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19화 (119/241)
  • #119 심장이 뛴다(3)

    "어쩌다 보니 둘만 남았네요."

    "어떻게 할까?"

    "글쎄요. 어떻게 하고 싶어요?"

    괜히 신경 쓰인다.

    근욱이가 했던 말 때문인가.

    연서의 모습이 오늘따라 자꾸만 눈에 밟힌다.

    한쪽으로 넘긴 머리카락.

    물놀이 때문에 아직까지 젖어 있는 얇은 옷…… 젠장, 그만하자.

    나도 남자다 보니 순간적으로 오만 생각이 다 든다.

    나는 얼른 머릿속 번뇌를 지우고 말했다.

    "둘이서라도 불꽃놀이 구경하고 가자. 이대로 그냥 돌아가기엔 아쉽잖아."

    그러자 연서가 기다렸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역시 그냥 가기엔 아쉽죠?"

    "아쉽지."

    "야외에 돗자리 깔고 구경할까요?"

    "맥주도 사 올게."

    "역시 이 양반 뭘 좀 아시네!"

    평소처럼 죽이 척척 맞는다.

    나는 이것저것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향했다.

    맥주 몇 캔.

    안주로 삼을 것들.

    등등.

    그동안 연서는 바깥 점포에서 돗자리를 샀다.

    그런데 그새 낯선 남자들이 연서에게 달라붙은 모양이다.

    "저기, 그 돗자리 여성분이 혼자 쓰시기엔 좀 커 보이는데 같이 쓰실래요?"

    우와…….

    멘트 구린 거 보소.

    그런 작업이 먹히겠냐?

    마침 편의점에서 내가 돌아오자, 남자들은 툴툴대며 사라진다.

    "아 뭐야. 남친 있었네."

    "거 봐. 내가 있을 거라고 했잖아."

    "하긴 저 외모로 혼자 왔겠냐."

    나를 힐긋 째려보는 표정들이 재밌다.

    <네가 뭔데 저런 예쁜 여자와 같이 있냐?>

    그렇게 묻는 얼굴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연서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헌팅?"

    "응. 저보고 돗자리 같이 쓰자고 하네요."

    "뭐라고 대답했어?"

    "큰대자로 혼자 누울 거라 그랬죠."

    "평소에도 이런 일 많이 겪나 보네."

    "일 년에 백 번쯤?"

    나는 픽 웃었다.

    물론 연서 정도의 외모라면 농담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편의점 앞에서 산 물건을 내밀었다.

    "자, 이거 입어."

    "뭔데요?"

    "티셔츠. 너 옷 젖어서 밤 되면 감기 걸릴까 봐."

    "푸하하, 이게 뭐야!"

    연서는 티셔츠를 펼치더니 배를 잡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촌스러운 폰트로 큼지막하게 <아이러브곡담>이라고 써 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웃기게 생긴 생선들이 춤을 추고 있다.

    "그나마 이 디자인이 최선이었어."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연서는 내가 선물한 큼지막한 티셔츠를 입었다.

    휴우.

    나는 안도했다.

    아까부터 연서의 얇은 옷차림이 신경 쓰였는데, 옷을 입히니 좀 낫다.

    감기도 안 걸리게 하고, 내 번뇌도 좀 없앨 겸.

    그런데 얘는 정말 뭘 입혀 놔도 어울리는구나.

    아마 모델을 했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그럼 이제 가 봅시다! 불꽃놀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지 궁금하네!"

    연서가 나를 끌고 앞장섰다.

    우리는 명당을 찾아 움직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곧 우리는 운 좋게 괜찮은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제방 위쪽.

    백사장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한적한 자리였다.

    "와, 여기 좋네요!"

    "좀 높은데, 올라올 수 있겠어?"

    "오빠가 잡아 주면."

    영차!

    연서는 내 손을 잡고 제방 위로 올라왔다.

    곧 우리 둘은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곳곳에 내려다보였다.

    "이 정도면 VIP석인데요?"

