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30화 (130/241)

#130 어나더 레벨(2)

내 등을 두드리는 힘이 예사롭지 않은 게, 안 봐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마동섭 선생님!"

"안녕?"

못 보던 사이에 몸이 더 커진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송유주 선생님이 걷고 있다.

흉부외과 2인조.

두 사람의 덩치는 아무리 봐도 언밸런스하다.

야생 곰과 야생 고양이랄까?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흉부외과답게 야생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겠군.

"안녕하세요!"

"어디 가는 길이냐?"

마동섭 선생님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다음 달 산부인과 인계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본관 가는 길이세요?"

"그래. 우리는 본관에 컨퍼런스 있어서."

탁탁탁―

그들의 걸음은 마치 경보를 하듯 빠르다.

저건 흉부외과 사람들 특유의 버릇인 모양이다.

<뭐든지 빨리빨리!>

나는 그들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속도를 올려야만 했다.

‘두 분 다 진짜 빠르시네.’

흔히들 이야기한다.

인턴과 레지던트는 걸음걸이만 봐도 구분할 수 있다고.

만약 3월에 병원 로비에서 어리버리 걸어가는 의사를 봤다? 백 프로 인턴일 것이다.

또한, 병원에서 의사들의 연차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가운의 상태다.

인턴들의 가운은 빳빳하고 깔끔하다.

하지만 레지던트 3년 차쯤 되면, 하얗던 가운이 헌 옷이 되어 흐물흐물하다.

물론 외관상 깔끔해 보이는 건 내 쪽이지만, 내 눈에는 그들이 더 멋있어 보인다.

뭐랄까…… 화가의 앞치마에 물감이 묻어 있으면 더 멋있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랄까?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야 송유주. 너도 인턴한테 인사 좀 해. 반갑지도 않냐?"

"어. 안녕."

송유주는 내 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마동섭 선생이 피식 웃더니 짓궂게 물었다.

"유주야, 너 얘 이름은 기억하냐?"

그건 나도 궁금하다.

과연 내 이름을 기억할까?

송유주는 골똘히 기억을 떠올리다, 마치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선."

"오, 두 글자는 맞췄어."

짝짝짝.

장족의 발전이라는 듯, 마동섭이 박수를 쳤다.

역시 내 이름 세 글자를 기억시키기엔 아직 부족한 모양이군.

그들 앞에서 나는 자랑하듯 말했다.

"선생님들, 저 파견 가서 심장 만져 봤습니다."

"뭐?"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마동섭이야 그렇다 쳐도, 항상 무표정인 송유주의 눈이 커진 건 처음 본다.

"인턴이 무슨 심장을 만져? 요새 인턴들 파견 가는 병원 바뀌었나? 파견지에는 원래 흉부외과도 없을 텐데?"

"그게……."

나는 대략적으로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칼부림.

가슴의 자상(stab injury).

응급실 개흉.

내 손으로 직접 했던 개흉 심장 마사지(open cardiac massage).

그리고 내가 풍 선생님을 도와 직접 손으로 폐를 봉합했던 일까지.

그제서야 송유주가 납득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풍 선생님 만났구나."

"아세요?"

"알지. 예전에 연국대병원 흉부외과에 계셨잖아? 지금 곡담에 있다고는 들었는데."

와아.

흉부외과 의사들의 세계는 정말 좁구나.

하긴 연국대 흉부외과 족보에 장풍 선생님 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을 테지.

아니면, 1년에 한 번씩 크게 열린다는 흉부외과 가을 학회에서 봤을까?

풍 선생님이 학회에 꾸준히 갈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동섭이 감탄했다.

"이야. 그나저나 응급실 개흉? 거기에다가 오픈 마사지? 인턴치고는 정말 어마어마한 일을 겪었구만. 레벨업 좀 했겠는데?"

레벨업?

또 게임 같은 표현을 한다.

예전에 마동섭은 흉부외과의 단계를 스테이지 1, 2, 3이라고 이야기한 적 있었지.

