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06화 (106/241)

#106 여름 바다의 기연(9)

"신성한 응급실에서 누가 또 난동질이야?"

풍 선생님 전용 대사다.

마치 프로레슬러가 무대에 등장할 때 테마곡과 함께 등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두둥!

곡담 응급실의 수호자.

히어로가 등장했다.

곧 어디서 본 듯한 광경이 다시 한번 펼쳐진다.

"당신은 뭐야?"

"나 보다시피 의사인데. 그러는 댁은 뉘슈?"

"나 이런 사람이야!"

훌러덩~

환자가 티셔츠를 벗으며 상체를 깐다.

우와…….

이번엔 용이네?

울퉁불퉁한 살집 위로 용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이 꿈틀거리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풍 선생이 겁을 먹을 리 없었다.

"오~ 청룡파 출신인가 봐?"

"그렇다면 어쩔래?"

"오랜만에 용 문신 보니까 옛날 생각 새록새록 나네."

"뭐?"

"청룡파 이순철. 그 밑에 개눈깔 주태진이. 오함마 강도원이. 다 나랑 친한 사이인데."

"헉……."

용 문신을 한 환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기가 막혔다.

저 사람은 무슨 아는 조폭이 저렇게 많아?

"10년 전이었나? 이순철이 한밤중에 습격당해서 온몸이 불탄 채로 실려 왔을 때 요단강에서 건져 낸 게 나야, 이 사람아."

"……."

"그때 그 양반들 지금도 전화 한 통화면 형님, 형님 하면서 나한테 달려올 텐데…… 기강 좀 잡아 달라고 말해 봐?"

"죄송합니다!"

환자가 풍 선생에게 납작 엎드린다.

패턴이 저번과 똑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호파가 아니라 청룡파다.

저 사람은 무슨 인맥이 저렇게 많아?

"저…… 선생님은 아는 조폭이 왜 그렇게 많으세요?"

환자가 사라진 뒤, 근욱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도 궁금했다.

한때 어둠의 세계에서 일하다 오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풍 선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뻥이지, 인마."

"예?"

우리는 놀란 눈으로 풍 선생님을 쳐다봤다.

"설마 내가 그런 사람들을 진짜로 다 알겠냐? 그냥 그럴싸하게 겁만 준 거야."

뭐야. 허풍이었다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디테일이 좋았는데.

근욱이가 놀란 듯 물었다.

"그러다가 거짓말인 거 들통나면 어쩌시려구요?"

"야, 어차피 저 사람들도 진짜 청룡파 백호파 조폭들 아니야. 그냥 몸에 문신 새기고 허세 부리는 동네 깡패들이거든."

풍 선생은 그렇게 말한 뒤 껄껄 웃더니 말을 이었다.

"뭐, 구라 치다 걸려서 배에 칼 맞으면 어때? 까짓것 내가 응급실 의사인데 내가 소독하고 꿰매고 치료하면 되지."

며칠 후.

나는 응급실 준비실 구석에 돌아다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 책에서 풍 선생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조폭들 이름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주먹의 역사 ―곡담 편―>

‘진짜 허풍쟁이셨네.’

나는 픽 웃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담력과 순발력에 감탄하게 된다.

하여간 내가 인턴이 된 후 만나 본 가장 재미있는 의사 선생님이었다.

* * *

그렇다고 그의 모든 말이 허풍인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선생님……."

젊은 여자 환자가 저녁 8시쯤 응급실로 내원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콧등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떨어지는 피를 손수건으로 받아 내는데 피가 흥건했다.

"어디가 아프……."

이번 신환은 근욱이 차례였다.

스테이션에서 차트를 쓰고 있던 근욱이가 환자에게 달려갔다.

그러다가, 조건반사적으로 헤벌레 하고 환자를 쳐다보았다.

환자는 젊은 여성으로, 수영복 위에 얇게 비쳐 보이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몸 군데군데 모래가 묻어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바로 달려온 모양이다.

"이…… 어…… 이쪽으로 오세요!"

근욱이가 정신을 못 차리다가 고개를 흔들고 본분을 되찾았다.

