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18화 (118/241)

#118 심장이 뛴다(2)

"갑자기 뭔 소리야?"

"더 이상 숨겨도 소용없어. 난 진작 눈치챘으니까."

그렇게 추궁하는 근욱이의 눈빛이 제법 날카롭다.

나는 잠시 긴장했다.

‘이 녀석, 혹시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가?’

근욱이는 함께 방을 쓰며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다.

그러니, 어쩌면 내 능력에 대해서 어렴풋이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근욱이의 입이 열렸다.

"너 연서랑 뭐 있지?"

"……."

나는 김이 빠졌다.

괜히 긴장했네.

근욱이는 지금 뇌가 온통 꽃밭에 가 있는 듯하다.

본인이 한참 열애 중이라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보일 만도 하다.

"얘가 연애 시작하더니 아무 말이나 막 던지네."

"진지하게 묻는 거야, 인마."

"헛소리 마."

나는 피식 웃어넘겼다.

물론 한때 그런 소문이 있었다.

3월에 내과 같이 돌 때.

연서랑 나 사이에 뭐 있는 거 아니냐고 말들이 많았었지.

"그건 그냥 소문이었잖아."

"그래. 소문이었지. 그런데 그 이후로 연서가 너 멀리한 적 있어? 안 그랬다는 건, 최소한 너한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는 소리잖아."

뭐지?

나름 논리정연하다.

근욱이가 정말 며칠 사이에 연애학 고수라도 된 건가?

"결정적으로 연서가 이번 달에 곡담까지 온 거 봐라. 스케줄 바꿔 가면서."

드르륵―

녀석은 의자를 조금 더 끌고 와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선한이 너는 어떤데? 연서한테 정말로 마음이 조금도 없어? 친구끼리 거짓말 하지 말고."

초롱초롱.

근육질 근욱이의 눈이 부담스럽게 빛난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나는……."

내가 막 말을 하려는데, 문 앞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요!"

탕탕!

문이 두들겨진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문을 열자, 연서가 우리 방 안을 빼꼼 들여다본다.

"뭐야. 둘 다 일어났네요?"

"응."

"둘이서 뭔 얘기를 재밌게 하고 있었길래 씻지도 않고 있었어요?"

"이제 준비할 거야."

"얼른 해요! 오늘 축제에서 넷이서 놀면 진짜 재밌겠……."

연서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근데 아까부터 어디 보고 얘기해요?"

연서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웃는다.

"이상하네. 평소에는 내 얼굴 보면서 얘기하더니 눈을 피하네?"

"무슨 소리야."

"어어? 자꾸 딴 데 본다."

"내가 언제……."

"눈 못 마주치는 병이 근욱 씨한테서 옮았나?"

연서가 재밌다는 듯 발돋움하며 내 시선을 따라온다.

젠장.

왜 어색하지?

조금 전에 근욱이에게 들었던 말 때문에 심란하다.

평소에는 연서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괜히 연서의 몸짓,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인다.

나는 어색한 기분을 지우며 말했다.

"금방 준비할게, 30분만 기다려."

"그래요. 이따 후문 쪽에서 봐요!"

연서는 몸을 돌려 가벼운 걸음으로 사라졌다.

참 신기하다.

여자들은 어떻게 몸짓 하나에서 샴푸 냄새가 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근욱이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뚯 뚜룻 뚜. 뚯 뚜룻 뚜……."

입으로 로맨틱한 BGM을 튼다.

그만해!

이 자식이 연애 시작하더니 뇌가 장밋빛으로 물들었나.

나는 녀석의 징그러운 얼굴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 * *

8월의 한가운데.

여름의 해가 머리 위에서 뜨겁게 빛난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도 만만치 않게 뜨거웠다.

<소리 질럿!>

"꺄아아―"

열정의 도시, 곡담.

축제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택시를 타고 시내에 도착하자, 벌써 공기부터 후끈했다.

바닷가로 향하자, 야외무대에 설치된 마이크로 연예인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려 펴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놀고 싶은 사람들 손 머리 위로!>

"와아아!"

인산인해라는 게 이런 걸까?

수영복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물론 우리는 적당한 평상복을 입었지만, 오히려 이런 복장이 더 눈에 띌 정도였다.

