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28화 (128/241)
  • #128 심장이 뛴다(12)

    부다다다―

    할리데이비슨이 도로를 질주한다.

    나는 풍 선생의 등에 매미처럼 찰싹 붙었다.

    와, 이거 장난 아니다.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동에 턱이 덜덜덜 떨릴 지경이다.

    "어떠냐, 내 애마의 성능이! 엄청나지!"

    풍 선생이 헬멧을 뒤집어쓴 채 소리를 지른다.

    성능 좋긴 한데…….

    속도 좀 줄여 주세요!

    까딱하면 뒤로 날아갈 것 같단 말입니다!

    "선생님, 좀 천천히 가면 안 됩니까?!"

    "뭐라고?"

    "천천히 가시라구요!"

    "프리더엄―!"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풍 선생은 바이크의 속도를 더 올렸다.

    나는 기겁하며 그의 등에 더욱 달라붙었다.

    끼이익―

    잠시 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허름한 주택이었다.

    다소 의외였다.

    풍 선생처럼 로컬 병원에서 페이닥터(봉직의)로 일하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집이 소박하기 그지없다.

    "왜. 집이 추레해서 놀랐냐?"

    "아뇨, 고즈넉해 보이고 좋습니다."

    "자식, 말 돌려서 하기는."

    덜컹―

    풍 선생은 파란색 대문을 열었다.

    안쪽에 작은 마당이 보인다.

    오래된 화분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식물을 키우지 않는지 텅 비어 있다.

    그 대신, 무언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저건…… 캔버스랑 물감 통?

    자세히 보니 래커 스프레이 통도 굴러다니고 있다.

    ‘풍 선생님이 그림도 그리시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풍 선생이 말한다.

    "어서 와라. 겉보기에는 이렇게 허름해 보여도 나름 출입 방식은 최첨단이라고! 하하하."

    삑, 삑, 삑―

    풍 선생이 도어록을 누른다.

    물론 최첨단은 아니다. 그냥 낡은 문에다가 도어록만 달아 놓은 거다.

    "자,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계단 몇 개를 올라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딸깍―

    거실 불이 켜진다.

    집 안 풍경은, 뭐랄까…….

    할머니 집 같다.

    풍 선생은 인테리어에 관심이 없는 걸까?

    집 안에 원래부터 있던 수십 년 된 가구들을 그대로 쓰고 있는 듯했다.

    "거기 소파에 대충 앉아! 나는 술 가져올 테니까."

    "예."

    풍 선생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그동안 나는 두리번거리며 거실을 구경했다.

    정말 오래된 시골집 분위기였다.

    그러다, 진열장 위에서 먼지 쌓인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이 사진은……?’

    나는 진열장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풍 선생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연국대병원이잖아?’

    틀림없다.

    10년 전쯤의 모습일까?

    오래된 사진 속 풍경이 눈에 익숙하다.

    수술복을 입은 몇 명의 의사들이 브이 사인을 그리고 있다.

    가운데는 풍 선생.

    지금과는 달리 수염도 없고 머리도 말끔한 모습이다.

    그리고 가장 오른쪽에는 백의신.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무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풍 선생님과 백의신 교수……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나는 사진을 보고 비로소 확신을 가졌다.

    백의신의 제자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기묘한 인연이었다.

    어쩐지 수처(suture, 봉합) 하는 손의 무브먼트부터 예사롭지 않더라니…….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다시 한번 궁금증이 솟아오른다.

    뭐, 본인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나는 사진을 내려놓았다.

    막 소파에 앉으려는데, 테이블 옆에 편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하늘 어린이재단>

    <프레이코리아 해외아동결연>

    <곡담시 아동복지센터>

    등등…….

    여러 자선단체로부터 도착한 감사 편지다.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수많은 어린이들의 활짝 웃는 사진이 담겨 있다.

    ‘혼자서 자선 후원을 이렇게 많이 하고 있다고?’

    대단하네.

    어림잡아 보아도, 몇십 명의 어린이들을 한꺼번에 후원하고 있는 것 같다.

    설마 버는 돈을 다 여기에 쓰는 걸까?

    갑자기 존경스러워진다.

    그때, 풍 선생이 무언가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자, 마시자!"

    타앙!

    딱 봐도 비싼 술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나무 케이스가 스르륵 열리자, 고급스러운 양주병이 위용을 드러냈다.

    "이거 엄청 비싼 술 아닙니까?"

    나는 기가 막혀 물었다.

