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서퍼들(4)
생각해 보자.
꿈속에서 풍 선생이 뭐라고 말했었지?
<배꼽 아래로 감각이 없는> 상황.
그래서 <신경과와 신경외과에 연락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단 신경과나 신경외과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 보자.’
누가 있지?
문득 한 얼굴이 떠오른다.
바로 이전 달 함께했던 신경외과 레지던트, 허기진 선생.
나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선한] 선생님, 잘 지내시죠? 저 인턴 신선한입니다. 잠시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일단 밥을 먹으며 머릿속을 정리해 보자.
나는 근욱이와 근처 국밥집에 들어갔다.
"이모, 여기 국밥 둘이요!"
근욱이가 외친다.
녀석은 신난 표정이다.
흡사 놀이동산에 놀러 가기 직전의 아이 같달까.
"선한아. 그나저나 네가 웬일이냐?"
"응?"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여자들한테 술 먹자고 말을 걸었냐고.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아…… 그냥 충동적으로 그러고 싶어졌어."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자, 근욱이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알겠다. 너 운동하는 여자들 취향이었구나!"
"……?"
"하긴 저번 미팅 때도 그렇고, 우리 병원 동기들도 그렇고. 그동안 건강미 넘치는 스타일이 주변에 없긴 했지."
근욱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듯한 표정이다.
에라, 맘대로 생각해라.
남의 속도 모르고.
나는 지금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단 말이다.
"국밥 두 그릇 나왔습니다~"
뭐 이렇게 빨라?
역시 곡담의 스피드.
국밥집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치 주문하기 전부터 준비된 것처럼, 국밥 두 그릇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따 8시에 만나자고 했으니…… 시간이 별로 없네.’ 남은 한 시간.
그동안 전략을 짜야 한다.
나는 대충 국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스마트폰으로 교과서와 논문들을 검색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꿈에서 본 충격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오전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운동을 하던 박초록 환자.
그녀는 응급실에서 공포에 질린 채 말하고 있었다.
<다, 다리에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어떡해요 선생님?>
‘분명 환자의 몸에는 뚜렷한 상처가 하나도 없었어. 그런데도 파라플레지아(paraplegia, 하지마비)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는 것은…….’
꾹꾹―
나는 키워드를 검색했다.
비외상성 척수손상(non traumatic spinal cord injury).
찾아보니 여러 가지 원인들이 나왔다.
종양에 의해 척수가 눌리는 경우.
감염에 의해서 척수가 손상받는 경우.
혈관 문제로 척수가 혈류를 공급받지 못하는 경우.
등등.
이 외에도 기상천외한 다양한 이유가, 인터넷을 뒤져 보니 계속 나온다.
‘하…… 이건 보통 스무고개가 아닌데?’
어렵다.
알려 준 힌트가 너무 적다.
난이도 끝판왕.
만약 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면 출제위원은 테러를 당했을 것이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와 달리, 근욱이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하…… 휴가지에서 낯선 여자들과 2대2 데이트라니. 무슨 말부터 해야 되냐?"
두두두두―
근욱이는 아까부터 다리를 떨고 있다.
밥그릇이 진동한다.
누가 헬스중독자 아니랄까 봐, 다리 떠는 것도 운동하는 것처럼 격렬하다.
"다리 좀 그만 떨어. 가게 부서질 것 같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옷 좀 신경 써서 입고 올 걸."
"아냐. 넌 그냥 지금처럼 패션에 신경 안 쓴 게 제일 보기 좋아."
"그래?"
"응."
내 말에, 단순한 성격인 근욱이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만약 둘 다 나한테 반했다고 하면 어떡하지? 나는 연애할 때 일편단심 스타일인데……."
근욱이는 뻘소리를 중얼거린다.
벌써 혼자 연애 중인 모양이다.
한편 나는 온통 딴생각뿐이다.
‘환자에게 하지마비가 발생하는 원인을 알 수 있다면, 내가 개입해서 미래를 바꿀 수도 있을 텐데…….’
띠링―
그때, 핸드폰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허기진 선생님이었다.
[NS 허기진] 오 선한이, 무슨 일이야? 이번 달 곡담 파견이라고 그랬지?
[선한]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질문 좀 드리고 싶어서요.
[NS 허기진] 응? 무슨 질문?
[선한] 비외상성 하지마비를 주소로 젊은 여자가 응급실로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질문을 보낸 뒤 기다렸다.
잠시 후.
따르르―
전화벨이 울린다.
나는 가게 바깥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오랜만에 허기진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네가 근무 서는데 그런 환자가 왔어? 그럼 빨리 신경과 컨택해야지!>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다.
역시 허 보살님.
심성이 너무 착한 분이다.
나는 또 적당한 말로 둘러댔다.
"아, 제가 맡은 환자는 아니고…… 지방에 있는 제 친구 병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자 허기진 선생의 말투가 사그라든다.
다시 평소의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돌아온다.
<아, 그래? 난 또…… 아무튼 젋은 환자에서 비외상성 하지마비면 종양 때문에 눌려서 그러려나…….>
종양?
역시 그게 가장 흔하겠지.
안 그래도 머릿속에 1순위로 염두에 두고 있던 답안이었다.
"척수종양이요?"