그러더니 손짓 발짓으로 나에게 구조 신호를 보낸다.

왜 저렇게 당황해?

나는 내가 맡고 있던 환자의 드레싱을 마무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근욱이가 귓속말을 속삭였다.

"야, 선한아. 저 환자 네가 좀 봐주라."

"뭐?"

"나 초면에 예쁜 여자 보면 긴장해서 말 더듬는 병 있어. 막 손도 떨릴 거 같단 말이야."

얼씨구?

하여튼 웃기는 녀석이다.

나는 엘보우로 근욱이의 몸을 퍽 하고 쥐어박은 뒤 환자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응급실 의사 신선한 입니다. 이마를 어떻게 다치셨어요? 다른 곳 통증이 있거나 다친 곳은 없으신 거예요?"

나는 환자에게 응급실에 방문하게 된 이유를 차분하게 질문했다.

그러자 이마를 누르고 있던 환자의 입이 열렸다.

"해수욕장에서 놀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파라솔이, 넘어져서, 이마에, 으흑, 막 피가 너무 많이 나서, 으흐흑……."

환자가 말을 하다 말고 울음을 터트린다.

사고를 당한 뒤 놀랐던 것이 갑자기 한꺼번에 터지는 모양이다.

나는 침착하게 환자를 다독였다.

"환자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저희가 잘 치료해 드릴 테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울먹이는 여자를 침상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베드에 앉혀서 상처를 살펴보았다.

이마의 래서레이션(laceration, 열상).

약 4cm 정도의 길이였다.

일단은 생리식염수(normal saline 0.9%)로 이리게이션(irrigation, 세척) 한 뒤 깊이를 살펴보았다.

깊이에 따라서 봉합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찢어진 깊이가 봉합(suture)이 필요해 보이네요."

나는 상처를 살펴보고 환자에게 말했다.

봉합이라는 말에 환자가 지레 겁을 먹었다.

"봉합이요……? 어뜩해요. 이마에 흉터 남는 거예요? 나중에 해리포터라고 놀림받으면 어떡해요? 흑흑……."

그리 심각한 상처는 아니라 해도, 얼굴에 상처가 난 것이니 환자 본인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거기다 이마 정중앙에 가까운 부위이니, 흉터가 남을까 얼마나 걱정이 될까.

"잠시만요. 일단 소독부터 해 드릴게요."

나는 환자의 이마를 소독했다.

그때 나의 등 뒤에서 풍 선생이 슥 하고 나타났다.

"쯧쯧. 고운 얼굴에 상처가 났구만."

그러자 여자 환자가 울상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선생님, 이거 꼭 꿰매야 되는 거예요?"

"당연하죠."

"어떡해…… 흉터 안 남게 잘 꿰매 주세요……."

"마침 운이 좋으시네. 사실 내가 일 년에 오십 번씩 강남 성형외과에서 스카우트하러 찾아오는 의사거든."

"정말요?"

"그럼, 그럼."

아이고.

또 허풍 시작이다.

세상에 그런 의사가 어딨어요?

그렇게 또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떨던 풍 선생은 갑자기 나를 툭 쳤다.

"야, 똘똘이!"

"예?"

똘똘이란, 나를 부르는 새로운 호칭이었다.

나는 똘똘이.

근욱이는 덩치.

소담이는 꼬맹이.

연서는 아이돌.

그렇게 부르기로 한 모양이었고, 우리도 그 호칭에 어느덧 익숙해져 있었다.

"이리 따라와. 내 옆에서 커팅 좀 하자."

커팅(cutting, 봉합사를 가위로 자르는 것).

한 명이 상처를 봉합하면서 매듭을 만들면, 맞은편에서 어시스트(assist, 보조)하는 의사가 가위로 실을 잘라 주어야 하는데 이를 커팅이라고 한다.

이때 적절한 길이로 커팅을 하는 것은 물론, 가위질을 하다가 실수로 피부에 상처를 입히거나 하면 안 된다.

