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심장이 뛴다(11)
"……."
환자는 대답이 없다.
그야 입에 두꺼운 기도삽관 튜브가 들어가 있으니까.
하지만 눈꺼풀이 약간이나마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제 목소리 들리시면 손가락 잡아 보세요."
나는 환자의 손을 만졌다.
움찔―
그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살짝 펴더니 내 검지를 살며시 잡았다.
"……!"
나는 쾌재를 불렀다.
내 말을 알아듣고, 몸을 움직였다.
오베이(obey, 의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임)가 된 것이다.
환자의 멘탈(mental, 뇌활동)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타닥―
나는 바깥으로 달렸다.
그리고 곧바로 풍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환자 오베이 됩니다!"
"오, 그래?"
성큼, 성큼.
풍 선생이 반가운 표정으로 소생실로 들어온다.
그리고 곧바로 환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환자분. 왜 여기까지 실려 왔는지 기억나십니까?"
"……."
환자의 입에서는 대답 대신, 쉬익쉬익 하는 산소호흡기 소리만 들려왔다.
"많이 아프십니까?"
끄덕끄덕.
환자는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걸 보니, 수술 부위가 아픈 모양이다.
이 또한 반가운 신호다.
통증을 느낀다는 것?
그건, 비교적 정신이 멀쩡해졌다는 신호다.
"그야 아픈 게 당연하죠. 거의 황천길 너머로 건너가셨는데, 저희가 억지로 다시 돌려놓아 드렸으니까요. 하하!"
풍 선생이 껄껄 웃었다.
그렇게 환자는 조금씩 의식을 찾았다.
우리는 진통제를 주며 환자의 의식 정도를 조절했다.
곧, 보호자도 면회시켜 줄 수 있었다.
"아이고 여보야!"
후다닥!
환자의 아내가 눈물 콧물을 빼며 달려온다.
아까부터 응급실 바깥에서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곧 환자의 아내는 풍 선생을 붙잡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선생님. 어떻게 된 거예요?"
"환자분은 지금……."
"아니 왜 우리 남편이 이 모양이 됐냐구요!"
"자, 설명드릴게요."
"으아아! 선생님, 우리 남편 어떡해요!"
"아니 사모님, 일단 멱살은 놓으시고……!"
역시 화끈한 곡담 시민.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풍 선생의 멱살부터 잡고 흔든다.
풍 선생이 보호자의 흥분을 진정시키며, 한동안 환자에 대한 설명을 한다.
이제 내 역할은 없다.
나는 동기들과 함께 소생실에서 나섰다.
"선한아, 근욱아. 이제 너희 둘은 들어가서 쉬어."
"그래요. 얼른 들어가요. 오늘 일 도와줘서 고맙긴 한데, 너무 피곤하겠다!"
소담이와 연서가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안 그래도 얼른 쉬고 싶던 차였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빠…… 으아아앙!"
어디서 나는 소리지?
우리는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어린 여자아이가 조금 멀찍이 떨어진 채 혼자 울고 있었다.
‘환자분 딸인가?’
아무래도 복도에 혼자 남게 되자 겁을 먹은 모양이다.
엄마는 지금 소생실 안쪽에서 풍 선생의 멱살을 잡고 흔드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릎을 굽혀 아이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안녕?"
"꼬마야, 이름이 뭐야?"
하지만 아이는 우리의 말은 듣지도 않고 계속 울기만 한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빠 보러 갈까?"
뚜욱.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올망올망한 눈을 하고 우리를 쳐다본다.
"우리 아빠 어디 아픈 거예요?"
그렇게, 혀 짧은 목소리로 물어본다.
너무 귀엽고 안쓰럽다.
나는 최대한 돌려서 말하기로 했다.
"아빠가 좀 아야 하고 다쳤는데, 이제 괜찮아요."
"아빠 볼래요."
"그래. 같이 보러 가자. 그런데 손에 있는 그건 뭐야?"
나는 관심을 돌렸다.
아이는 아까부터 스케치북을 꼭 끌어안고 있다.
"우리 아빠한테 내가 그린 그림 보여 줘야 되는데……."
"그림? 어떤 그림인데?"
"나 그림 되게 잘 그려요."
"선생님들한테 좀 보여 줄 수 있을까?"
"네."
곧 아이가 언제 울었냐는 듯 자랑스럽게 스케치북을 펼친다.
저게 뭐지?
문어인가?
아무튼 무언가 이상한 생명체가 그려져 있다.
그때, 내 옆에 함께 쪼그려 앉은 근욱이가 호들갑을 떨며 박수를 치고 리액션을 해 준다.
"우와~ 정말 잘 그렸네!"
"그쵸?"
"응. 진짜 문어 같다!"
"우리 아빠예요."
"……."
아빠였구나.
졸지에 아빠를 문어로 만들어 버린 근욱이였다.
옆에서 연서와 소담이가 입술을 앙다물고 웃음을 꾹 참았다.
"우리 아빠한테 그림 보여 주러 가도 돼요?"
아이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물론 아까 전까지만 해도 환자의 상태는 처참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의식이 어느 정도는 돌아와 있다.
수술 부위도 잘 가려져 있고, 주변의 피 묻은 거즈들도 모두 정리되었으니 괜찮겠지.
"그래, 아빠한테 인사하러 가자."
그러자 여자아이가 팔을 펼쳤다.
안아 달라는 건가?
그러고 싶지만, 내 옷은 좀 지저분한 상태였다.
나는 내 옆에 있는 근욱이를 가리켰다.
"여기 덩치 큰 아저씨가 데려다준대."
"어, 내가?"
