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16화 (116/241)

#116 서퍼들(6)

건물 간판을 살펴보니, <국립재활센터>라고 적혀 있다.

‘재활센터라니…… 혹시 미래의 박초록 환자가 재활 치료를 받는 곳인가?’

소복, 소복―

싸락눈이 내린다.

나는 흰 눈이 얇게 쌓여 있는 입구를 지나서, 회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니 정면의 창구가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쪽에서 마침 휠체어를 밀고 오는 사람이 보인다.

‘저 얼굴은?’

박초록!

틀림없다.

머리 색깔은 까맣게 변했지만 얼굴은 여전했다.

그런데 단발머리가 장발로 변한 걸 보니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휠체어에 앉은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동안 한 달에 1cm씩 머리가 자랐다고 생각해 보면…….’

적어도 3년.

나는 그렇게 짐작했다.

그때 내 생각을 확인시켜 주듯, 휠체어를 밀고 있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분이 입을 연다.

"3년 동안 한결같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초록이도 이제는 동네에 재활센터로 옮길 때가 된 거 같아요."

3년!

그 긴 시간 동안이나 재활 치료를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휠체어에 앉아 있는 상태다.

곧 재활센터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대답했다.

"네, 그쪽 병원 가셔도 저희가 얘기해 놓았으니 잘해 주실 거예요."

그러더니 남자 직원은 이번에는 허리를 숙여 박초록 환자를 향해 말을 건넨다.

"초록 씨, 언제 끝날지 모르는 힘든 싸움이지만…… 지금처럼 웃으면서 하루하루 싸워 나가는 거예요, 알겠죠?"

"그럼요, 이제 보조기구로 몇 걸음 걸을 수도 있잖아요."

초록이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곧 직원이 꾸벅 인사하고 사라진 뒤, 두 사람은 창구 앞에서 번호표를 뽑는다.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나지막이 대화를 나눈다.

"여기도 참 오래 있었네."

"그러게."

"엄마가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아니야."

"3년 동안 고생했으니까 이제 내가 하고 싶었던 일도 해야지."

초록은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 내가 얘기했던가? 3년 전 그때, 나한테 이상한 말 한 사람 있었다?"

"어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의사였는데, 뜬금없이 건강 이상 없냐면서 이거저거 물어보길래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어라?

저건 내 얘기다.

해변에서의 우연한 만남.

바로 옆에서 내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초록의 꿈꾸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때 그 사람은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혹시 내가 관상만 봐도 딱 아플 운명이었던 걸까?"

"얘는. 관상 같은 게 어딨어."

"아냐, 그런 게 진짜 있대."

초록은 문득 그늘진 표정으로 체념하듯 말했다.

"그냥, 이렇게 갑자기 아프게 된 것도 내 팔자고 내 운명이었거니 하고 생각하려고. 안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

그녀의 말에 엄마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운명?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진짜로 어떤 사람들의 인생에는 시나리오가 새겨져 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언제 어떻게 아플 예정입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사망합니다.>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창구 안쪽에 있던 직원이 말했다.

"박초록 환자님 보호자분. 퇴원 수속은 다 됐는데, 더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아, 보험 처리 때문에 의무기록 사본 필요한데…… 이쪽 창구에서 뽑아 주시는 거 맞나요?"

"네. 동의서 작성해 주시고, 환자 본인 신분증 주세요."

잠깐.

의무기록 사본?

눈이 번쩍 뜨였다.

박초록 환자의 건강 정보가 적혀 있는 종이!

지금 나에게는 거의 정답지나 다름없다.

어려운 문제집의 뜯긴 뒷면 반쪽을 드디어 찾은 기분이다.

‘이건 결정적인 힌트야. 꿈이 끝나기 전에 읽어야 돼!’

타닥―

나는 급한 마음에 창구 안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프린트되고 있는 종이에 적혀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지이잉―

곧 창구 데스크에 비치되어 있는 중형 복합기에서 문서가 출력된다.

‘젠장, 프린터가 뭐 이리 느려?’

한 대 치고 싶네!

마음이 급해진다.

종이가 출력되는 속도가, 지금 내 눈에는 굼벵이처럼 한없이 느리게 느껴진다.

곧 <입원기록지>가 프린터에서 뽑혀 나온다.

먼저 나오는 부분은 가족력과 과거력이다.

[가족력]

―아버지 s/p lung cancer op (2010)

―어머니 HIVD

나는 계속해서 프린트되고 있는 입원기록 차트를 읽었다.

[과거력]

―h/o 7YA ORIF, ankle, Rt.

d/t Ankle Fx., Rt.

아버지가 2010년에 폐암 수술을 받으셨고, 어머니가 허리 디스크가 있으시다…….

그리고 환자 본인이 7년 전에 발목이 부러져서 나사(screw) 박는 수술을 받았다라…….

‘젠장. 하지마비랑은 전혀 상관없는 정보들이잖아!’ 아직이다.

제일 중요한 앞 페이지가 나오지 않았다.

프린터는 역순으로 몇 장의 용지를 내뱉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눈앞의 화면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안 돼!

아직 끝나지 마!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차트를 읽었다.

‘제발 10초만 더……!’

그리고 마지막에, 프린터에서 뽑혀 나오는 종이 위의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진단명] Paraplegia d/t Surfer's myelopathy>

찾았다!

결정적인 단서.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지?

‘생소하지만 분명 예전에 들어 본 적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눈앞이 다시 밝아져 왔다.

* * *

파앗―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여름 밤바다의 선선한 공기가 느껴진다.

