그럼 오늘은 제가 수술방 설게요.
[미선] 그럴래?
[선한] 예.
[미선] 그럼 오늘은 내가 병동 보면서, 내일 프리옵까지 다 챙겨 놓을게!
[선한] 오늘 당직은 저니까 제가 나중에 챙길게요~
[미선] 너 오늘 수술 엄청 늦게 끝날 것 같은데? 내가 최대한 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미선 누나와 주고받은 메시지였다.
인턴 잡은 혼자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서로 호흡을 맞추어, 병원 일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선한] 고마워요 누나.
[미선] 그럼 선한아 화이팅!
[선한] 네, 누나도 화이팅해요!
나는 수술실 준비를 마치고 환자를 찾아 이동했다.
웅성웅성―
오전 7시 수술실 로비는 언제나처럼 시장 바닥처럼 분주하다.
나는 카인(car―in)을 하기 위해 수술방 번호를 찾아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은,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게 된 중년 여성 환자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예……."
"환자분, 추우세요?"
"아니에요, 그냥 무서워서……."
수술복을 입은 환자는 무릎 위로 손을 꾹 쥐고 떨고 있었다.
당연히 무서울 것이다.
암 수술이라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니까.
나는 무릎을 굽혀 환자를 보며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조기에 발견되었으니까 수술로 완치될 수 있으실 거예요."
"그렇겠죠?"
"그럼요, 저희 병원 선생님들께서 잘해 주실 거예요."
"네…… 고마워요."
나는 싱긋 웃었다.
물론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내 표정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위로하는 마음은 전달될 것이다.
"인턴 쌤?"
"예."
곧 마취과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나는 환자를 수술방 안쪽으로 이송했다.
카인(car-in).
마취(induction) 보조.
포지셔닝(positioning).
여기까지는 익숙하다.
지난 신경외과에서도 많이 해 보았던 것이니까.
그런데, 이번 달부터 나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인턴, 손 씻고 와."
"예."
스크럽(scrub).
문자 그대로, 박박 문질러 씻는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수술방 활동이 시작된다.
그동안 내가 수술방 무대에서 맡았던 역할이 <지나가는 행인1> 같은 것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드디어 <조연1>이 되는 것이다!
‘좋아. 오늘이 수술실에서 스크럽을 서는 첫날이다!’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수술실을 나섰다.
지잉―
곧바로 수술방 바깥의 개수대로 향했다.
외과적 손씻기(surgical scrubbing).
의사라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중요한 행위다.
일단 수술방에서 스크럽을 서는 사람들은 시계, 인공 손톱, 반지, 다 안 된다.
긴 손톱?
당연히 안 된다. 장갑 찢을 생각이 아니라면.
평소에도 손톱을 짧게 깎고 손톱 밑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난 어제 미리 다듬어 놨지.’
지금에야 이렇게 손을 철저히 씻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800년대.
헝가리에 제멜바이스라는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다.
그는 종종 산욕열로 사망하는 산모들을 보며 생각했다.
<혹시, 의사들이 손을 씻으면 산모들의 사망률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당연한 얘기라고?
지금에야 그렇지.
하지만 당시에는 위생 관념이 막장이었다!
의대생들이 카데바(cadaver, 해부용 시체)를 해부하던 손으로 출산을 돕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제멜바이스는 강경하게 주장했다.
<손 안 씻는 의사는 암살자다!>
하지만 이 주장은 다른 의사들에게 헛소리로 여겨졌다.
<뭔 소리야?>
<손 씻으라고!>
<그럼 그동안 산모들이 죽던 게 우리 탓이라고?>
<그래!>
<야, 쟤 입 좀 다물게 해!>
<내 말이 맞다니까 이 자식들아! 제발 손 좀 씻어! 으아아~!>
……급기야 그는 병원에서 해고되고, 이후 정신병원에 끌려가 말년에 사망한다.
