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11화 (111/241)
  • #111 여름 바다의 기연(14)

    "귤껍질을 꿰매라구요?"

    "그래."

    내 질문에, 장풍 선생은 씩 웃으며 팔짱을 꼈다.

    "너, 나한테 수처 배우고 싶다면서? 이게 바로 장풍식 특훈법이다. 수처 능력을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지."

    내 눈이 휘둥그레지자 풍 선생이 덧붙였다.

    "왜. 의심스럽냐?"

    "아니, 그게……."

    "처음이니까 3―0 나일론, 단일결절(simple interrupted suture)로 1센티미터 간격으로 해 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손에 쥐어진 귤을 바라보았다.

    물론 풍 선생이 평범하게 기술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듣도 보도 못했다.

    보통 수처 연습을 할 때는 의료용 실리콘으로 만든 전용 도구를 사용한다.

    만약 조금 특이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기껏해야 인형이나 베개 정도가 동원된다.

    그런데 귤이라니?

    상상 초월이다.

    "에이. 풍 선생님 또 거짓말하신다."

    "그런 수련법이 어딨어요? 무슨 만화책도 아니고."

    옆에 있던 동기들이 웃어넘기려 한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귤의 껍질을 까다가, 갑자기 수처(suture, 봉합)해서 원상 복구 시키라니.

    누가 들어도 장난 같은 멘트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장풍 선생이 갑자기 목소리를 진지하게 내리깔았다.

    "일류가 되는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

    "남들의 보폭에 맞추어서는 영원히 이류로 머물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발을 내딛는 순간, 일류가 되기 위한 자신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이마를 짚고 자아도취에 빠진다.

    "크, 내가 한 말이지만 너무 멋있었다."

    풍 선생은 자기가 한 말을 곱씹으며 당직실로 걸어갔다.

    우리는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직 근욱이만 홀린 듯한 표정으로 풍 선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멋있다…… 저게 남자지."

    근욱이의 눈에는 풍 선생의 뒤태에서 광채가 나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멍충아, 뭐가 멋있어? 딱 봐도 허세구만."

    소담이가 핀잔을 주었다.

    한편 나는 손에 쥐인 귤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하지?

    진짜 속는 셈 치고 한번 해 봐?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 연서가 웃었다.

    "에이. 장풍 선생님이 하는 말을 왜 진지하게 들어요? 그냥 평소처럼 아무 말이나 던져 본 거겠죠."

    그때, 소담이가 불쑥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그런데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까 있긴 있네. 과일 수처하는 영상."

    "정말요?"

    "그게 진짜 있다고?"

    우리는 일제히 소담이가 보여 준 화면을 쳐다보았다.

    "바나나를 잘라서 수처하는 영상이네요."

    "다른 것도 있어."

    "와…… 이 사람은 포도 껍질을 수처하네요."

    "엄청 잘하는데?"

    주로 해외 영상이었다.

    과일 껍질의 절단면을 봉합하며 시연하는 영상들.

    막상 그런 것들을 보니, 귤껍질을 꿰매는 것도 그리 허황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재밌겠네."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동기들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선한 오빠, 진짜 하려구요?"

    "시간 낭비일 것 같은데."

    "야, 냅둬. 쟤 한 번 승부욕 발동되면 아무도 못 말려."

    나는 픽 웃었다.

    근욱이의 말이 맞다.

    나는 유독 이런 것에 약하다.

    뭔가 도전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면, 클리어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 해 보자!’

    밑져야 본전인데 뭐.

    어차피 시간도 많잖아.

    근무일일 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오프일 때는 하루 종일 시간이 난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풍 선생의 수처 연습법을 마스터해 보기로 했다.

    * * *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아오, 씨!"

    파악!

    나는 니들홀더(needle holder)를 집어 던졌다.

    실제로 해 보니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로, 고정.

    귤껍질이 흐물거리면서 좀처럼 제 위치를 잡지 못했다.