    "잘 찾았네."

    "저만 따라오면 된다니까요, 히히. 근욱 오빠는 사람들한테 치이는 데서 힘들게 보고 있을 거예요."

    "맞아."

    "덩치도 커 가지고 주변 사람들한테 눈칫밥 엄청 먹고 있을걸요."

    연서는 키득거리더니 물었다.

    "근데 근욱 오빠는 진짜로 여친 생긴 거?"

    "응, 그런가 봐. 이름이 김아령이야."

    "아령?"

    "스포츠 강사. 천생연분이래."

    "푸하하!"

    연서가 빵 터진다.

    한동안 허리를 꺾고 웃었다.

    새삼 느끼지만, 연서와 함께 있으면 밝은 분위기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맥주를 한 캔씩 땄다.

    "오징어 다리 말려 있는 거 보니까 갑자기 엘튜브(L―tube, 비위관) 생각난다. 3월에 우재석 닮은 할아버지 기억나요?"

    "응. 우리 내과 돌 때 그 할아버지?"

    "엘튜브 잘 안 들어가서 엄청 고생했잖아요."

    "맞아, 그때 결국 냉동실에 얼린 엘튜브로 겨우 성공시켰잖아."

    "엘튜브 더 두꺼운 거 어디 있는지 나한테 물어볼 때, 오빠 완전 어리버리했던 거 기억나요?"

    그랬었지.

    몇 달 전의 일인데도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때만 해도 나는 지방에서 올라온 부적응자 1인이었다.

    남들보다 실습 경험도 적어서 늘 불안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연서 네가 여러 가지로 도와줘서 고마웠어."

    "동기 중에서 챙겨 주는 건 나밖에 없죠?"

    "그래. 너밖에 없다."

    연서가 맥주 캔을 내밀었다.

    나는 픽 웃고 손에 든 맥주 캔을 맞부딪혔다.

    연서와 단둘이서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맥주 한 캔이 천천히 비워질 때쯤 우리의 대화는 깊어졌다.

    "넌 언제 의사가 되고 싶었어?"

    "저는 엄마 영향이 컸어요."

    "엄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연서의 가족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네.

    "아빠랑 이혼하고 집안 사정이 빠듯해져서, 엄마가 병동보조원으로 일했거든요. 저 어릴 때부터 작년까지."

    "아아, 그랬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는 평소에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이혼 가정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연서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엄마가 혼자 저랑 동생 키우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죠."

    <보조원>.

    병원의 온갖 일들을 수행하는 분들이다.

    혈액을 운반하거나, 환자 시트를 새로 펴거나, 의료자재들 위치를 정리 정돈 하는 등등…….

    병원 업무가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 고용되는 분들을 통틀어 보조원이라 부른다.

    "엄마가 병원에서 일하다 보니까, 중학생 때 엄마 일터에 몇 번 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의사들 보면서 생각했어요. 부럽다…… 저 사람들은 얼마 벌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 것 같다.

    그때 연서의 인생 목표가 정해진 모양이다.

    어린 시절의 연서는 의사들을 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게 동경이든, 부러움이든, 오기이든…….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데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제가 의대 가고 싶다고 하니까, 엄마는 힘들게 번 돈을 저한테 다 올인했어요."

    아마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비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리고 그만큼, 연서도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문득 연서가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히히, 술 들어가니까 별 얘기를 다 하네. 제 얘기 재미없죠?"

    "아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 얘기를 시작했다.

    "연서 너랑은 달리, 나는 철이 좀 늦게 들었어."

    중학교 시절.

    나는 한동안 길을 잃고 방황했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가, 한 줄기 빛을 만났다.

    백의신.

    그 뒤로 내 인생의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졌다.

    "우와, 백의신 같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게 진짜였어요?"

    "응."

    "난 그동안 방송용 컨셉인 줄 알았는데…… 선한 오빠도 참 관심 종자구나 생각했었는데 그게 진심이었구나."

    참 나.

