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13화 (113/241)
  • #113 서퍼들(3)

    ‘이 사람들은……?’

    분명 낯이 익었다.

    초록색 단발.

    그리고 검은색 포니테일.

    조금 전 근욱이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던 여자들이다.

    두 사람은 수영복을 입은 채 백사장에서 서핑보드 위에 엎드려 있었다.

    ‘갑자기 꿈속에서 이 사람들이 왜 보일까. 혹시 이곳 해변에서 무언가 사고를 당하게 되는 건가?’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

    일단 지켜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거기서 균형을 잡으면서 양쪽 팔로 노를 젓는 것처럼 해 봐. 시선은 정면을 봐야 해."

    포니테일이 말한다.

    그러자 초록 머리가 동작을 따라 한다.

    대충 보아하니, 친구에게 서핑을 가르치는 상황인 모양이다.

    한쪽은 숙련자고, 한쪽은 딱 봐도 초보다.

    "자, 그렇게 파도를 탔다 싶으면 그다음 단계는 보드 위에서 일어서야 되는 거야. 하나, 둘!"

    "셋!"

    초록 머리 여자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킨다.

    긴팔 소매의 래시가드에 수영복을 입은 몸매가 햇볕에 빛을 발한다.

    해변을 지나가던 남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헤벌레 하면서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보인다.

    ‘좀 민망하네.’

    무슨 남성잡지 화보 같다.

    아무리 내 꿈속이라지만,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히 사고나 부상이 일어날 만한 위험 요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방심하지 말자. 이렇게 미래를 보여 줄 때는 꼭 사고의 실마리가 잡히게 되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경계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보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다시 바다에서 해 볼래?"

    "그래. 내가 오늘 파도 한 번 타고 만다!"

    "오늘 처음 배우는 건데 할 수 있겠어?"

    "뭐래? 두고 봐. 고등학교 때도 운동은 내가 너보다 잘했거든?"

    "하하, 자신감 여전해."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햇볕이 반짝이는 바다로 향했다.

    ‘주위에 사람들도 많고 안전 요원도 근처에 있어…… 익수 사고가 일어나도 금방 대처가 가능할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참 후.

    물 위에서 보드를 타던 친구 둘이 다시 백사장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옆에 서핑보드를 내려놓은 채, 초록 머리는 다리를 쭉 뻗고 발가락을 조몰락거리고 있다.

    "어때. 바다에서 하려니 모래사장보다 힘들지?"

    "응, 뭐…… 생각보다 좀 힘들긴 하네."

    진이 빠진 초록 머리가 마지못해 인정하자, 포니테일이 픽 웃으며 말한다.

    "원래 처음에는 다 그래. 엎드려서 허리 편 자세가 평소에 자주 하는 자세는 아니잖아? 원래 안 쓰던 근육 쓰면 힘든 거야."

    "그런가…… 에구구."

    통, 통.

    초록 머리는 앓는 소리를 하며 자신의 허리를 두드린다.

    그러자 친구가 웃으며 그녀를 도발했다.

    "이거 왜 이래. 한때 곡담고등학교 육상부 에이스였던 애가? 서울 올라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약골 다 된 거?"

    그러자 발끈하며 초록 머리가 대꾸한다.

    "야, 너도 직장 다녀 봐. 운동 꾸준히 못 한 게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겠어."

    "인터넷 쇼핑몰 일이 그렇게 바빠?"

    "장난 아니야."

    "뭐, 정 힘들면 포기하든가. 기껏 서핑하러 와서 보드에 엎드려만 있다가 가네, 박초록?"

    "뭐래. 더 할 수 있거든?"

    이름이 박초록?

    특이한 이름이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초록 머리가 엉덩이에서 모래를 털고 일어날 준비를 한다.

    "그래. 황금 같은 연차 사용해서 여기까지 서핑 배우러 왔는데, 일어서서 파도 한 번은 타 봐야지!"

    초록 머리는 힘차게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어?"

    풀썩.

    초록 머리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푸하하. 야. 너 진짜 왜 그래? 체력 거지 됐냐?"

    "아니. 그게 아니라……."

    초록 머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약간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다리에 힘이 없어. 간질간질? 뭔가 찌릿찌릿한 거 같기도 하고. 힘이 왜 이렇게 떨어지지. 허리도 아프고……."

    "뭐? 언제부터?"

    "그게……."

    허리가 아프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없다?

    뭔가 느낌이 심상치 않다.

    더 듣고 싶은데, 갑자기 화면이 일그러진다.

    * * *

    왜애앵―

    구급차 소리가 들린다.

    여기는 곡담제일병원 응급실이다.

    곧 119 구급대원이 환자가 누워 있는 스트레처 카를 들이밀면서 외친다.

    "연락드렸던 환자입니다!"

    119 구급대원에 의해 옮겨지는 환자.

    자세히 보니, 아까 보았던 초록색 머리의 그녀다.

    얼굴을 보니 패닉에 빠져 있다.

    통증?

    아니, 그보다는 공포다.

    그녀의 표정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곧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근욱이가 달려온다.

    그 옆에는 나도 있다.

    꿈속에서 내 얼굴을 보는 건 정말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하지가 않다.

    곧 근욱이의 눈이 커진다.

    "어? 분명 며칠 전에 시내에서 만났던…… 그……?!"

    근욱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포니테일이 근욱이의 옷자락을 와락 붙잡고 말한다.