    포셉으로 아무리 고정을 해도 귤껍질은 헐렁거리기만 했다.

    니들홀더가 익숙하지도 않은데, 귤껍질이 흐물거리니 내가 원하는 위치에 딱 바늘(needle)을 꽂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둘째로, 묶기.

    타이(tie, 매듭) 단계에서 자꾸 귤껍질이 뜯겨 버린다.

    겨우 바늘을 잘 꽂아서 매듭을 만들려고 당기는 순간, 내 힘 조절 실패로 귤껍질 일부가 뜯겨 나와 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처를 하기에 최악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차라리 껍질이 두꺼운 바나나 같은 과일이면 좀 더 쉬울 텐데…… 이건 너무 어렵잖아!’

    에라 모르겠다!

    풀썩.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괜히 풍 선생의 농담을 나만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래도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자존심이 있지!

    어릴 때부터 손으로 하는 거라면 무조건 다 잘했다.

    이번에도 잘할 수 있다.

    "좋아. 다시 한번 해 보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새로운 귤을 붙잡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번에는 귤껍질을 상하게 하지 않고 정교하게 이어 붙여 보자!

    그리고 그날 저녁.

    "……드디어 성공이다!"

    나는 드디어 완벽한 구체가 된 귤껍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풍 선생님에게 내가 다시 만들어 낸 귤을 내밀었다.

    그런데, 정작 그걸 확인한 풍 선생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장난하냐?"

    "예?"

    "이건 겨우 모양만 맞춘 거잖아. 껍질 사이에 구멍 슝슝 뚫린 거 봐라. 우리 옆집 할머니한테 시켜도 이것보다는 잘하겠다, 인마!"

    윽…….

    팩트 폭력이다.

    말로 얻어맞는다는 게 이런 것일까?

    나름 손기술에 자부심이 있던 나에게, 풍 선생의 말은 뼈아프게 느껴졌다.

    "그렇게 엉망입니까?"

    "잘 봐라. 여기 루즈닝(loosening, 느슨하게 풀림) 되어 있지? 이렇게 되면 꿰매나 마나야."

    나는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귤껍질이 찢어지지 않게 하느라, 타이(tie, 매듭만들기)할 때 힘을 약하게 썼다.

    그러다 보니 헐겁게 매듭지어진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네 몸을 의사가 이런 식으로 꿰매 줬다고 해 봐. 이건 의료소송 감이지."

    아니…….

    듣다 보니 좀 억울하다.

    나는 항변하듯 말했다.

    "저…… 귤껍질은 피부보다 약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피부를 꿰맬 때는 이보다 더 탄탄하니까 힘을 더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풍 선생이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그래, 피부는 좀 더 탄탄할 수 있지. 그런데 혈관은 어떨 거라고 생각하냐?"

    "……!"

    혈관?

    그건 미처 생각 못 했다.

    내가 할 말을 잃자, 풍 선생이 모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어느 과를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흉부외과를 갔다고 쳐 보자. 그러면 이보다 훨씬 어려운 수처를 하게 될 상황도 올 거다."

    "……."

    "혈관 틈새가 벌어지거나, 혈관조직이 뜯겨 나가면 어떻게 될까? 과다출혈로 바로 그냥 저세상 가는 거야."

    "……."

    "그때도 어쩔 수 없었다고 징징댈래?"

    그의 말은 묵직했다.

    평소와는 달랐다.

    나는 풍 선생의 가르침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시 해 오겠습니다."

    "그래."

    나는 당직실을 나섰다.

    풍 선생의 지적이 묵직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최고의 외과의사가 되겠다고 했던 주제에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응급의학과 선생님이 갑자기 혈관 수처를 이야기하실 줄이야…….’

    저 사람은 정체가 뭘까?

    갈수록 궁금해진다.

    그리고 도전욕이 샘솟는다.