간단해 보이지만 초심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며, 인턴들이 수술장에서 자주 혼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수처 보조 해 봤지?"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국대 응급실 인턴을 돌 때에도 성형외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수처하는 것을 도와드렸던 경험이 있었다.

"컴 온."

그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한편 옆에서 근욱이가 내심 아쉬운지 내 쪽을 쳐다보았다.

대화는 못 해도 어시스트 서면서 가위질은 할 수 있다는 눈빛이었다.

말도 못 거는 주제에, 이 여자 환자와 어떻게든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눈빛을 통해 전해졌다.

‘하여튼 저것도 가만 보면 웃기는 놈이야.’

나는 수처(suture, 봉합) 어시스트를 하기 위해 장풍 선생을 따라갔다.

곧, 장풍 선생은 처치실에서 간호사에서 이것저것 준비를 시켰다.

"7―0 나일론(Nylon) 준비해 주세요."

7―0 나일론?

나는 놀란 눈으로 풍 선생을 쳐다보았다.

나일론.

봉합할 때 쓰이는 실의 이름이다.

맨 앞에 붙는 숫자는 실의 굵기를 나타내게 된다.

숫자가 커질수록 실의 굵기는 얇아진다. 그리고 실이 얇아질수록 봉합은 세밀함을 요구하며 더 능숙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7―0 나일론이라니. 그렇게 얇은 실을 쓴다고?’

나는 지금까지 응급실에서 7―0 정도의 얇은 실을 쓰는 경우를 본적이 없었다.

내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더니 장풍 선생은 씩 웃으며 말했다.

"왜? 뭘 놀라는 눈치냐. 옛날에는 8―0 밥 먹듯이 쓰던 시절도 있었어, 인마."

정말일까?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왠지 신빙성이 없단 말이지.

나는 봉합할 수 있게 환자를 눕히고 준비를 하며 생각했다.

‘7―0, 8―0이라.’

8―0 실을 정교하게 쓰려면 루페(surgical loupe, 수술용 확대경)까지 쓰고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나는 응급실에서 확대경까지 사용해서 봉합을 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풍 선생님의 말에 믿음이 안 가는 건 당연한 생각이었다.

환자는 처치실에 눕혀졌다.

그리고 소독약이 발라진 채, 상처가 있는 이마만 노출이 되었고 얼굴은 방포로 덮였다.

나는 이마를 향해 시술용 라이트 조명을 맞췄다.

곧, 장갑을 낀 풍 선생님은 리도카인(lidocaine, 국소 마취약)을 주사하기 시작했다.

"자, 이거 마취 주사인데 조금 아플 수도 있어요. 이것만 끝나면 이제 하나도 안 아픕니다."

그렇게 풍 선생님의 봉합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는 일이 일어났다.

"허잇짜!"

짜악!

풍 선생이 갑자기 손바닥을 마주친다.

수술용 장갑에 묻어 있던 파우더가 살짝 들썩였다.

손바닥이 마주쳐 만들어 내는 소리에, 방포로 얼굴이 덮인 채 귀만 열려 있던 환자가 화들짝 놀랐다.

긴장하고 있던 환자의 몸 전체가 들썩일 정도였다.

"왜, 왜 그러세요?"

"아, 잠시 기 좀 모으느라."

기를 모으다니?

역시 장풍 선생님.

이름값 한다.

하긴 운동선수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경기 전에 반드시 껌을 씹어야 한다거나, 마운드를 세 번 밟고 공을 던져야 한다거나.

외과의사들 중에서도 꼭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고 수술을 해야 집중이 잘되는 의사도 있다고 들었다.

장풍 선생의 경우, 기를 모으는 듯한 제스처가 그런 징크스에 해당되는 모양이었다.

"자. 기를 모았으니 이제 집중력 풀 파워입니다. 걱정 하덜 마세요."

"으으……."

환자의 목소리가 불안한 듯 떨린다.

내가 환자여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니들홀더를 쥔 장풍 선생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맞은편에 서서 그를 도왔다.

실이 시야를 방해하지 않도록 잡아 주면서 가위를 들고 봉합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의 술기를 지켜보던 나의 눈이 커졌다.

‘뭐야, 왜 저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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