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서퍼들(7)
"본명 박초록. 맞지?"
그녀의 눈이 커진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다.
말투도 갑자기 존댓말로 바뀐다.
"아니…… 제 본명을 어떻게 아셨냐구요?"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여. 다른 것도 맞혀 볼까?"
"예? 어떤 거요?"
"손 좀 내놔 봐."
스윽.
나는 놀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금을 유심하게 들여다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는 척을 했다.
"어디 보자…… 운명선을 보아하니 어릴 때에는 몸을 쓰는 일을 주로 했겠네. 달리기 같은 거."
"!"
"그런데 20대가 되면서 팔자가 바뀌었어. 그래서 지금은 무언가를 파는 일을 하고 있을 거야. 가령……."
나는 말끝을 흐리다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터넷 쇼핑몰 같은 거."
"헉!"
그녀가 헛숨을 삼킨다.
어떻게 알았지?
아까 술자리에서는 그냥 회사 다닌다고 말한 것밖에 없는데?
이 사람 도대체 뭐야?
그렇게 외치는 듯, 수십 개의 물음표가 표정 위로 드러난다.
‘좋아. 먹혀들어 간다.’
하지만 아직 방심하기엔 이르다.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몰아쳐야 한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연이어 말했다.
"이번엔 귀 좀 볼까?"
"귀, 귀는 왜요?"
"어서."
그러자 그녀는 주저하면서도 단발머리를 조심스럽게 양쪽 귀 옆으로 넘겼다.
나는 양쪽 귀를 번갈아 살펴보다 말했다.
"부모님이 크게 아프신 적 있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런, 아버지께서 폐 쪽에 문제가 크게 한 번 있었겠어."
"헉, 맞아요. 폐암으로 수술받았어요."
그녀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있다.
나는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허리 쪽에 문제가 있었겠고."
"맞아요 선생님……."
"디스크?"
"예……."
나는 꿈속에서 본 차트의 내용을 줄줄 읊었다.
이제 나는 완전히 무속인이거나, 혹은 신내림을 받은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슬슬 결정타를 날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본인, 4년 전쯤에 발목 부러진 적 있지?"
그러자 그녀가 다시 한번 화들짝 놀라며 말한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 옛날에 아라비안 베이에 갔다 놀이기구에서 떨어져서 발목 수술 받았었는데……."
바로 이거다!
결정타를 날리자.
나는 갑자기 엄한 표정으로 버럭 외쳤다.
"그 난리를 겪고도 물 옆에서 놀려고 했어? 조상님이 지켜 준 줄도 모르고!"
"네?"
"당신은 평생 물을 조심해야 돼! 팔자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헉…… 몰랐어요."
그녀는 겁에 질린다.
너무 겁먹으니 좀 미안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완벽하게 속여 넘겨야 사고를 방지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어조를 조금 누그러트리고 타이르듯 말했다.
"초록 씨는 원래 나무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원래는 물과 상생관계여야 돼.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주에 살이 하나 끼어 있어서, 물에 너무 젖으면 오히려 뿌리가 썩어."
크으.
거짓말이 술술 나오네.
그동안 풍 선생과 함께 응급실에서 지낸 탓일까?
나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다.
내가 이렇게 사기를 잘 치다니.
부업으로 옥장판이나 팔고 다닐까?
어쨌거나 내 헛소리에 홀딱 속아 넘어간 듯,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샤…… 샤워도 하면 안 돼요? 저 그럼 평생 꼬질꼬질하게 씻지도 못하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씻거나, 가벼운 물놀이 같은 건 괜찮아. 하지만 바닷가에서 힘든 스포츠, 특히 서핑 같은 건 평생 거들떠도 보지 말아야 해."
나는 특히 강조했다.
<서핑>을 하지 말라고.
과연 이 전략이 먹혔을까?
"네 보살님! 감사합니다!"
먹히네.
초록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마치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귀인을 만난 것 같은 표정이다.
