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서퍼들(5)
술자리 2시간 경과.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근욱이와 나는 슬슬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뭐 해? 잔 들어야지! 짠!"
"짠~!"
술잔이 부딪힌다.
벌써 몇 번째 짠인지 모르겠다.
물론 분위기 자체는 좋다. 재미있기도 하고.
마침 여자들과 서로 나이도 동갑이라 금방 말도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술 마시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어? 잔이 비었네? 그럼 채워야지!"
"설마 꺾어 마시는 거 아니지?"
콸콸콸!
근욱이와 나의 소주잔이 가득 찬다.
김아령, 박초록.
이들의 주량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둘의 텐션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본 미래에 대해서 뭔가 정보를 얻을 틈이 없었다.
‘내가 지금 술 마시러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아닌데…….’
테이블 위에는 벌써 소주병이 10병째.
대학 신입생 시절 이후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본 적이 없다.
반면 두 사람은 이제부터 시작인 듯하다.
"어때, 이제 슬슬 술기운 좀 오르지 않아?"
"저기요, 여기 두 병 더요!"
참 해맑다.
술 시키는 표정이 저렇게 행복할 수가 있나?
곡담 사람들의 혈액 일부는 알코올로 되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야야, 타임. 타임. 좀 쉬었다 마시자."
근욱이가 백기를 들어 올린다.
시뻘게진 얼굴빛이 환자 그 자체다.
왠지 내일 아침, 본인이 응급실 베드에 누워 수액을 맞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야, 장난해? 술자리에서 쉬는 게 어딨어? 걍 오늘만 사는 것처럼 먹고 뒤지는 거야!"
김아령이 상큼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린다.
"야. 너네는 내일 쉬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아침부터 응급실에서 일해야 된다고."
"참 나, 웃기시네. 우리도 내일 아침부터 서핑하러 갈 거거든?"
서핑?
눈이 번쩍 뜨인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타이밍에 파라플레지아(paraplegia, 하지마비) 사건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어 보자!’
술기운이 올라왔지만 정신을 다잡았다.
나는 물 잔으로 표정을 가리면서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둘이 원래 서핑을 좋아하나 봐?"
"아, 나는 3년 정도 탔고 친구가 처음이야! 그래서 내일부터 가르쳐 주려고."
아령의 말에 초록이 신난 표정으로 덧붙인다.
"혹시 너희들은 서핑해 봤어?"
"아니."
"살면서 한 번쯤은 배워 보고 싶지 않아? 파도 위에서 서핑 멋지게 한번 해 보는 게 내 인생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거든!"
"재미있겠네."
"그치? 내가 서핑 한 번 배우겠다고 몇 년 동안 벼르다가 드디어 내일 아침에 처음으로 타 본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꿈에서 본 미래.
박초록이 서핑을 배우던 도중, 원인 불명의 이유로 하지마비가 되는 상황!
그게 바로 내일 오전에 벌어진다는 소리다.
‘남은 시간이 반나절밖에 없다니…….’
낭패다.
너무 촉박하다.
적어도 며칠 정도는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만들려면 오늘 밤밖에 시간이 없다는 뜻이야.’
그런데 어떻게?
멀쩡한 사람을 병원으로 끌고 갈 수도 없고.
발을 걸어 넘어뜨릴까?
차라리 가벼운 부상이라도 입혀서 응급실로 유인할 수 있다면…….
‘무슨 사이코 같은 생각이야? 정신 차려 신선한!’
짝짝.
나는 뺨을 두드렸다.
술 마시니 제정신이 아니군.
일단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초아야, 너 혹시 요새 몸 어디 아픈 데는 없었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엄청 건강한데!"
그러자 아령이 불쑥 끼어들었다.
"신선한, 헛소리했으니까 마셔. 원샷!"
콸콸콸.
나는 술을 들이켜고 또 질문을 던졌다.
"평소에 회사에서 일만 하면 몸이 여러 가지로 안 좋아질 수도 있잖아. 허리 디스크라든가."
"에이, 나 일할 때 책상에 10시간씩 앉아 있어도 아직은 말짱해. 우리가 디스크 얘기하기에는 어리지 않냐?"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아령이 대뜸 끼어든다.
"뭐야 너? 내 친구한테 관심이 많네?"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얘 건강 하나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좋으니까 걱정 마."
"그래, 그래. 지금 이렇게 술 마시는 거 보면 몰라?"
그렇게 대화는 금세 다른 주제로 옮겨 갔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아령의 말이 맞아.’
박초록.
건강한 20대 여자.
아무리 봐도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미 넘치는 모습이다.
만약 내 생각대로 ‘종양’이 원인이라면?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술을 마실 수가 있을까?
내일 척추를 마비시킬 정도의 종양이 몸속에 있는데, 오늘 밤에 이렇게 신경학적인 증상이 하나도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쩌면 다른 원인일지도 몰라.’
감염(infection)?
설마 감염이 12시간 만에 빠르게 진행되나?
이것도 말이 안 되고…….
점점 오리무중이다.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도 짐작이 안 간다.
‘일단 정보가 좀 더 필요해. 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겠어.’
그때 김아령이 말했다.
"우리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지금 잔에 채워져 있는 거 버리면 척추 접어 버린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상큼한 표정으로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곧 둘은 화장실로 걸어갔다.
근욱이가 술 취한 얼굴로 말했다.