    뭐? 관심 종자?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연서는 배시시 웃더니 과자를 입에 물며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좀 비슷한 점도 있네. 선한 오빠도 한번 목표 정하면 죽어라 달리는 스타일이구나."

    "맞아."

    "그래서 지금 목표는 연국대에서 살아남기?"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국대에서 살아남는 것.

    그 외에는 당장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외과 계열은 비인기 전공에 속해서 경쟁률이 낮다지만…….

    그마저도, 일운대 출신인 나에게는 결코 안정권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앞만 보고 열심히 사는 거예요?"

    "내가?"

    "아직 인턴인데도 일중독처럼 하루 종일 일, 일, 일만 생각하잖아요."

    나는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내가 성격이 좀 그래. 한 생각에 빠지면 좀처럼 다른 데 눈을 못 돌려서."

    "그럼, 내년은요?"

    "응?"

    "내년에 만약 연국대에서 살아남고, 원하는 과에 가고 나면…… 그럼 남들처럼 주변도 돌아보면서 살래요?"

    "……."

    "연애도 좀 하고?"

    말문이 막혔다.

    가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내 심장이 어디쯤에서 뛰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때.

    연서는 잠시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어, 저기 좀 봐요!"

    퍼엉―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잔잔한 음악 소리에 맞추어 빛이 터진다.

    한 줄기 빛이 천천히 점멸하며 바다를 향해 떨어진다.

    "와……."

    "예쁘다."

    우리는 홀린 듯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닷가에서 보는 불꽃놀이는 분위기가 특별했다.

    연서는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가, 곧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긋한 표정으로 무릎에 턱을 괸다.

    "안 찍어?"

    "지금은 안 찍을래요."

    "왜?"

    "그냥, 가끔은 눈으로만 기억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해변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폰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멀리서는 별빛처럼 보였다.

    그래서, 우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별빛 위로 빠르게 피어났다 사라지는 꽃들 같았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풍경이었다.

    연서는 한동안 불꽃놀이에 푹 빠져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저번에 눈싸움해서 이긴 거, 소원 찬스 안 썼는데. 오늘 써도 돼요?"

    "뭔데?"

    "음……."

    연서가 잠시 고민한다.

    "아니다. 그냥 미루려구요. 내년쯤 다시 이야기하지 뭐."

    퍼엉―

    불꽃이 터진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사그라들기도 전에, 또 다른 불꽃 소리가 하늘을 덮는다.

    수백 조각으로 흩어진 불빛들이 해수면에 일렁거린다.

    "선한 오빠."

    "응."

    "선한 오빠는 목표한 만큼 다 이룰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

    "……내년에도 같은 병원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연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함께 조용히 떨어지는 불꽃들을 바라보았다.

    1년 뒤.

    나는 어디에서 어떤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지금과 비슷할 수도, 혹은 전혀 다를 수도.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도 각자의 길로 흩어지겠지.

    하지만 우리가 인턴생활 동안 함께 최선을 다해 보내는 날들은, 시간에 바래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8월의 끝자락.

    곡담에서의 하루하루도 끝나 가고 있었다.

    * * *

    "두 인턴 선생님, 오늘이 마지막인가요?"

    "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이고 아쉬워라~!"

    8월 마지막 주.

    근욱이와 나는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곡담의 응급실은 한 달 간격으로 인턴들이 왔다 간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유난히 아쉬워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근욱이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 같지만.

    "그동안 우리 힘센 근욱 쌤 있어서 듬직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호호호."

    간호사 두 분에게 둘러싸인 채, 근욱이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여기도 정들만 하니까 떠날 때가 되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짓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다.

    마지막 날이라도 환자는 계속 방문하니까.

    ‘좋아. 마지막까지 확실히 일하고 가자!’

    곡담 응급실.

    마지막 날까지 특이한 환자들이 많이 방문했다.

    저녁이 깊어 갈 때 즈음, 긴 머리에 분위기 있는 중년 여성분이 응급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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