<응,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랩(lab, 피검사)이랑 영상은 어떻다고 하는데? 검사해 봐야 알지 않을까…….>
"아……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종양, 감염, 염증…… 생각할 건 많아. 선한이 네 친구면 이제 의사면허 딴 지 얼마 안 됐을 것 아닌가? 신경과나 신경외과한테 빨리 연락하라고 해…….>
"예, 감사합니다, 선생님.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딸깍.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후우.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냉정해야 한다.
지금 내 판단력에 또 누군가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
‘생각해 보자.’
만약 종양(neoplasm)이라면?
좀 더 빨리 발견해서 수술하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종양이 척수(spinal cord)를 눌러서 하지마비가 오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종양이 아니라 다른 원인이라 해도…….’
일단 빨리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해야 한다.
그것만이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다.
‘그런데 과연 환자가 내 말을 들을까?’
골치가 아프다.
명분이 없지 않은가?
처음 보는 의사가 대뜸 병원 검사를 권한다고 수긍할 리도 없고…….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방법을 생각해 보자. 어떻게든 무조건 설득해야만 하니까!’
나는 다짐했다.
물론 상대는 나와 일면식도 없고 처음 만난 사람이다.
나에게 그 사람을 도울 의무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과연 내 마음이 편할까?
그럴 리 없다.
아마 앞으로 계속 생각나겠지.
한 명의 의사로서도 이런 미래를 본 이상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번 문제도 어떻게든 풀어 보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국밥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진지하게 무언가를 고민하던 근욱이가 말했다.
"선한아."
"응?"
"그 여자분들, 만약 곡담 사는 분들이면 어떡하지…… 신혼집은 곡담으로 해야 할까?"
얘는 혼자 머릿속에서 어디까지 간 거야?
* * *
잠시 후.
8시가 다가왔다.
우리는 바닷가의 포차에 자리를 잡았다.
해변이 보이는 제방 위에 여러 개의 야외 점포들이 줄지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여기 좋죠?"
"예, 분위기 정말 좋네요!"
"먼저 앉으세요."
남자 둘, 여자 둘.
우리는 원형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낯선 만남.
언제나 그 속에는 약간의 긴장과 설렘이 있다.
해풍의 짠 내 사이로 달짝지근한 분위기가 섞이는 듯하다.
‘경치 좋네.’
나는 잠시 주위를 바라보았다.
캠핑 조명이 낭만적으로 반짝이는 곡담 해변 거리.
파도 소리와 함께 여름 해변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친구들끼리 온 그룹부터 가족끼리 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 해변으로 놀러 온 다양한 사람들이 가게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개중에는 우리처럼 낯선 남녀들이 모여 있는 그룹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서로 이름도 모르고 번호만 주고받았네요."
"아, 저희 이름은……."
우리는 서로를 소개했다.
파견 온 의사라는 말에 두 사람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도 자기를 소개했다.
박초아.
김아령.
그녀들의 이름이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초아? 분명 꿈속에서 보았을 때는 이름이 박초록이었는데…….’
아마 본명이 특이하기 때문에 숨기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 마음 이해한다.
나도 이름이 특이하니까.
물론 이 중에서는 내 이름이 제일 특이하긴 하지.
"이름이 신선한이라구요?"
"대박!"
언제나 똑같은 패턴.
초면에 분위기를 푸는 대화로는 딱이다.
괴상한 이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거기에, 예전 강남역 사건을 마침 두 사람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동영상 본 적 있었는데……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분들이구나!"
단숨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포니테일 김아령이 적극적으로 대화를 잇는다.
"제 친구는 지금 서울 살면서 회사 다니구요. 저는 여기서 스포츠 강사 하고 있어요."
"스포츠 강사요?"
"네."
"우와!"
근욱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마치 운명의 짝을 만나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다.
하여간 단순하기는…….
헬스중독자답게 스포츠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것 보소.
"근데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희 술 좀 많이 마셔요."
"우리 페이스 쫓아오다가 의사 선생님들 실려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괜히 같이 술 마시자고 했다 그러면서 도망칠 수도 있어요."
두 여자가 우리를 향해 도발적으로 말하며 웃는다.
그때 마침 가게 점원이 메뉴를 주문받으러 다가왔고, 우리는 조개구이 대(大)짜를 시켰다.
"소주는 몇 병 드려요?"
"일단 두 병 주세요."
근욱이가 점원에게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테이블의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예?"
"겨우 두 병이요?"
그녀들이 코웃음을 친다.
심지어 음식점 직원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우리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아니, 입이 몇 개인데 소주 두 병을 시켜요?"
"오늘 입술만 적시고 끝날 예정?"
성토대회가 이어진다.
거의 반역죄를 저지른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자 근욱이가 재빨리 주문을 수정했다.
"다섯 병 깔아 주세요!"
"예~"
점원은 씩 웃더니 계산서에 쓱쓱 무언가를 적더니 사라졌다.
금세 소주 5병과 멀건 콩나물국이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담겨 나온다.
그러자 포니테일 김아령이 소주병을 거머쥐더니 말한다.
"미리 말하는데, 저희 내숭 이런 거 없어요."
휘릭―
제자리에서 소주병을 540도 돌리더니, 팔꿈치로 병의 뒷부분을 치기 시작했다.
팍팍―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흡사 달인의 포스랄까?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
김아령이 우리 둘을 쳐다보고 씩 웃으며 말한다.
"일단 서로 말부터 까고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