그런데 나는 그 모든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경험을 하고 왔으니, 레벨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뛰고 있는 심장 만져 본 소감은 어때? 심방, 심실은 구분했으려나?"

"솔직히 너무 정신이 없었어서 기억도 잘 안 납니다."

"크크. 그래도 대단하네. 처음 어시스턴트를 서면서 오픈 카디악 마사지로 심장도 살려 내고, 렁(lung, 폐)를 꿰매 보기까지 했다고? 이거 완전 수술방 체질인 거 아냐? 흉부외과 와야겠구만~!"

마동섭의 띄워 주는 말에 나는 머쓱히 웃었다.

물론 아직 나는 애송이다.

고작 한두 번의 어시스트 참가만으로 수술방 경험치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라도 하듯, 송유주 선생이 물었다.

"너, 수술과 좀 돌아봤어?"

"흉부외과 말고는 아직 신경외과만 돌아봤습니다."

"기껏해야 카인, 카아웃(car―in & car―out) 같은 것만 해 봤을 거 아냐? 제대로 경험 쌓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네."

송유주가 냉랭하게 말했다.

<너, 아직 명함 내밀기엔 이르다.>

그런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러자 옆에서 마동섭이 냉큼 끼어들었다.

"야, 송유주. 이럴 때 인턴을 살살 꼬셔야지. 왜 벌써부터 기를 죽이고 그래?"

"꼬시긴 뭘 꼬셔."

"인턴들한테 잘해 줘라. 이러다가 내년에 흉부외과 지망 한 명도 없으면 어떡할래?"

"뭘 어떡해. 다 같이 과로사로 뒤지는 거지."

"야아."

두 사람은 그렇게 티격태격했다.

띠잉―

그때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가 내리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마동섭 선생님이 물어봤다.

"너 여기서 내려? 아 맞다, OBGY 인계받으러 간다고 했지."

"예, 맞습니다."

"고생해라."

"예! 또 뵙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하고 8층에서 내렸다.

송유주 선생님의 말대로 아직 나에게는 좀 더 많은 수술방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달 스케줄은 나에게 딱이다.

<산부인과(OBGY)>.

또 하나의 메이저(major)과.

그리고 수술방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과.

나에게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의 도전이 되겠지만…….

‘뭐든 잘할 수 있어!’

곡담에서의 경험 때문일까?

나는 어떤 인턴 잡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 * *

타닥―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스테이션 쪽으로 향했다.

입구 근처에서는 동기 한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반갑게 다가갔다.

"누나."

"어머 선한아!"

"잘 지내셨어요? 못 본 사이에 피부 좋아지셨네요."

"오호호호호. 얘는. 나 완전 쭈구리 다 됐는데 무슨 소리니? 빈말이라도 고맙다 얘!"

퍽, 퍽.

미선 누나가 웃으며 내 어깨를 쳤다.

웃음소리가 특이해서, 인턴 동기들 사이에서는 미선 아줌마라고 불린다.

본인 또한 그렇게 불리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쾌활한 성격이기도 했다.

"내가 인턴 하면서 우리 선한이랑 같은 조도 되어 보네. 잘 부탁해! 호호호."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한 달.

미선 누나는 나와 함께 짝을 맞추어 일할 동기다.

32살로 인턴 중에서는 다소 나이가 많은 편이고, 심지어 결혼해서 아이도 있다.

2년 전 만삭인 채로 본과 실습을 돌았고, 방학 도중 출산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아이는 무척 건강한 우량아로, 작년에 돌잔치를 했다고 들었다.

"미선 누나, 육아랑 인턴생활 병행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뼈마디 쑤셔. 장난 아냐~! 그래도 애기 분유값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오호호호."

미선 누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냈다.

"선한아. 우리 애기 사진 보여 줄까?"

"저번에 200장 정도 보여 주셨어요."

"그랬던가? 오호호호, 나도 참 주책이지? 하여튼 애 엄마 되면 다 똑같은가 봐!"