    경황이 없는지, 근욱이가 이전에 사진을 찍어 주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서, 선생님…… 도와주세요. 친구가 갑자기 걷지를 못해요, 흑흑."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걷지를 못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때, 우리의 등 뒤에서 나타난 풍 선생이 외친다.

    "아까 연락 왔던 파라플레지아 환자인가? 다들 나와. 내가 볼게!"

    뭐?!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뒷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파라플레지아(paraplegia).

    하지마비를 뜻한다.

    보통 척추를 심하게 다친 환자들이 보이는 증상이다.

    이럴 경우, 영원히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남은 생을 살아가게 되는 환자들도 있다.

    그런데 저 초록 머리 여성분이 파라플레지아라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마비라니…… 여태까지 이런 증상으로 응급실에 온 환자는 없었는데.’

    설마 교통사고라도 난 건가?

    어쩌면 내가 보지 못한 장면이 중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환자를 다시 한번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환자는 너무나 말끔하다.

    수영복 차림 그대로 실려 왔기 때문에, 뚜렷한 외상이 있다면 눈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환자의 몸에는 그 흔한 찰과상 하나조차 없다.

    ‘하지마비가 올 정도면 허리에 척추 뼈가 부러질 정도로 외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디 부딪힌 흔적도 없는데…….’

    내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풍 선생이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어디 부딪히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건 아니었습니까?"

    "아뇨. 저희는 그냥 서핑하고 있었는데……."

    "서핑?"

    "네. 점심때부터 2시간 정도 탄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얘가 허리가 아프다더니…… 흑……."

    포니테일이 울먹이며 말을 더 잇지 못하자, 환자 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한다.

    "아까 한 1시간 전부터 갑자기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감각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음……."

    풍 선생은 허벅지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감각과 운동신경을 체크한다.

    "환자분. 여기는 감각이 느껴집니까?"

    "네, 네."

    "그럼 여기는요?"

    "……."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곧 환자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다.

    "다, 다리에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어떡해요 선생님?"

    풍 선생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이내 표정이 심각해진다.

    언제나 유쾌함을 잃지 않는 사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는 것은…….

    지금 이 상황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곧 풍 선생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배꼽 아래까지밖에 센서리(sensory, 감각)가 남아 있질 않아. 브레인(brain, 뇌)이랑 스파인(spine) 영상 찍고, 빨리 신경과, 신경외과 컨택!"

    풍 선생님의 말이 이렇게 빨라진 적이 없었다.

    "여기 랩도 빨리해 주고!"

    상황이 심각하다.

    곧 응급실이 바빠진다.

    그 속에서 투명인간인 나는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뭔가 정보를 더 얻어야 해!’

    그렇게 생각하는데, 눈앞의 시야가 일그러진다.

    뭐야, 이게 다라고?!

    잠깐만 기다려!

    하다못해 환자에 대한 단서 몇 가지라도 좀 더…….

    * * *

    "감사합니다.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 본 탄산소년의 오랑캐였습니다! 다음 노래는―"

    "와아아―"

    다시 곡담 시내.

    여전히 버스킹 그룹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환호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하지마비…… 초록 머리…… 그래, 박초록!

    "야. 뭐 하냐?"

    그때, 근욱이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근욱아, 방금 그 사람들 어디 갔어?"

    "응? 누구?"

    "그 초록…… 아니, 너한테 사진 찍어 달라고 했던 사람들 말이야!"

    내 다급한 목소리에, 근욱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좀 전에 저쪽으로 갔는데? 너 저쪽에서 액세서리 보는 동안 벌써 자기들끼리 사라졌……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근욱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초록색 머리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일단 잡아야 돼. 이대로 보내면 사고를 막을 방법이 없어!’

    타앗―

    내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곧, 사람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머리 색이 특이한 덕분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저, 잠시만요!"

    "네?"

    여자 둘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내 거친 목소리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젠장.

    일단 붙잡기는 했는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말문이 막혔다.

    "그……."

    당신은 조만간 하지마비에 걸릴 겁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요?

    네. 사실 제가 미래를 볼 수 있거든요.

    어머,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화가 진행될 리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나는 초록 머리 여자에게 난데없이 하지마비가 오게 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한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에 넷이서 맥주라도 한잔하시면 어떨까 해서요."

    에라 모르겠다.

    일단 시간이라도 벌자.

    지금 말할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다음에 이 사람들을 볼 때는 응급실일 테니까.

    "아……."

    초록 머리가 주저한다.

    그야 당연하겠지.

    갑자기 난데없이 쫓아와서 다급하게 말을 거는데 경계심이 생길 만도 하다.

    "저희는 맥주 말고 소주 좋아하는데요."

    그때 포니테일이 웃으며 말한다.

    표정이 나쁘지 않다.

    아무래도 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사실 저희도 아까 두 분이 좀 괜찮아 보여서 사진 찍어 달라고 말 걸었던 거거든요."

    "야아, 왜 나까지 끌어들여?"

    "뭐 어때. 우리 밥 먹고 나면 저녁에 할 일 없잖아? 같이 놀면 좋지 뭐!"

    다행이다.

    포니테일 여자는 적극적인 성격인 듯했다.

    그렇게 번호를 교환하고 약속을 잡았다.

    그때 나를 지켜보던 근욱이가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선한아."

    "……?"

    "믿고 있었다구."

    그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린다.

    이 녀석의 미소와는 별개로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일단 시간을 벌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마비로 응급실에 내원하는 20대 여자 환자.

    이것만 가지고 내가 이번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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