"저, 보살님. 말씀해 주시는 김에 제 연애나 결혼 운도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사업운도……."
"쉬잇."
나는 검지를 들어올렸다.
"바다에서 운동하는 것만 조심하면 모든 게 만사형통으로 풀릴 거야. 더 이상 알려고 하면 천기누설이야."
물론 추가적인 입막음도 잊지 않았다.
"내가 이런 걸 알려 줬다는 걸 어디 가서도 말하면 안 돼. 자칫하면 더 큰 화를 입을 수 있어."
"네……."
"오늘 일은 비밀로. 무슨 말인지 알지?"
초록 머리 그녀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보살님!"
"다시 한번, 내가 뭐라고 했지? 서핑은?"
"안 합니다!"
"서핑은?"
"죽어도 안 합니다!"
좋아.
이 정도면 됐겠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다.
"아, 뭐 해! 더 안 마셔?"
"으어어어."
김아령 씨가 근욱이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근욱이는 의식을 잃은 채 좀비처럼 술을 마시고 있다.
둘 다 인사불성이다.
잠깐 자리를 비켜 준 사이에 몇 병이나 더 마신 거야?
그리고 다음 날.
"아, 죽겠다."
퀭―
근욱이의 얼굴이 핼쑥하다.
이렇게 건강을 잃은 듯한 근욱이는 처음 본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중간에 필름이 끊겼다고 한다.
"왜 그렇게 미친 듯이 마신 거야? 적당히 하지."
"아령이 페이스에 맞추다 보니……."
근욱이는 스테이션 의자에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다.
그 와중에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 있다.
분위기를 보니, 김아령과 다음 약속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좋냐?
좋기도 하겠다.
"혹시 두 사람, 오늘 서핑은 안 한대?"
나는 슬쩍 물었다.
과연 미래가 바뀌었을까?
그러자 근욱이가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다가 말했다.
"어, 그게…… 갑자기 스케줄이 바뀌었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메시지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친구가 갑자기 서핑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어졌다고 하던데? 그냥 동네에서 같이 놀다가 서울 올라가기로 했대."
다행이다.
이제 적어도 서핑 척수병으로 다리가 마비되는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 그리고 선한이 너한테 이 말도 전해 달라고 했대."
"무슨 말?"
"간밤에 귀한 가르침을 줘서 고맙다고…… 야 너 대체 뭘 한 거야?"
"비밀."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근욱이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여간 너는 알다가도 모를 놈이야. 어떻게 하면 여자한테 고맙다는 이야기가 나와? 나도 좀 가르쳐 줘라 인마!"
"안 돼. 영업 비밀이거든."
"참 나."
근욱이는 내 말에 입술을 삐죽이더니 다시 스마트폰에 집중하며 헤벌쭉 웃었다.
"뭐, 나는 아령이랑 잘해 보련다. 술이 좀 과하긴 하지만 참 보면 볼수록 내 스타일…… 딸꾹."
그때 마침 스테이션을 지나가던 풍 선생이 허공에 코를 킁킁거렸다.
"야, 응급실에서 왜 소주 냄새가 나냐? 어디 알콜이라도 흘렸어? 아니면 대낮부터 만취한 환자라도 온 거야?"
"헙."
근욱이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 뒤로 응급실은 평화로웠다.
꿈에서 본 것처럼 박초록 환자가 하지마비로 실려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치료법을 찾아보며 대기하고 있었던 나는 저녁이 되어서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좋아, 한 건 해결!’
뿌듯했다.
물론 누구도 알아주지는 않지만, 한 사람의 미래에 닥쳐올 커다란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운명? 팔자?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 해도, 나는 그 운명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의사들은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닐까?
아픈 사람 고치고.
죽을 사람 살리고.
거기다가 나는 미래를 보는 능력까지 생겼으니, 앞으로 다른 의사들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이렇게 내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구나.’
@편안한데?(?)
나는 능력의 활용법 하나를 머릿속에 추가했다.