퍽퍽.

또 웃으면서 내 어깨를 친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내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더니 묻는다.

"선한아. 그러고 보니 너……."

"……?"

"뒤통수가 너무 예쁘다 얘! 혹시 어렸을 때 부모님이 잘 굴려 주셨대?"

"어…… 잘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길래 무슨 질문인가 했다.

"요새 넘넘 걱정이야. 우리 애기 뒤통수가 무슨 철판처럼 납작하다니까! 혹시 너희 부모님이 애기 뒤통수 예쁘게 만드는 꿀팁 있으신 거 아니니?"

"나중에 아버지한테 한번 여쭤볼게요."

"그래, 에휴…… 우리 애기도 선한이 너처럼 잘생기게 컸으면 좋겠다."

미선 누나가 한숨을 푹 쉬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애기가 누나 닮았으면 예쁘게 크겠죠."

"어머어머. 너는 말을 왜 그렇게 예쁘게 하니, 유부녀 설레게? 오호호호호!"

퍽퍽!

내 어깨가 안 남아난다.

오늘 안으로 탈골될 듯.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이좋게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어이 중원 아저씨!"

"미선 아줌마 어서 오고!"

곧 인턴 둘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32살 듀오.

서로 나이가 많은 인턴들이라 공감대 형성이 잘되는 모양이다.

"어, 선한이도 오랜만이네?"

"오랜만이에요, 중원이 형."

"이야. 너 얼굴 좀 탔다? 곡담 해수욕장에서 재미 좀 봤나 본데?"

오랜만에 보는 중원이 형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중원이 형은 지난 8월 산부인과 인턴이었다.

곧 우리는 인계를 받기 위해 산부인과 스테이션에 앉았다.

"선한이 너 곡담에서 재밌는 일 없었어? 썰 좀 풀어 봐."

재밌는 일?

그야 많았지.

택시 운전도 해 보고, 무당 행세도 해 보고, 시장바닥에선 칼부림도 막아 보고, 심장도 내 손으로 만져 보고…….

다 말하려면 끝도 없을 것이기에 나는 짧게 답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풀어 드릴게요."

"크크, 알았담마."

"형은 별일 없었어요?"

"야, 나야 좋았지! 산부인과 최고야! 우리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나한테 한 달 동안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와하하!"

중원이 형은 남들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더니, 내 곁으로 바싹 붙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려 줘. 말라 죽을 뻔했다."

"왜요? 뭐길래 이렇게 소곤소곤 얘기하는 건데요?"

"내가 남자 선생님들이랑은 대화가 편한데, 성격상 여자 선생님들이랑은 잘 안 맞는 경우가 있거든."

"그래요?"

산부인과는 대표적인 여초 과다.

물론 교수님들 중에서는 남자 분들도 많다.

하지만 최근 전공의들로만 따지면, 여자 선생님들의 비율이 거의 90퍼센트에 육박한다.

그래서, 가끔 남자 인턴들이 적응을 못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어머어머, 산부인과 레지던트 선생님들 대부분 착하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어? 어떡해……."

미선 누나가 불안한 듯 목소리를 낮춰서 묻는다.

혹시 남들 귀에 들릴까 봐, 거의 입 모양으로만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자 중원이 형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더욱 낮게 속삭인다.

"그게 아니고, 사실 다른 선생님들은 다 괜찮아. 그런데 유독 어려운 한 분이 있어."

"……?"

"초반에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해서 밉보였나 봐. 한 달 내내 심술부리면서 괴롭히는데…… 바닷가 건조대에 걸린 오징어가 말라 가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더라니까?"

중원이 형이 홀쭉해진 볼로 말한다.

아무래도 한 달 동안, 어지간히 눈치를 많이 보면서 일했던 모양이다.

"인턴 쌤."

또각, 또각―

그때,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중원이 형은 흠칫 놀랐고, 나는 새로 나타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그 어렵다는 레지던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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