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서퍼들(2)
"내기?"
"네. 눈싸움 한 판!"
갑자기 웬 눈싸움?
중학생들도 아니고.
나는 연서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됐다. 갑자기 유치하게 무슨 눈싸움……."
"시~작!"
연서가 그렇게 말하더니,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나는 연서를 마주 보았다.
얼떨결에 결투를 수락해 버렸다.
"어머, 청춘이네 청춘이야."
"호호호호."
"저러다 젊은 선생님들 사이에 불붙는 거 아닌가 몰라."
간호사 선생님들이 우리를 보고 깔깔 웃으면서 지나간다.
청춘?
그런 달달한 거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승부욕에 불이 붙은 상황이다.
연서도 한 고집 하는 성격이라, 절대 나에게 지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와……."
"저걸 기를 쓰고 이기려고 드네."
"하여튼 둘 다 자존심 장난 아니라니까."
"우리 동기들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순으로 줄 세우면, 맨 앞줄에 쟤네 둘이랑 류명인 있을걸?"
옆에서 근욱이와 소담이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우리의 눈싸움은 3분이 넘게 이어졌다.
잠시 후, 연서가 슬슬 한계가 오는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먼저 포기하시죠?"
"나 이거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는데."
"정말요?"
"응."
"이래도요?"
성큼.
연서가 한 발자국 내 쪽으로 다가온다.
조막만 한 얼굴이 가까워진다.
깜짝이야.
솔직히 놀랐다.
남자라면 누구나 심장이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태연히 연서를 마주 보았다.
위잉―
그때 갑자기 누군가 우리 얼굴 사이에 끼어들며, 내 눈에 휴대용 미니 선풍기를 가져다 댄다.
"이것들이. 신성한 응급실에서 누가 연애질이야?"
으악!
관중 난입이다.
나는 기습공격을 받고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누군가 했더니 풍 선생이다.
그가 껄껄 웃더니 연서의 팔을 잡고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아이돌 승!"
"아싸!"
연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더니 빨개진 눈으로 나를 놀리듯 말한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하나 무조건 들어주기였죠?"
뭐야, 언제 그랬어?
내가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연서는 신나게 뛰어 스테이션 너머로 사라졌다.
그 뒤를 소담이가 따라가면서, 우리의 인계와 장난스러운 눈싸움 혈투는 끝나 버렸다.
내가 풍 선생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야 인마, 원래 이런 건 은근슬쩍 져 주는 거야. 하여튼 요새 애들은 인생이 퍽퍽해서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풍 선생은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보다, 내가 시킨 과제는 했냐?"
"예."
나는 스테이션 구석에 놓아두었던 귤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자신만만했다.
그러자 풍 선생이 봉합된 귤을 살펴보더니 놀라며 말했다.
"오오…… 이 정도면 저번보다 확실히 실력이 늘었군!"
"그럼 이제 제대로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그래. 이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자격이 충분하다!"
"다음 스텝이요?"
"잠깐만."
그러더니, 다시 귤을 하나 까서 나에게 던지며 말했다.
"자, 다음에는 5―0 나일론이다! 화이팅!"
젠장!
더 어려워졌다.
3―0 봉합사로 겨우 마음에 들게 완성했는데, 이번에는 더 얇은 실인 5―0로 하라니.
그렇게 나에게 또 하나의 과제를 안겨 준 풍 선생은 낄낄대며 당직실로 사라졌다.
‘이런 방법으로 실력이 확실히 늘긴 느는 걸까?’
어쩔 수 없지.
일단 배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풍 선생님의 지시를 착실하게 따라 보자!
끈기 하나만큼은 자신 있으니까.
* * *
다음 날 저녁 6시 반.
나는 일어나자마자 귤을 붙잡았다.
그러자 근욱이가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서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야, 그거 또 꿰매냐?"
"응."
"왜 했던 거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거야?"
"이번에는 달라. 5―0 나일론이야."
3―0 나일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더 얇고 니들(needle, 바늘)도 더 작은 5―0 나일론으로 귤 봉합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니들의 크기가 작아져서 컨트롤이 더 힘들었다.
그리고 실도 얇아진 만큼 좀 더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게 되었다.
"어휴, 옆에서 쳐다보는 내가 다 정신병 걸릴 거 같다. 잠깐 쉬어 인마."
홰액!
근욱이가 내 손에서 귤을 빼앗더니 말했다.
"오늘 나랑 데이트 좀 하자."
"데이트?"
남자끼리 징그럽게 무슨 데이트야?
내 반응이 미지근하자 근욱이가 말했다.
"시내에서 밥도 먹고 해변가도 좀 걷다 오자. 시켜 먹는 것도 지겹잖아! 방구석에서 귤만 조몰락거리지 말고!"
"음……."
생각해 보니 요 며칠 근처에서 끼니를 모두 해결하느라, 멀리 나가 보지 못하긴 했다.
그리고 계속 방에 틀어박혀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잘 안될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리프레시가 한 번 필요하다.
"그래, 가 보자!"
어쨌든 밥은 먹어야 하니까.
오랜만에 근욱이랑 둘이서 바람이나 좀 쐬어야겠다.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곡담 시내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 * *
저녁 7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곡담 시내는 북적거렸다.
아직 초저녁인데도 길거리에는 야시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름 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광장에 아티스트들이 모여 버스킹을 하고 있다.
그 주위로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우리는 오랑캐~ 네 맘을 약탈해~"
"와아아!"