    이번 달 내로 풍 선생에게 인정받고 말 테다!

    * * *

    한편, 당직실.

    신선한이 사라지고 난 뒤.

    장풍 선생은 버려두었던 귤껍질을 집어 살펴보고 있었다.

    "이야, 이걸 진짜 해 왔네. 또라이인가?"

    자신이 주문한 대로다.

    정확히 1센티미터 간격.

    조금 전에는 굳이 부족한 점을 찾아내어 트집을 잡긴 했지만, 완성도가 높다.

    아마 전국에 있는 모든 의사들에게 똑같은 일을 시켜도, 상위 5퍼센트 안에는 들 것이다.

    "자식, 생각보다 솜씨가 좋네."

    풍 선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한이 손이 좋다는 것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생각보다 더 예사롭지 않은 녀석이었다.

    "재밌네, 재밌어. 젊은 놈들이 이렇게 치고 올라와야 아재들이 살맛이 나지."

    풍 선생은 껄껄 웃었다.

    재능 많고 의욕적인 어린 새싹들을 골탕 먹이는 게 재미있다.

    그리고, 그런 후학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또한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양반도 나 굴려 먹을 때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스파르타식 환경.

    조금만 실수해도 불호령이 떨어지던 시절.

    자신을 노려보던 서슬 퍼런 눈빛을 떠올리면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었다.

    "으, 떠올리기도 싫다. 망할 영감탱이.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으려나."

    생각만 해도 슬금슬금 오한이 드는 듯, 풍 선생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서퍼들(1)

    2주 차.

    나의 봉합 실력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스윽―

    사악―

    내가 원하는 위치에, 정확한 각도로.

    니들홀더로 니들(needle, 바늘)을 잡고 귤껍질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양손의 힘 조절을 세밀하게 하여 매듭을 만든다.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그나마 고무적인 사실이 있다.

    바로 니들홀더가 조금씩 손에 붙기 시작한다는 것.

    이제는 제법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좋았어!’

    나는 완성된 귤껍질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첫날보다 훨씬 나아졌다.

    ‘이 정도면 풍 선생님도 합격 점수를 주겠는데?’

    그리고, 한편.

    근욱이도 나름대로 괴상한 특훈을 하는 중이었다.

    아침 교대 시간이 될 때마다 스테이션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너희 뭐 해?"

    "근욱 오빠가 여자랑 눈 마주치는 특훈이요."

    "뭐?"

    별걸 다 하네.

    연서와 소담이는 근욱이를 의자에 앉혀 놓고 아이컨택트를 하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야?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흡……!"

    근욱이는 비장하게 눈에 힘을 주고 두 사람을 쳐다본다.

    그런데, 3초를 버티지 못했다.

    금방 고개를 푹 숙이고 귀까지 빨개진다.

    그러자 연서가 빵 터지며 웃는다.

    "푸하하, 여자랑 눈 마주치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응. 정자세 버피 200회보다 더 힘들어."

    "아, 진짜 웃겨."

    연서가 깔깔댄다.

    소담이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야. 연서는 예쁘니까 그렇다 쳐도, 일반인 외모인 나랑은 왜 눈을 못 마주치냐?"

    "아니야. 너도 가만 보면 귀엽단 말야."

    "뭐?"

    근욱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에, 이번에는 소담이의 귀가 빨개질 차례였다.

    "뭐래. 죽어라."

    퍽.

    소담이가 근욱이의 다리에 킥을 날렸다.

    저러다 두 사람 정들겠네.

    나는 피식 웃고 말했다.

    "야, 얼른 인계나 마저 끝내자. 너희 안 졸리냐? 빨리 환자 인계 끝내고 가서 잠이나 자."

    그렇게 생각하며 차트를 확인하러 스테이션으로 향하는데, 연서가 갑자기 내 옷깃을 붙잡더니 말한다.

    "잠도 깰 겸, 저랑 내기 한 판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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