<애초에 사고가 안 나도록 틀어막기>!
물론 모든 사고가 이렇게 속 편하게 예방 가능한 건 아니라는 것을, 머지않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축제기간이 다가왔다.
#심장이 뛴다(1)
"흐아암."
나는 2층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른하군.
커튼을 친 창 바깥으로 야트막한 오후 햇살이 들어온다.
곡담은 서울과는 달리 숙소가 1층이라 이런 건 좋다.
햇살이 조금이라도 비치니 사람 사는 것 같다.
"몇 시야?"
"4시다."
아래쪽에서 근욱이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공지능 스피커가 필요 없구만.
근욱이가 친절하게 시간도 알려 주더니 오늘의 스케줄까지 알려 준다.
"선한이 너, 오늘 저녁에 넷이서 같이 밥 먹기로 한 거 기억나지?"
"어어."
그게 오늘이었구나.
인턴 4명의 휴일이 유일하게 겹치는 날이다.
한 달에 두 번, 인턴들에게 연속 오프가 주어진다.
월말에 있는 오프는 인턴 교대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오늘같이 이번 달의 가운데에 있는 오프에는 파견 온 인턴들끼리 곡담시에서 노는 경우가 많다.
때마침, 곡담해수욕장 축제가 시작되는 날!
한마디로 황금 같은 오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휴일이라고 해서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럼 오늘도 시작해 볼까!"
타악―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귤을 들었다.
이제 봉합을 연습하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루틴이 되었다.
처음에는 3―0 나일론으로.
그다음에는 5―0 나일론.
그리고 이번에는 7―0 나일론 도전이다.
점점 실이 얇아질수록 난도가 높아진다.
‘이제 좀 알 것 같아.’
연약한 귤껍질과 작은 바늘을 다루다 보니, 손이 섬세해진다.
그리고 감각적으로 알게 된다.
수처와 타이에서 어떻게 기구들을 다루고, 손가락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
"또 귤 꿰매냐?"
"응."
"와, 독하다 독해. 내가 옆에서 보는데도 토할 것 같다."
"사실 나도 그래."
근욱이의 말에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오프 날은 귤만 까고 다시 꿰매고를 반복하고 있으니 신물이 난다.
손톱 아래는 항상 하얗게 귤껍질의 하얀 속껍질이 끼어 있다.
이번 달이 끝나면, 당분간 귤은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다.
한편.
따르르―
갑자기 울려온 벨 소리에, 근욱이는 전화를 붙잡고 한참 열애 중인 티를 냈다.
"오옹 이쁜 자기야 모 해쬬? 난 지금 일어나쬬."
우욱…….
듣고 있기 괴롭다.
호칭이 ‘자기’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니, 결국 김아령과 둘이 사귀기로 한 모양이다.
근욱이는 한동안 통화를 하더니 히죽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좋냐?"
"어."
"신났네 아주."
"흐흐, 아령이도 나한테 푹 빠진 듯."
"며칠 사이에 어떻게 했길래?"
"내가 아주 푹 빠지도록 만들어 버렸지. 자고로 여자의 마음이란 말이야……."
그러더니 연애 강습을 시작한다.
근욱이는 며칠 새에 연애 고수가 됐나 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이랑 눈도 못 마주치더니, 이제는 나에게 훈수를 두기 시작한다.
나는 픽 웃고 말했다.
"연애하는 건 좋은데, 너무 푹 빠지지 마라. 어차피 사는 곳도 달라서 월말에 헤어져야 할 사이잖아."
그러자 근욱이가 울상을 지으며 말한다.
"야,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 버렸잖아!"
"틀린 말은 아니잖아."
"하여간 너는 너무 냉정해 인마. 가만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다니까."
근욱이는 툴툴거리더니 옆에서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는다.
"말 나온 김에 인마, 하나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뭘?"
"그동안 내가 옆에서 계속 의심하고 있었던 게 있는데 말이야."
근욱이가 나를 날카롭게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