"근육 뒀다 뭐 할래?"
그러자 근욱이가 서툴게 아이를 안아 들었다.
오오.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우람한 팔근육으로 아이를 안고 있으니, 안정감이 장난 아니다.
아이의 얼굴도 평화로워지면서 편안해 보인다.
마치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침대에 감싸 안긴 듯한 모습이랄까?
근욱이는 어쩌면 생각보다 소아과에 잘 어울리는 체질일지도 모르겠군.
"환자분, 따님 얼굴 잠깐 보실게요."
우리는 아이를 데리고 환자에게로 향했다.
곧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빠 어디 아파?"
도리도리.
환자는 아주 살짝 고개를 저었다.
다소 힘들어 보였지만,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러자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펼친다.
"이거 봐라. 아빠 얼굴!"
그러자,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환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주륵―
나올 듯 말 듯 눈가에 고여 가던 눈물이 결국 밖으로 흘러내린다.
살았다는 안도감인지, 딸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기쁨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선생님들, 우리 남편 살려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꾸벅―
환자의 아내가 고개를 숙인다.
이제 겨우 흥분이 가라앉은 듯, 풍 선생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
잠시 억울하게 멱살이 잡혔었던 풍 선생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인턴들에게 하시죠. 이 친구들이 빨리 병원으로 데려와서 겨우 살린 겁니다. 운 좋은 줄 아세요!"
풍 선생님의 그 말이, 유독 기분 좋게 느껴졌다.
* * *
지잉―
근욱이와 나는 응급실 문을 열고 나와 숙소로 향했다.
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을 들이쉬었다.
"후우."
늦은 밤.
공기는 상쾌했다.
환자를 살렸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마저 너무나도 청량하게 느껴졌다.
비록 몸은 힘들어서 녹아 없어질 것 같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선한이, 고생했다."
"그래, 근욱이 너도."
"배는 안 고프냐?"
"아, 그렇네."
꼬르륵―
그러고 보니 여태껏 저녁밥도 못 먹었다.
이래저래 정신이 없던 탓에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저녁 먹으러 수산시장 나갔던 거였지?"
"그래 인마."
"지금이라도 저녁 먹으러 갈까?"
"이 시간에 음식점 연 곳이 어딨다고? 그리고 입맛도 별로 없다."
"사실 나도 그래."
우리는 적당히 편의점에서 군것질거리를 샀다.
곡담의 마지막 만찬이 크림빵과 우유라니.
근욱이가 대번에 툴툴댔다.
"생각해 보니 네가 갑자기 대게만 안 찾았어도 우리의 저녁 식사는 평화로웠을 거다!"
"그렇긴 하지."
"우리 선한이, 대게가 되게 먹고 싶었나 보네."
"제발 망한 개그는 두 번 하지 마, 근욱아."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갔다.
"너는 먼저 들어가. 난 씻고 들어갈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샤워실로 향했다.
휘청―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배도 고프고, 목이 바짝바짝 마른다.
하지만 그보다는 땀과 피곤에 전 몸에 물을 끼얹고 싶었다.
"……."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엉망진창이다.
수산시장에서부터 수술실을 거쳐 왔더니, 옷에 여기저기 피가 튀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 번 긴장이 풀렸더니, 온몸이 근육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래서야 내일 아침 제 발로 일어날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건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네.’
괜히 의사들이 수술과를 기피하는 게 아니구나.
써저리(surgery, 외과) 쪽으로 지원한다는 거, 다시 생각해 봐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을 올려다보는데…….
‘응?’
나는 스스로의 표정을 보고 놀라버렸다.
내가 왜 웃고 있지?
미쳤나?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로 돌아 버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미치겠네. 수술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나?’
물론 의사로서 환자의 생명을 살렸다는 뿌듯함도 크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수술의 재미>였다.
극한 상황에서 순간의 판단력과 기술로 환자를 살려 내는 것, 그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만져 본 심장!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할 때의 경이로운 감각!
그것은 평생 잊지 못할 첫 경험이었다.
‘큰일이네. 이거 완전 빼도 박도 못하게 중독될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TS 써전(TS surgeon, 흉부외과의)의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 * *
밤이 깊었다.
하아―
곡담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드디어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근욱이도 그랬는지, 일찌감치 옷을 챙겨 입고 혼자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어디 가냐?"
"여자 친구 만나러 간다."
"지금 이 시간에?"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오늘 밤에라도 얼굴 실컷 봐야지!"
거참 열정적이네.
금방 헤어질 줄 알았는데 마지막 날까지 연애에 진심인 모습이다.
내일 서울 올라가는 시간에 못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친구야. 나는 불타는 마지막 밤을 보내러 간다!"
호다닥!
근욱이는 신나게 뛰어 사라졌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
"청춘이구만."
마침 나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사복으로 갈아입은 채 보호자 대기실의 자판기로 향했다.
딸깍―
벌컥, 벌컥.
이온음료 캔을 들이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도 좀 정들었네.’
곡담제일병원.
허름하지만 언제나 환자가 들어차던 곳.
한 달 동안, 이 병원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체감상 마치 반년은 굴렀던 것 같이 느껴졌다.
"어이, 똘똘이."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물론 저렇게 나를 부르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다.
사복 차림의 풍 선생님이 삐딱하게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오늘 너 때문에 응급실에 잡혀서 몇 시간을 더 일했는지 아냐?"
"죄송합니다."
홱―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내 쪽으로 던졌다.
나는 얼떨결에 그가 내민 헬멧을 척 하고 받았다.
풍 선생이 씩 웃었다.
"따라와, 인마. 마지막 날인데 술 한잔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