    술을 잘 모르는 나도 알아볼 정도니까.

    위스키계의 명품이라고 불리는 거잖아?

    게다가 30년산이다.

    그러자 풍 선생이 병뚜껑을 따며 너스레를 떤다.

    "인마, 이게 뭐가 비싸다고? 난 술은 100만 원 이하로는 안 마셔. 최고급 싱글몰트 위스키만 마시지."

    정말일까?

    이 사람 말은 반만 믿어야 한다.

    이 술도 어쩌면 가짜 술일지도 몰라.

    "자, 받아라!"

    "예."

    나는 풍 선생이 내민 유리잔을 받아 들었다.

    꼴꼴꼴―

    진한 호박색의 술이 유리잔을 타고 흐른다.

    술 애호가들이라면 누구나 침을 꿀꺽 삼킬 만한 광경이다.

    "그동안 나름 정들었는데 좋은 술이라도 한 잔 먹여서 보내려고 그런다."

    "감사합니다."

    "한 달 동안 고생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째앵―

    나는 풍 선생과 유리잔을 부딪히고 술을 입술에 담았다.

    화악―

    독한 술기운이 금방 입 안에 퍼진다.

    과일 향 같기도 하고, 나무 향 같기도 하고.

    "어때. 죽이지?"

    "선생님. 혹시 얼음 좀……."

    "야, 인마. 남자는 스트레이트지! 이 자식 보기보다 허약하네. 내가 너만 할 때는 말이야……."

    "또 말도 안 되는 허풍 치시려는 거죠?"

    "어떻게 알았지?"

    풍 선생은 껄껄대며 웃었다.

    "냉장고 있으니까 알아서 얼음 꺼내 먹어라."

    그러더니, 이번에는 나무 케이스에서 시가를 꺼낸다.

    철컥―

    커터로 시가의 끝부분을 잘라 내더니, 능숙하게 토치로 불을 붙인다.

    위스키에 시가까지…….

    만약 이 자리에 근욱이가 있었다면 상남자라며 다시 한번 반했을 것이다.

    긴 머리, 수염.

    허름한 집, 바이크.

    수많은 자선활동, 비싼 술과 시가 등등…….

    한마디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보헤미안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풍 선생님은 신기하신 분 같습니다."

    "뭐가?"

    "다른 의사 선생님들이랑 스타일이 많이 다르시잖아요."

    "야, 의사라고 다 똑같이 살면 재밌냐? 나 같은 놈도 있어야 세상이 재밌지."

    후우.

    풍 선생은 시가 연기를 뿜었다.

    수염에 장발 머리인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마치 유러피안 뮤지션처럼 보였다.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한때 백의신 팀이었을 만큼 대단하신 분이 왜 여기 계신 겁니까?"

    멈칫.

    위스키를 따르던 풍 선생의 손이 멈췄다.

    "어떻게 알았냐?"

    나는 진열장에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15년 전, 백의신 교수님이 연국대병원에서 드림팀 만든 적 있었잖아요. 그때 백의신 교수님과 함께하셨던 분 맞죠?"

    "그래, 맞다. 백 교수님 밑에서 일했었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신.

    그는 최고의 써전(surgeon, 외과의)이자 이슈 메이커였다.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미디어는 그의 행보를 주목했다.

    그리고, 기자회견 당일.

    백의신은 연국대병원 컨퍼런스 룸에 기자들을 모아 놓고 깜짝 발표를 했다.

    <이곳 연국대병원에서 국내 최고의 흉부외과 메디컬팀을 만들 생각입니다.>

    일명 백의신 팀.

    대한민국 흉부외과의 임상 수준을 세 단계 위로 끌어올린다는 모토였다.

    당시에는 혁신이다, 쇼맨십이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어쨌든 그 이후, 연국대병원의 명성은 점점 수직 상승하여 국내 1위로 안착하게 된다.

    "오직 최고의 실력을 가진 외과의만을 팀원으로 인정할 것이다…… 당시에 백의신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내 말에 풍 선생은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잘 알아. 너 백 교수님 덕후야?"

    "네. 다큐멘터리 3부작도 다 봤습니다."

    "뭐? 그 오그라드는 다큐멘터리를 봤다고?"

    "스무 번은 봤을걸요? 거기 풍 선생님도 나오잖아요."

    "젠장, 내 흑역사를 봤구만."

    풍 선생이 투덜거렸다.

    흑역사?

    전혀 아니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풍 선생은 젊고 멋있는 의사였다.

