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심장이 뛴다(5)
‘또 시작이다!’
다시 시작된 예지몽.
그런데 장소는 그대로다.
그 말은 즉…….
이곳 수산시장에서 조만간 사고가 일어난다는 뜻일까?
‘마지막 날까지 방심할 수가 없네.’
이번엔 또 무슨 사고길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저 사람은…… 첫날 만났던 택시기사 아저씨잖아?’
술을 마신 건가?
눈빛이 맛이 갔다.
그리고 손에 뭘 들고 있다.
회칼, 통칭 사시미.
손에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빠르게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돌진하는 성난 소를 투우사의 1인칭 시점으로 보는 것 같다.
"뭐, 뭐야?"
나는 깜짝 놀라 물러섰다.
물론 그가 나를 노리고 달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꿈속에서 어디까지나 투명인간일 뿐이니까.
그는 나를 통과해 내 뒤에 있던 누군가에게 달려들며 칼을 휘둘렀다.
"죽어, 이 새끼야!"
"어어?!"
퍽, 퍽.
섬뜩한 소리.
날카로운 날붙이가 사람의 몸뚱아리를 뚫는 소리, 그리고 쇠와 뼈가 부딪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였다.
선혈이 낭자하다.
무슨 조폭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꺄악!"
"워매, 뭔 일이야!"
"경찰 불러!"
시장 주변의 사람들이 혼비백산 흩어진다.
택시 아저씨는 쓰러진 남자 위로 올라탄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칼을 높이 치켜든다.
"감히 날 무시해?"
"으으……."
퍽, 퍽, 퍽!
몇 번이나 내리찍는다.
이미 난도질이 된 가슴에 여러 번 바람구멍이 뚫리고, 심장 혹은 대동맥이 손상되었는지 피가 솟구쳐 오른다.
남자는 과다출혈로 인한 저혈압성 쇼크로 정신을 잃고,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시장 바닥을 적신다.
‘맙소사…… 살인 사건이라니. 이젠 이런 것까지 보여 줘?’
경악스럽다.
꿈속이지만 섬뜩했다.
의사가 된 후로 피를 보는 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딸꾹, 개 같은 놈…… 사람을 무시하고 말이야."
택시 아저씨는 피 묻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한 짓을 깨달은 듯, 칼을 던져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쳐 사라졌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저 칼 맞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였지?
나는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대머리에 근육질.
그리고 용 문신.
분명 첫날 택시기사 아저씨와 싸웠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보복살해인가?
일단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남자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가슴에 십여 개의 창상…… 심장 부근이고, 게다가 깊어. 게다가 흘러나온 피의 색깔은 선홍색, 어딘가 아터리(artery, 동맥)가 터졌다는 얘기다. 이 정도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아.’
왈칵, 왈칵.
가슴에서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출혈량은 어마어마했다.
어림잡아도 2L 이상.
생명을 잃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치직―
그리고 화면이 바뀐다.
TV 화면에 뉴스가 나온다.
<8월 30일, 9시 뉴스 시작합니다.>
8월 30일?
그렇다면 내일이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뉴스의 내용에 집중했다.
<어제저녁 7시경, 곡담수산시장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과거 조직폭력배로 일한 것으로 알려진 택시운전사 김 모 씨가…….>
아나운서는 내가 목격한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했다.
만취 상태.
다툼 끝에 칼로 수십 방.
피해자와는 사소한 원한관계.
그리고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김 모 씨가 휘두른 칼에 열 차례 넘게 상해를 입은 장 모 씨는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이송 도중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사건의 잔혹함으로 인해…….>
사망이라.
어찌 보면 당연하다.
칼로 가슴을 여러 번 찔렸으니.
‘이 환자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지? 칼로 찔린 뒤 과다출혈로 이송 중에 사망하는 환자인데……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꿈이 끝나며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 * *
파앗―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혼탁했던 감각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는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싸게 드릴게!"
와글와글.
시장의 소음들이 다시 귀에 들어온다.
나는 고개를 한 차례 흔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곡담수산시장.
분명 조금 전까지는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느꼈는데…….
지금은, 마치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장소처럼 위험해 보인다.
아니, 내가 본 것은 어느 19금 영화보다 더 잔인한 광경이었다.
‘설마 했는데 택시 아저씨가 사람을 죽일 줄이야. 설마 진짜로 조폭이었던 건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나는 옆에 있는 근욱이에게 물었다.
"근욱아."
"왜?"
"지금이 몇 시야?"
"내가 무슨 인공지능 스피커냐?"
근욱이는 투덜대면서도 핸드폰을 꺼내 말했다.
"지금 6시 52분이네. 배고프니까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시간이 없다!
7시까지 앞으로 10분도 안 남았잖아?
이미 찔리고 나면 늦는다.
피해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칼부림이 나기 전에 막는 것밖에 없다.
‘얼른 사고 발생 지점을 찾아야 칼부림을 막을 수 있…… 잠깐만.’
멈칫―
나는 막 움직이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너무 위험하다.
상대는 흉기를 들고 난동을 피우는 전직 조폭.
만약 휘말리면 나나 근욱이도 위험해질 수 있다.
‘이번에야말로 끼어들지 말아야 하나?’
젠장!
나는 금방 고민을 멈추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폭력배니 뭐니 하는 건 지금 이 시점에 중요하지 않다.
뭐가 됐든, 사람이 곧 죽을 예정이다.
그러니 살릴 수 있다면 살릴 것이다.
‘어떻게든 시도해 보자. 우리가 사건 현장에 먼저 도착해 있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현장이 어디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망할.
다 똑같이 생겼다.