마치 영화관에서 몰입하고 있다가 갑자기 튕겨져 나온 것 같다.

몇 년이나 뒤의 미래를 바라보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뭐야, 왜 갑자기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 묻기라도 했어?"

초록 머리 단발.

아직 27세인 박초록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리해 보자.

지금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박초록 환자는 3년간의 재활에도 불구하고 보조기로 걸을 수 있을 정도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의 병명은…….

‘그래, 기억난다!’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본과 3학년 신경과 수업.

수업이 거의 끝나갈 때, 지나가는 말로 교수님이 이야기한 적 있었다.

<야 너네 이런 것도 있는 거 아냐? 서핑 증후군이라고, 시험에 나오는 건 아닌데.>

시험에 안 나온다는 말에 몇몇의 눈빛은 이미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나는 무슨 얘기인가 궁금해서 계속 집중했다.

<서퍼쓰 마이엘로패씨(surfer’s myelopathy), 한글로는 서핑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교수님의 설명은 이어졌다.

<서핑 처음 하는 애들이 하이퍼 익스텐션(hyper―extension)된 자세로 계속 있다 보니까, 서핑 자세가 일종의 이스케믹 인설트(ischemic insult, 허혈성 손상)로 작용하는 거지.>

서핑보드에 엎드린 채 허리를 쭉 편 자세로 있다 보니, 척수에 혈류를 공급하던 혈관이 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건강하게 지내던 20대 젊은 애들이 갑자기 하지마비를 주소로 응급실에 오게 되는 거야.>

그렇게 혈류공급을 받지 못한 척수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되고, 하지마비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중 50% 이상은 영원히 신경학적 후유증을 가지고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하고 교수님은 강의실을 나가셨다.

<이번 여름방학 때, 안 하던 운동 해 보겠다고 서핑하러 가는 애들은 조심하라고 하는 소리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서핑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던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음 수업을 준비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질환에 걸리는 사람은 얼마나 황당할까?

그냥 생애 처음으로 서핑 연습만 했을 뿐인데, 몇 시간 안에 갑작스럽게 평생 장애가 생긴다니…….

바로 그런 일이, 운 나쁘게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일어난다.

"뭐야. 계속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거야? 아까부터 건강검진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소리만 하더니…… 나 그냥 간다?"

초록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잠깐, 생각 좀 하자!

서핑척수병의 TOC(Treatment of choice, 최선의 치료 방법)가 뭐라고 했었지?

나는 신경과 수업을 조금 더 떠올려 보았다.

<교수님, 그럼 Surfer’s myelopathy의 치료는 어떻게 되나요?>

내 뒤에 있던 동기가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는 교수님께 질문했었다.

<이미 ischemic damage(허혈성 손상)가 와 버리면 이런저런 치료를 해도 늦는 경우가 많아.>

그러고는 이어서 대답하셨다.

<최선의 치료는 Prevention(예방)이야. 다리 저리고 허리 아프면 바로 그만둬야 해, 서핑을.>

나는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래, 병원에 데려갈 필요도 없겠어!’

서핑증후군을 막는 방법?

간단하다.

서핑을 안 하면 되잖아!

이번 여름뿐만이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평생!

서핑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박초록 환자는 하지마비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

"잠깐만."

덥석!

나는 초록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놀란 눈을 한 그녀에게 말했다.

"너 서핑하지 마."

"응?"

"내일 서핑하지 말라고."

"뭐야. 웃겨.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마라야?"

그녀는 황당한 듯 코웃음을 쳤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이다.

게다가 그녀는 몇 년을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휴가를 내서 서핑을 배우러 온 거다.

내가 말린다고 곱게 들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우, 사실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했다.

취한 김에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너 그런 거 좋아하더라? 관상, 운명, 팔자 같은 거.

네가 딱 혹할 만한 이야기가 있지.

나는 거짓말을 시작했다.

"혹시 신내림이라고 들어 봤어?"

"응?"

"내가 사실 사람 운명을 잘 보는데."

"으으응?"

"들어는 봤나 모르겠네. 지리산 애기보살 류명인. 청와대 역술인 오중원 선생님……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역술인들이 다 나랑 친한 사이거든?"

내가 그동안 풍 선생에게서 배운 것은 수처뿐만이 아니다.

허풍으로 거짓말을 하는 요령도 배웠다.

기왕 속일 거면 확실하게!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조폭 앞에서도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는 풍 선생을 떠올리며, 나는 번지르르한 거짓말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혼돈에 빠진다.

"……뭐, 뭐야? 갑자기 웬 역술인?"

"사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거든."

"뭐야 웃겨. 거짓말하시네."

"증명해 볼까?"

"참 나. 그래, 해 보든가."

그녀는 이제 방어적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내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가 생긴 모양이다.

이 인간의 또라이 짓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 이런 표정이다.

‘좋아. 연기 시작이다.’

스윽.

나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래 봬도 한때 중환자실에서 월남전 파병 병사까지 훌륭하게 연기했던 나다.

그때 어택중 할아버지도 나의 연기력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었지.

이번에는 무속인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다.

나는 짐짓 목소리를 깐 채로 말했다.

"박초아…… 아니, 박초록 씨."

화들짝!

그녀가 술이 깬 표정으로 놀란다.

거의 앉은 자리에서 1미터 뛰어오른다.

개구리인 줄 알았네.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다소곳하게 붙이고 나에게 묻는다.

"아니, 제…… 제 본명은 어떻게 알았어…… 아니, 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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