    주로 백의신의 맞은편에서 혼나는 역할이긴 했지만.

    "그때 백의신 교수님 밑에서 못 버티고 도망친 의사들이 한 트럭이라고 들었는데…… 풍 선생님은 그중 생존자 아니셨습니까?"

    "그래, 맞다."

    꼴깍.

    풍 선생은 위스키를 넘기고 인상을 찌푸렸다.

    술의 독함 때문일까?

    아니다. 불현듯 떠오르는 옛 기억이 씁쓸한 모양이다.

    "다 옛날얘기야."

    "옛날얘기 좀 해 주시죠. 저 같은 후학들을 위해서."

    "야 이놈아, 나보고 그 악몽 같은 시절을 떠올리라고?"

    풍 선생은 치를 떨었다.

    "내가 백의신의 백 자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사람이다."

    "어땠길래요?"

    "묻지 마라. 빌어먹을 영감탱이. 사람을 적당히 갈아 넣어야지…… 우리가 무슨 기계도 아니고 말이야."

    절레절레.

    풍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안 들어도 알 것 같다.

    백의신은 완벽주의자에, 괴팍한 성격으로도 유명했으니까.

    아마 수술방에서 풍 선생을 들들 볶았던 모양이다.

    "뭐, 그래도 그 양반 때문에 많이 배우긴 했지. 수술 말고는 다른 잡일로 스트레스 주지는 않았고. 그런데……."

    이어지는 풍 선생의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그때쯤, 어머니가 캔서(cancer, 암) 진단을 받으셨어."

    "……풍 선생님의 어머니께서요?"

    "그래. 췌장암 스테이지 IV."

    스테이지 IV(4).

    어떤 암이든지 4단계가 되었다는 것은 전이(distant metastasis)가 진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 선생은 씁쓸하게 웃으며 유리잔에 술을 채웠다.

    "웃기는 일이지. 아들이 의사면 뭐 하냐? 정작 다른 사람 고치느라 제 가족은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했는데."

    후우.

    풍 선생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마치 그의 허무한 기분을 나타내듯, 오래된 베란다에 한숨처럼 연기가 퍼졌다.

    "그럼 여기가……."

    "그래. 우리 어머니 살던 고향 집이다."

    "아……."

    숙연해졌다.

    풍 선생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구나.

    그가 이런 낡은 집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괜한 기억을 떠올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뭐 인마, 그럴 수도 있지."

    풍 선생의 말이 이어졌다.

    어머니의 암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었다고 한다.

    수술받기에 늦은 것은 물론이고, 항암제를 쓰더라도 남은 기대 여명이 길지 않았다.

    그는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전국 팔도 일주를 하며 여행을 다녔다.

    물론 그 일 년의 후반부에 어머니는 이 곡담 집에 누워 계시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게 일 년 쉬고, 어머니 장례 치르고 나니까 다시 수술방으로 돌아가기 싫더라."

    번아웃(burnout).

    직역하자면, 하얗게 불태운 상태라고 해야 할까.

    업무에서 오는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고 탈진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을 뜻한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다 보니 적성에 맞더라. 결국 이게 내 길인가 싶다."

    결국 의사들의 삶의 루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1―대학교수.

    2―개업의.

    3―페이닥터.

    그중 풍 선생은 3번인 페이닥터를 선택한 것이다.

    어떤 루트를 택해서 살든, 그것은 본인의 자유다.

    "그래도 너무 아까운데요."

    "뭐가?"

    "풍 선생님 같은 실력자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게……."

    "야, 너 응급실 의사 무시하냐? 응급실에서도 손 쓸 일 얼마나 많은데."

    "그런 뜻이 아니구요."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풍 선생은 숙련된 써전(surgeon, 외과의).

    응급실보다는 수술실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어울린다.

    "풍 선생님, 지금 재야에 파묻힌 은둔 고수나 다름없으신 거잖아요."

    "푸하하. 재야 고수?"

    풍 선생은 내 말을 듣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백 교수님의 수술을 한번 참관해 봤어야 그런 말을 못 할 텐데."

    "그 정도였어요?"

    "그래. 한마디로 내가 고수라면, 그 사람은 괴물이었으니까."

    풍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 아련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현역 시절, 백의신 교수의 수술은 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였길래?

    * * *

    미국, 캘리포니아.

    사각, 사각―

    그늘진 공방에 연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백발의 남자가 부지런히 연필을 벽면에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남자는 손을 쉬지 않고 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난 한 여자가 탄성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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