"방금 들었냐? 아령이 졸라 화끈해. 내 스타일이다."
아무래도 근욱이는 포니테일 김아령의 성격이 마음에 든 눈치다.
"반했냐?"
"어."
"본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이런 게 운명 아니겠냐? 직업도 스포츠 강사에, 심지어 이름도 아령이야. 운동 좋아하는 나랑 천생연분이다."
근욱이가 반쯤 홀린 듯 중얼거린다.
볼 빨간 것 좀 보소.
반쯤은 술기운 때문에, 그리고 반쯤은 사랑에 빠진 탓인가 보다.
"그래. 잘해 봐라. 이따가 자리 비켜 줄게."
나는 피식 웃었다.
잘된 일이다.
내가 용무가 있는 쪽은 박초록 쪽이니까.
잠시 후.
두 사람이 돌아오자마자 나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과감한 말을.
"나는 초아랑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어."
"……?!"
둘이 약간 놀란 눈치다.
박초록은 흔쾌히 수긍했고, 나는 해변가를 산책하자고 말했다.
조개구이집을 나와 발걸음을 옮기는데, 김아령이 등 뒤에서 외친다.
"야, 요새는 바닷가에도 CCTV 다 있어! 둘이서 산책 가서 이상한 짓 하지 마라!"
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 *
사박, 사박.
두 사람이 해변을 걷고 있다.
조금 전 술자리의 정신없었던 분위기와는 달리, 바닷가에는 파도 소리만이 차분하다.
‘뭐야, 이 남자 은근히 과감하네. 갑자기 나를 데리고 나오다니……?’
박초록.
그녀는 자신의 매력에 꽤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살아오며 수많은 남자들의 대시를 받아 봤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별다를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 만나게 된 남자는 왠지 느낌이 다르다.
‘생긴 건 순진하게 생겼는데 완전 적극적이었잖아?’
의외성 있다.
외모도 내 스타일이고.
초록은 앞에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호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변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선한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잠깐 앉을까?"
"그래."
둘은 벤치에 앉았다.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하다.
두근, 두근.
초록은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왜 따로 나오자고 했어?"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어서."
오…….
솔직하기까지?
점점 마음에 든다.
초록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가끔 그럴 때가 있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게 될 때.
초록은 자신의 목소리에 혀 꼬인 말투가 섞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부터 내가 너한테 질문을 몇 가지 할 건데……."
그러자 초록이 웃으며 남자의 말을 끊었다.
"잘됐네. 사실 나도 너한테 좀 궁금한 게 많았는데…… 그럼 서로 질문 하나씩 물어보기 할까?"
"그래."
"나부터 해도 돼?"
"그러든가."
대답 한번 시크하네.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초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혹시 여친 있어?"
"아니."
아싸!
초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솔로다 이거지?
첫 번째 질문이 끝나고 이제 선한의 차례였다.
과연 어떤 질문이 들어올까?
선한의 입이 열렸다.
"너 혹시 열감 있어?"
응?
초록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질문을 이해하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열감? 몸에서 열나는 거 말이야?"
"응."
이건 무슨 의도지?
아, 혹시 그런 뜻인가.
지금 이 순간 두근거리는 마음에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냐는…….
‘참 나. 누가 의사 아니랄까 봐 되게 표현 특이하게 하네.’
초록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모르는 척 말했다.
"나 열 없는데? 궁금하면 만져 보든가."
그러자 선한은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초록의 이마를 짚었다.
뭐야, 결국 스킨십 전략이었어?
만지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초록은 웃으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너 최근에 연애한 게 언제야?"
"1년 전. 이제 내 차례지?"
"응."
"너 최근에 진단받은 질환 있어?"
뭐야?
무슨 질문이 이래?
의사는 다 이런 건가…….
점점 눈앞의 사람이 사이코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뜬금없이 그런 건 왜 묻…… 나 무슨 병원에 건강검진 온 기분이네?"
초록이 웃어넘기려 했다.
이제 그만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선한은 기다렸다는 듯 재차 물었다.
"건강검진? 언제 받아 봤어?"
사이코다.
이 남자는 건강에 미친 사이코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 *
"아까부터 그런 건 왜 물어?"
나를 바라보는 초록의 눈빛은 이제 충분히 이상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정보를 알아내야 하니까.
"회사에서 해 준 건강검진 아무런 이상 없었어. 이제 그런 얘기 그만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는 초록의 눈빛에 불만이 가득하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직 정보가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떻게든 병명을 지어내서라도 병원에 가게 만들 생각이다.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그게 뭔데?"
"사실……."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눈앞이 어두워졌다.
시야가 왜곡되며, 습기를 머금은 밤바다의 짠 공기가 멀리 사라지는 듯하다.
사아아―
눈앞의 풍경이 바뀐다.
나는 또다시 낯선 곳에 도착해 있었다.
‘꿈속이다!’
잘됐다.
안 그래도 답답하던 차였다.
초록에게 취조하듯이 정보를 얻어 내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는 쓸 만한 정보가 더 있기를 바라야지.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곡담제일병원은 아닌 것 같고.’
사박―
나는 발걸음을 옮기다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겨울.
그렇다는 것은 꽤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앞으로 눈 내리는 한겨울이 오려면 적어도 6개월 후라는 이야기인데…….’
나는 곧 건물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고,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