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심장이 뛴다(13)
백의신의 공방에는 종이들이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다.
얼핏 보아도 수백 장.
전부 연필로 스케치한 것들이었다.
"무슨 그림을 이렇게 많이 그렸어요?"
"자네도 은퇴하면 알게 돼."
"뭘요?"
"심심해서 죽을 것 같다는 게 뭔지."
슥, 슥―
백의신은 캔버스 위에서 손을 쉬지 않는다.
그는 무언가에 한번 집중하면 좀처럼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었다.
"저는 아직 은퇴하려면 멀었거든요?"
"늙는 거 금방이야, 재클린."
"아주 악담을 하세요."
재클린이라고 불린 여자는 툴툴대며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오는 길에 푸드마켓에서 과일 좀 사 왔는데 드실래요?"
"그냥 거기 둬."
"하여간 살 안찌는 사람들은 이유가 있다니까."
와그작.
재클린은 사과 하나를 베어 물며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그림들은 사진처럼 정교했다.
그런데, 그림의 내용들은 온통 수술방에서 볼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심장.
폐.
각종 가슴 속 장기(organ)들의 민낯들.
‘누가 수술에 인생을 바친 의사 아니랄까 봐 내면도 어쩜 이렇게 삭막할까?’
재클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귀여운 강아지라도 그려 봐요."
"강아지는 왜?"
"하루 종일 사람 장기 같은 것만 그리고 있으면 내면이 피폐해질걸요?"
"늙은이 머리에 기억나는 게 그런 것들뿐이라서 그래."
기억나는 대로 그렸다?
재클린은 다시 한번 그림을 보며 감탄했다.
사람의 심장은 하나지만, 그 안에는 수십 개의 각각의 이름을 가진 부위가 존재한다.
그리고 백의신의 그림 속에는 그 하나하나의 부위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근육의 세밀한 가지, 그리고 각 조직들의 표면 질감까지 오차 없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다.
"기억으로 그렸다기에는 너무 사진 같은데요? 무슨 아나토미(anatomy, 해부학) 교재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다, 문득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백 선생님, 역시 수술대 앞에 다시 서고 싶은 거 아니에요?"
"쓸데없는 소리 마."
"선생님이 병원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던데요. 풍 선생님도 그렇고."
멈칫.
그의 손이 멈췄다.
백의신은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
"백 선생님 제자."
"그 녀석은 갑자기 왜?"
"오늘 제 쪽으로 메일이 하나 왔어요. 만약 선생님이랑 연락이 닿으면 전해 달라던데, 포워딩해 드릴게요."
"됐어."
"벌써 보냈어요."
띠링!
재클린은 웃으며 스마트폰을 흔들었다.
백의신은 가볍게 한숨을 쉰 뒤 연필을 내려놓고 테라스 바깥으로 향했다.
사아아―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묵은 공기를 씻어 냈다.
한동안 흑백의 세계에 매몰되어 있다가, 갑자기 세상이 밝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띠링―
곧 그의 주머니 속에 메일이 도착했다.
백의신은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오래된 지인의 편지를 받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선생님, 풍입니다.
건강히 잘 지내시죠?
저희 어머니 장례식 때 뵙고 나서 그간 연락을 못 드렸던 것 같습니다.
은퇴하시고 세상과 연을 끊고 사신다고 들었는데, 인사를 드릴 길이 없어 혹시나 해서 이쪽으로 연락드립니다……
메일에는,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인 풍 선생이 보내는 안부 인사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 장례식 때, 선생님을 외면해서 죄송합니다.
사실 그때, 선생님을 원망했습니다.
내가 백의신 팀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를 좀 더 신경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스테이지4까지 진행하기 전에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만큼 백의신 팀 모두는 오로지 환자와 수술만을 생각하고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니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흐른 뒤에야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게 되네요.
공연히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선생님께 돌려서 죄송합니다.
백의신의 표정은 담담했다.
<냉혈한>.
그를 지칭하는 많은 단어 중 하나였다.
그때도 마찬가지였고, 이제 와서 새삼스레 감정의 동요를 느낄 사람은 아니었다.
……저는 곡담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백 선생님.
혹시 만에 하나, 은퇴를 번복하고 병원으로 돌아가실 생각이 있으시면 저를 불러 주십시오.
저도 곡담 생활을 슬슬 정리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랜만에 심장 꿰매는 수술을 하고 나니까 손이 간질간질합니다.
예전에 선생님이 어시스트 서 주시면서, 제가 Aorta(대동맥)를 처음으로 꿰매던 그날의 설렘도 생각나구요.
"수술?"
그것도 심장 수처(suture, 봉합)?
풍 선생이 보낸 첨부파일에는 지역신문의 한 기사가 PDF로 저장되어 있었다.
<곡담제일병원 응급실, 응급 개흉으로 심장이 찢어진 환자 살려 내……>
사진에는 풍 선생이 양손으로 따봉을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웬 거지꼴이야?"
백의신이 눈썹을 찌푸렸다.
꽤 파격적인 외모였다.
못 보던 사이, 긴 머리에 수염까지 기른 모습이다.
만약 자기 밑에 있었다면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어 버렸을 것이다.
<연국대병원 진료조교수를 역임한 장풍 선생은, 예전 연국대 흉부외과 백의신 팀으로 일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기사를 스크롤하던 백의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편 이날 수술을 보조한 것은 일명 강남역 인턴으로 유명세를 탄 신선한(27) 수련의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한 것은 오직 수술보조밖에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신선한이라.’