"야, 이렇게 사람이 많았어?"

"그러게. 올해 불꽃놀이 좀 크게 한다고 하더니만."

"와, 사람 너무 많아…… 안 되겠다. 카메라 망가질 거 같아요."

연서는 브이로그를 찍다 말고 카메라를 도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근데 소담이 얘는 어디 갔어?"

"글쎄요.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얘 키 작아서 보이지도 않아."

"미아 신고 할까?"

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머리에서 발끝까지 물에 젖어 걸어오는 소담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야, 소담이 넌 왜 그렇게 쫄딱 젖었어?"

"오다가 물총 맞았어……."

"도대체 무슨 물총에 맞으면 그렇게 돼? 그 정도면 물대포에 맞은 거 아니냐?"

소담이가 울상을 짓는다.

물에 젖은 햄스터처럼 처량하다.

근욱이는 낄낄 웃더니 근처 판매 부스로 달려가며 말한다.

"야, 맞고만 살 수는 없지 않냐? 우리도 참전하자!"

그러더니 물총을 네 개 사 온다.

내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건 앙증맞게 생겼었는데…….

요새 나오는 물총은 무슨 샷건처럼 생겼다.

"너희들끼리 해. 나는 관심 없……."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촤악!

내 얼굴에 물벼락이 끼얹어진다.

요새 물총은 화력이 참 세구나.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연서가 물총을 나에게 겨누면서 씩 웃고 있었다.

"후후……."

"도전이냐?"

"덤벼라 신선한!"

"근욱아, 나 총 좀 줘."

잠시 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물에 젖은 생쥐가 되었다.

애들 놀이 아니냐고?

천만에. 어른 되고 하니까 더 재밌다.

우리는 허리가 꺾어지도록 웃으면서 인파 사이를 빠져나왔다.

"아, 재밌었다."

"다음엔 뭐 할래요?"

"저기 천막에 뭐 파는 것 같은데?"

"가 보자!"

연서와 근욱이가 신나게 앞장섰고, 나는 소담이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축제에는 볼거리들이 은근히 많았다.

우리는 한참을 놀다가, 신발을 벗고 느긋하게 오후의 백사장을 즐겼다.

짠 내 섞인 바닷바람.

푸르게 펼쳐진 수평선.

기분이 선선해진다.

병원에서 만나게 된 가장 친한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배고프다. 지금 몇 시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좀 이따 공연 시작한다는데 기다렸다가 볼 거예요? 연예인 온다는데."

절레절레.

우리는 한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 북적거리는 곳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연예인 구경이나 하느니, 우리끼리 노는 게 더 재밌다.

"저녁이나 먹자."

"뭐 먹을래?"

"근처 푸드 트럭에서 사 먹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다들 저녁 먹고 불꽃놀이도 볼 거죠?"

그때 근욱이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밥만 먹고 불꽃놀이는 패스."

"엥? 왜요."

"불꽃놀이는 여자 친구랑 볼 거다. 히히."

"와, 배신자!"

연서가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때 소담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패스…… 내일 휴일이라서 오늘 저녁에는 지방에 계신 집안 어르신들 만나 뵈러 출발해야 돼."

"집안 어르신들?"

역시 로얄.

단어 선택부터 남다르다.

소담이는 할아버지 때부터 의사 집안이다.

일가족이 모이면, 거의 종합병원을 차릴 수 있을 정도의 가문이라고 들었다.

"에이 뭐야. 불꽃놀이가 하이라이트인데."

"미안, 미안."

소담이가 우리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그 대신 우리 아빠가…… 너희들이랑 같이 있다고 하니까 음식점을 예약해 줬는데. 다들 괜찮지?"

아빠?

함경일 부원장님.

문득 햄스터와 비슷하게 생긴 동글동글했던 인상이 떠올랐다.

"와, 부원장님이 식당을 예약해 줬다구요?"

"응. 너희들이랑 같이 저녁 먹고 오래. 예약은 취소해도 되니까 아까 말한 푸드트럭 가도 상관없……."

"부원장님이 예약해 두셨는데, 어딜 푸드트럭이 끼려고? 어딘지 모르겠지만 가 보자!"

우리는 생각 없이 무조건 소담이의 제안을 따라 움직였다.