심지어 원형으로 만들어진 간판의 색깔마저도 똑같다.
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을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하며 떠올려 보았다.
"왜 그래? 뭐 찾는데?"
근욱이가 묻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결론을 내리고 말했다.
"근욱아, 갑자기 대게가 먹고 싶어."
"대게?"
"응."
꿈속에서 본 살인 장면.
그 앞의 가게에서 분명 대게를 팔고 있었다.
물론 상호명까지 알고 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까지 기억할 겨를은 없었다.
"뜬금없이 대게?"
"빨리 찾아보자!"
"선한이 너 배고프구나."
근욱이가 내 뒤를 따라왔다.
수산시장의 가게들은 파는 어종들이 각각 달랐다.
나는 바로 근처의 가게로 달려가 물었다.
"아주머니. 혹시 대게는 어디로 가야 있을까요?"
"대게? 대게는 지금 철이 아니야. 맛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서 민어 잡솨 봐. 민어가 지금 먹기 딱 좋거든? 싸게 드릴게~"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잡아끈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죄송해요. 지금 대게를 찾아야 돼서요."
"아니, 8월은 민어가 맛있다니까!"
답답했다.
8월 민어가 맛있는 건 횟집 아들인 제가 잘 압니다!
나는 곧바로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달렸다.
"우리 선한이. 대게가 되게 먹고 싶었나 보네."
근욱이의 아저씨 개그에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야 돼.
안 그러면 사람이 죽는다!
* * *
김일춘.
그는 한때 백호파의 말단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십여 년 전 이야기.
백호파가 와해된 뒤, 그는 생계를 위해 택시를 몰고 있었다.
비록 직업은 바뀌었지만, 그의 성격만큼은 아직 죽지 않았다.
"딸꾹…… 뭘 봐, 이 새끼들아!"
그는 만취 상태로 시장 바닥을 걸으며 주변에 눈을 부라렸다.
그는 요즘 술에 미쳐 살았다.
며칠 전.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정지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젠장, 세상이 언제부터 이렇게 퍽퍽해졌지?
점심때 반주 한 잔 한 게 뭐가 대수라고!
"염병, 빌어먹을 세상…… 캭, 퉤."
그는 시장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핸드 카트를 끌고 걸어오던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어어? 너!"
대머리에 용 문신!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도로 한복판에서 기습적인 플라잉 니킥을 얻어맞은 굴욕은 잊을 수 없었다.
"너 이 자식, 거기 서! 인마!"
김일춘은 남자를 불러 세웠다.
마침 상대도 자신을 알아본 듯 씩 웃었다.
"뭐야. 그때 택시 몰던 호랑이 문신 아저씨? 오랜만에 보네."
"너 시장서 일하냐?"
"그렇다면 어쩔 건데요?"
"오늘 잘 만났다. 다시 한번 붙어, 이 새끼야!"
"붙기는 뭘 붙어. 그때 나한테 깨진 마빡은 좀 아무셨나 모르겠네?"
"뭐? 이 자식이!"
부웅!
김일춘은 분노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취해서 그런지, 영 몸놀림이 서툴렀다.
철퍼덕.
그는 간단한 회피에 스텝이 엉켜 넘어지고 말았다.
"뭐 하쇼? 몸개그?"
"아이씨……."
"아저씨. 나이 먹었으면 몸 사려야지. 젊은 사람한테 함부로 덤비면 큰일 나요."
짝, 짝.
대머리는 땅에 주저앉아 있는 김일춘의 뺨을 어르듯 두드렸다.
"어머, 저기 봐."
"싸움 났나?"
"싸움이 아니라 그냥 얻어맞는 것 같은데?"
웅성웅성.
시장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김일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사람의 눈을 뒤집어지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모멸감이다.
술기운에 붉어진 김일춘의 얼굴이 더욱 시뻘게졌다.
"오늘은 못 본 척 봐드릴게. 다음부터는 곡담 바닥에서 나 만나면 눈 깔고 지나가쇼. 또 시비 걸면 그땐 진짜 안 봐줄 테니까."
대머리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는 몰랐다.
분노한 김일춘이 근처 가게에서 회칼을 집어 들고 자신에게 다시 달려오고 있을 줄은.
"죽어, 이 새끼야!"
"어어?!"
남자는 몸을 돌려 그를 발견하자마자 피하려 했다.
하지만, 반응할 새도 없었다.
콰악, 콰악!
날카로운 칼날이 남자의 가슴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곧 선혈이 솟구쳤다.
"꺄악!"
"경찰 불러!"
주위의 상인들이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대머리 남자는 맥없이 쓰러졌다.
아무리 싸움에 자신이 있는 남자라도, 상대가 칼을 들고 있는 이상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에 찔린 부분이 하필이면 좌측 가슴이다.
심장과 대동맥이 위치한 그곳.
즉, 치명상이다.
"감히 날 무시해?"
"으으……."
김일춘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대머리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탔다.
만취한 상태에, 분노에 휩싸인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상대를 죽여야겠다는 일념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홰액!
김일춘은 칼을 높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누군가 그의 팔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헉, 헉."
한 젊은 남자가 어느새 가까이 와 있었다.
신선한.
그는 급하게 달려온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김일춘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만하시죠."
"이거 안 놔?"
"칼 내려놓으세요!"
"뭐야, 너도 죽고 싶…… 어어?"
김일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몸이 붕 하고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등 뒤에서 붙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다.
"흐얍!"
김근욱.
데드리프트 180kg의 사나이.
그는 김일춘의 몸뚱이를 들어 올려 시장 바닥에 힘차게 거꾸로 메다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