분명 저번에도 본 적 있는 이름이다.
기묘한 일이었다.
수많은 인턴 중 한 명일 뿐인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자신이 그 이름을 듣게 되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백의신의 건조했던 눈빛에 잠시 흥미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기사에 집중했다.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EDT라. 괜찮은 판단이었어.’
움찔―
문득, 백의신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의사로 수십 년을 살아온 주름진 손.
그 손의 잔근육들이, <수술>이라는 글씨에 반응하여 미세한 수축반응들을 보이고 있었다.
"쯧."
백의신은 혀를 찼다.
한동안 연필을 잡고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려 보았지만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과일 좀 드실래요?"
"생각 없어졌어."
"왜요? 맛있는데."
"여기 배는 영 퍽퍽하고 맛이 없어서."
그 말을 듣자, 재클린의 입에 슬그머니 미소가 걸렸다.
"그건 그래요. 배는 역시 한국 배가 맛있죠?"
백의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공방을 나서며 생각이 깊어질 뿐이었다.
은퇴한 외과의.
그의 마음은 다 타 버렸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연소하고 재만 남은 장작더미처럼.
그런데, 아니었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조금씩 알 수 없는 불씨가 돌아오고 있었다.
* * *
다음 날.
나는 풍 선생과 작별하고 곡담병원 숙소로 향했다.
아침까지 마셨더니 온몸이 술에 담가진 것 같다.
근무를 마친 소담이와 연서가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왁, 술 냄새! 설마 아침까지 풍 선생님한테 잡혀 있던 거예요?"
"응."
"선한아, 손에 그건 뭐야?"
"너희들 선물이래."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캔버스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웬 그림?"
"풍 선생님이 주는 거야."
"직접 그린 거래요?"
"응. 자기가 나중에 뱅크시만큼 유명한 화가가 되면 1억에 팔 수 있을 거라던데?"
물론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풍 선생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는 취미로 그라피티 아티스트를 겸하고 있었다.
"어? 이거 CPR!"
"곡담역 벽에 그려져 있던 싸인이랑 똑같네?"
"그거 풍 선생님이 그라피티로 그린 거래."
"헐."
"대박."
두 사람이 감탄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림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거 그냥 스티커 붙여 놓고 스프레이 아무렇게나 뿌린 거 아니에요?"
"이걸 어따 써?"
하긴, 내가 봐도 난해하다.
수술도 잘하는데 그림까지 잘 그릴 수는 없겠지.
만약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사기일 거야.
"그나저나 근욱이는 어딨어?"
"나 여깄다."
"깜짝이야!"
근욱이는 눈이 퀭해진 채 귀신처럼 나타났다.
"왜 표정이 그렇게 침울해?"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
"뭐?"
근욱이는 훌쩍이며 말했다.
"어제 아령이 보러 갔는데…… 우리 그냥 쿨한 사이 아니었냐고 하더라. 그동안 나 혼자 연애하고 있었나 봐."
쯧쯧.
그럴 줄 알았다.
보름간의 짧고도 덧없는 인연이었도다.
나는 근욱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힘내라. 어차피 글러 먹은 인연이었어."
"그게 위로냐?"
"다른 사람 찾아봐. 어차피 너 예쁜 사람이면 다 좋아하잖아."
"인마, 같이 운동 얘기만 두 시간 떠들 수 있는 여자가 어디 흔한 줄 아냐? 난 이제 여자한테 함부로 마음 안 줄 거야."
"푸핫!"
연서가 빵 터지며 웃었고, 소담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후.
우리는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 바깥으로 곡담역이 차츰 멀어지고 한적한 풍경이 빠르게 흘러갔다.
모두들 피곤했는지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얻은 게 많은 한 달이었어.’
지난 한 달,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는 환자들을 다뤄 본 경험.
이건 연국대병원에서는 레지던트가 되어서야 경험해 볼 수 있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 경험 속에서 깊이 생각하고 치료방침을 정하면서, 나는 확실히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풍 선생님.
기묘한 인연이었다.
그를 만난 덕분에 수처를 배웠고, 개흉 수술에도 참여해 봤다.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뛸 때 손에 느껴졌던 그 감촉…….
비로소 써젼(surgeon, 외과의)으로의 길에 한 걸음을 내디딘 기분이었다.
그 한 걸음으로 내 안에서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서울로 돌아가면 어떤 인턴 잡이든 거뜬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써젼의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 풍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나더 레벨(1)
9월.
더위가 한풀 꺾였다.
아직 가을이라고 할 만한 때는 아니지만, 그래도 선선한 기분이 든다.
하늘도 유독 파랗다.
저벅, 저벅―
나는 산뜻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암센터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꽤 길다.
느린 걸음으로는 5분 넘게 걸릴 수 있는 길이다.
양측은 투명한 창문으로 되어 나무들이 보이고, 시간에 따라서 채광이 그대로 들어오는 길.
나 같은 인턴들에게는 너무 길어서 항상 뛰어다녀야 했던 길이다.
그렇게 왔다 갔다를 매일 반복했던 길이지만, 한 달 만에 돌아온 이곳에는 흘러간 시간이 느껴졌다.
벽면에 그려진 그림도 달라져 있고,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잎들도 그새 색깔이 변해 있었다.
나 없는 사이에도 병원은 잘 돌아가고 있었구나.
이번 한 달도 열심히 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새로운 시작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오랜만이야!"
투욱―
누군가가 다가와 내 등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