* * *

소담이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초고급 식당이었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작은 계곡을 미니어처로 만든 인테리어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직원들이 마중을 나와 칼로 잰 듯한 인사를 했다.

한마디로…….

이렇게 홀딱 젖은 차림으로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런 곳이었어?"

"와…… 저 이런 데 처음 와 봐요."

"나도 예전에 부모님이랑 딱 한 번 와 봤어. 들어가자."

곧 직원들이 깍듯이 정중한 태도로 우리를 룸으로 안내했다.

소담이는 곧 직원에게 몇 가지 주문을 한다.

잠시 후 음식이 차례대로 나오자, 우리는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큰 접시에 쥐똥만 하게 나오는 음식들은, 비싸고 양 적은 것들만 모아 놓은 거라고.

"야, 여기 요리 심상치 않은데……."

"왠지 도자기도 비싸 보인다."

그때 연서가 메뉴판을 꺼내어 힐끗 가격표를 보더니 기겁하며 속삭인다.

"헉, 소담 언니, 이렇게 비싼 데 오면 어떡해요……!"

"괜찮아. 아빠 카드야."

"헐."

"1인당 30만 원 밑으로 먹으면 집에 들어올 생각 하지 말래."

"……."

"많이들 먹어. 여기 원래 예약하려면 3개월 걸린대."

덜덜.

이게 금수저의 위엄인가?

근욱이가 황송한 듯 접시를 비우며 말했다.

"야, 맛있기는 한데…… 내가 지금 뭘 먹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참돔."

"이거는요?"

"민어."

"야. 선한이는 대충 보고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나 횟집 아들이잖아."

"오오."

내 말에 모두들 감탄했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도 처음 먹어 보는 맛이다.

내가 알던 참돔은 이런 맛이 아니었는데.

드르륵―

곧 룸의 문이 열리고 주방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런데, TV에서 많이 본 얼굴이다.

‘헉, 왕비룡이잖아?’

요리 프로그램에서 몇 번 보았던 유명인이다.

저 사람이 왜 여기서 나와?

곧 그가 비싸 보이는 술과 함께 오늘의 요리라며 초밥 몇 개가 놓여 있는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식사는 마음에 드세요? 함경일 선생님이 말씀하셔서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소담이는 주방장에게 감사를 표하며 팁을 건넸다.

익숙한 듯한 몸짓.

마치 재벌 2세 같다.

잠시 후 주방장이 룸에서 나가자, 근욱이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나 소담이한테 거리감 느껴지기 시작했어…… 우리랑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먼 세상 사람이었던 거야……."

"뭐래."

퍼억.

소담이는 근욱이의 무릎을 발로 걷어찼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에서 역대급 호화로운 식사를 했다.

* * *

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축제 한복판에서는 약간 떨어진 곳이라, 멀리서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고 있다.

"불꽃놀이 몇 시에 시작하더라?"

"한 시간 정도 남았을걸요."

"이제 슬슬 자리 잡아야겠네."

뚜르르―

그때 근욱이의 전화벨이 울린다.

근욱이는 냉큼 전화를 받더니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웅 자기야 어디쬬? 나 지금 밥 먹구 나와쬬."

"우욱."

우리 셋은 인상을 팍 썼다.

방금 먹은 고급 요리가 통째로 넘어오는 듯한 기분이다.

근욱이는 히죽히죽 웃으며 통화를 끊더니 말했다.

"야, 나는 여친 만나러 간다! 너희들끼리 불꽃놀이 관람 잘해라."

근욱이는 나를 향해 눈을 찡긋이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진다.

곧 소담이도 택시를 잡고 우리에게 말했다.

"나도 얼른 가 볼게. 둘이 재밌게 놀다 와!"

그리고 택시에 올라타며 기사에게 간청하듯 말한다.

"아저씨 제발 천천히 가 주세요…… 제발요."

"아, 천천히 갈 거면 뭣 하러 택시 탑니까? 꽉 잡으쇼."

"히익!"

부우웅―

택시가 초고속으로 출발하며 멀어진다.

곧 음식점 앞에서 나는 연서와 둘만 남게 되었다.

"이제 어떡할까요, 우리?"

연서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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