올해를 강타한 히트곡인 탄산소년의 노래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익숙한 멜로디에 사람들이 손을 들고 환호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몸을 들썩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저 노래가사는 참 아무리 들어도 근본이 없다.
"어때. 나오니까 좋지?"
"그렇네."
"바닷가에 왔으면 이렇게 바람도 좀 쐬고 해야지! 여기까지 와서 휴일에도 하루 종일 병원 안에 박혀 있으면 아깝잖아."
그러고 보니 곧 축제였지.
축제일이 다가온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첫날에 비해, 사람들이 세 배 정도는 불어난 것 같다.
거리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즐거운 소음으로 가득하고, 줄지어 늘어선 푸드트럭에서는 맛있는 냄새들이 코를 자극한다.
"자기야 나 저거 먹고 시퍼!"
"우웅 어디?"
어디선가 혀 짧은 목소리들이 들린다.
주위를 둘러보니, 팔짱을 끼고 놀러 온 커플들이 많다.
여기도 커플.
저기도 커플.
어딜 봐도 커플들이다.
우리처럼 남자 둘이 걷는 모습은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다.
갑자기 근욱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크으, 분위기 죽이는구만. 기왕이면 이럴 때……."
"또 여자 얘기 하려고 그러지?"
"어떻게 알았냐?"
"뻔하지."
내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근욱이는 한탄을 계속했다.
"이런 시간을 남자끼리 보내야 하다니 너무나도 애달프구만. 이럴 때 운명적인 그녀가 딱 하고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
그때, 근욱이 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와서 말했다.
"저기요. 저희 사진 좀 찍어 주실래요?"
응?
설마 근욱이의 주문이 통한 건가?
우리는 말을 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여자 두 명.
나이는 대략 20대 중반쯤일까?
한 명은 긴 흑발 포니테일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를 가졌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특이하게도 초록색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두 명 모두 들떠 있는 분위기다.
여름철 휴가지 복장답게 짧은 옷을 입고 있어서 주위의 이목을 한눈에 끌고 있었다.
‘친구끼리 여행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옆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근욱이가 헤벌레 하고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다.
얘는 정말 예측을 벗어나지를 않는구나.
저렇게 좀만 더 헤벌레 하고 웃다가는 입에서 침 떨어질 것 같다.
"사, 사진이요?"
"네."
"잠시만요."
근욱이가 여자들의 스마트폰을 받아 들고는 조금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
"친구끼리 놀러 오셨나 봐요?"
"네. 서핑하러 왔어요."
"우와, 서핑이요?"
"네, 서핑."
"오……."
물론 그 이상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 능력 따위는 근욱이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찰칵.
근욱이는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는 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기, 좀 아래에서 한 번 더 찍을게요. 다리가 길어 보여야 되니까."
그러자 여자들이 서로의 팔을 때린다.
"야, 너 다리 짧대."
"무슨, 내가 아니고 너겠지!"
그러자 근욱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어…… 두 분 다 짧긴 한데, 그래도 아름다우십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더니, 빵 터지며 웃는다.
근욱이 특유의 재주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 말이나 하는 건데, 의외로 여자들의 호감을 살 때가 있다.
"아니 짧은 게 아니라, 말이 헛나왔……."
근욱이가 머쓱하게 변명하려 하자 여자들이 말했다.
"아 됐어요! 저희 둘 다 다리 짧다 이거죠?"
"뭐래. 너만 짧지 나는 안 짧거든?"
"야, 너나 나나 키 똑같애!"
두 사람이 웃으면서 키득대더니 근욱이에게 말했다.
"아무튼 그럼 길게 나오게 잘 찍어 주세요!"
"넵!"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다.
근욱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동안 나는 옆쪽 야시장 부스에 전시되어 있는 액세서리를 구경했다.
‘그러고 보니 작은누나가 돌아올 때 선물 사 오라고 했는데.’
액세서리라.
아무리 봐도 작은누나 취향은 아니다.
그래, 차라리 먹을 거를 사 가는 게 낫겠다.
인턴 끝나는 날 과메기나 한 박스 사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액세서리를 내려놓았다.
그동안 근욱이는 계속 낯선 여자들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자, 마지막으로 한 장만 더 찍습니다. 하나, 둘, 셋~!"
그때 갑자기.
파앗―
눈앞이 어두워졌다.
마치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처럼, 눈앞의 야시장 풍경이 흐릿해지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리고 미래의 한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사아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지는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는데, 지금은 환한 대낮이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겨우 눈을 적응시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쏴아―
파도 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모래사장, 익숙한 상점들이 펼쳐져 있다.
‘곡담 해수욕장이잖아?’
나는 잠시 풍경에 취했다.
비록 꿈속이라고 하지만, 한낮의 바닷가에서 느껴지는 정취는 꽤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잠깐.
갑자기 왜 해수욕장을 보여 주지?
여기에서 뭔가 큰 사고라도 일어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평화로운 기분이 싹 사라지고 긴장이 된다.
‘설마 식인 상어라도 나타나는 거 아냐? 아니면 갑자기 해일이 덮친다든가…….’
머릿속에서 온갖 엉뚱한 상상이 날개를 펼친다.
설마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물론 가장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익수 사고일 것이다.
휴가철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사고니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다른 사고일 수도 있고.
‘멍하니 있다가 중요한 장면을 놓치면 안 돼. 어떤 사고가 일어나는지 잘 지켜보자.’
사박, 사박.
나는 걸음을 옮겼다.
곧, 백사장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