나름 의료계의 흑역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외과적 손씻기를 출산 과정에 시행하자, 산모의 사망률은 크게 감소했다.
손 위생이 수술의 성공률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아무튼, 그건 까마득한 옛날 일이고…….
지금은 당연히 손씻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의사는 없다.
‘첫날이니까 손씻기부터 착실하게 하자!’
각 수술방 옆에는 손을 씻을 수 있는 개수대가 있다.
해외병원에는 스크럽 룸이라는 공간이 따로 있지만, 국내에서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스윽―
나는 손을 뻗었다.
한 줄로 길게 쌓여 있는 소독 브러시 중 하나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허여멀건한 손이 쑥 들어온다.
"그거 제가 찜한 건데요!"
"명인이냐?"
"네!"
류명인.
옆 수술방에 GS(일반외과) 수술이 열려 있던데, 거기에 어시스트를 들어가는 모양이다.
녀석의 목소리에는 나를 향한 묘한 반가움이 느껴진다.
내가 없는 동안 얘는 심심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형, 그동안 숙소에도 안 보이던데 어디 있었어요? 설마 제가 두려워서 피해 다니던 건……."
"나 곡담 다녀왔어."
"예에?"
쿠쿵.
녀석은 갑자기 충격을 받은 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형 실망이에요. 어떻게 저한테 말 한마디 없이 파견을 다녀올 수 있어요?"
"내가 너한테 그걸 왜 말해 줘야 되냐."
"저희 친한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
"거짓말 마요. 곡담에서 제 선물 사 왔죠?"
어휴, 번거로운 녀석.
오랜만에 이 녀석과 대화를 하니 진짜 연국대병원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딱 든다.
나는 옆으로 이동해 손을 씻으려 했다.
그때 류명인이 손으로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형, 거기 물줄기 약하더라구요. 옆자리가 훨씬 나아요. 알려 줘서 고맙죠?"
"그래, 고맙다."
"후후……."
녀석은 내 영혼 없는 대답에 만족한 듯, 마스크 위의 눈 모양으로 웃었다.
얘는 이제 나를 견제하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쫄쫄 따라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손이나 얼른 씻자.’
찌익―
제품을 뜯는다.
한쪽 면은 부드러운 스펀지로 되어 있고, 한쪽 면은 뾰족뾰족한 브러시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소독약이 묻어있다.
이걸로 손가락 끝부터 팔꿈치 5cm 위까지 박박 문지르면서 씻으면 된다.
벅벅벅―
손 구석구석을 브러시로 문질러 꼼꼼하게 닦고.
툭―
무릎으로 개수대 앞을 친다.
쏴아아―
그렇게 수도를 켜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면 된다.
단, 주의할 점!
언제나 손가락 끝이 팔꿈치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
손가락 끝을 오염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팔을 굽혀 손을 항상 위쪽으로 해야 한다.
만약 팔꿈치에서 흐른 물이 손에 묻어 버리면, 도로 오염되기 때문이다.
"형, 우리 손 씻는 거 뭔가 멋있지 않아요? 저는 어릴 때 드라마 보면 의사들이 손 씻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구요."
류명인이 내 옆에서 손을 씻으며 말한다.
굳이 대답하진 않았지만, 사실 나도 조금은 공감했다.
어릴 땐 그랬지.
지금 생각하면 별게 다 멋있었구나 싶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그나저나 제 선물은 언제 줄 거예요? 나중에 서프라이즈로 주려고 그러는 거……."
"간다. 수고해."
나는 류명인의 헛소리를 끊고 자리를 떴다.
물이 뚝뚝 흐르는 양손을 하늘로 향하도록 들고 수술방으로 걸어갔다.
문은 어떻게 여냐고?
당연히 발로 열지.
수술방 문 옆, 바닥 근처에는 발 앞꿈치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지잉―
문이 열렸다.
그렇게, 연국대병원에서 나의 첫 수술 어시스트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