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여름 바다의 기연(7)
장풍 선생님이었다.
마침 퇴근 중에 우리를 마주친 모양이다.
흰 가운을 벗고 사복 차림이니 한층 더 인상이 강렬해 보인다.
"뭐 먹었냐?"
"개불 시장에서 밀면에 만두 먹고 왔습니다."
그러자 풍 선생이 혀를 차며 대답한다.
"쯧쯧, 이래서 곡담 뉴비들은 안 된다니까. 나중에 내가 진짜 맛집 알려 줄게."
"엇, 정말요? 감사합니다!"
"내가 인마 한때는 미식가가 꿈이었어요. 미식가 자격증까지 있는 사람이야."
정말일까?
아니, 그 전에 미식가 자격증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첫날은 원래 과메기에 소주 인당 10병은 까 줘야 남자지. 안 그래?"
소주 10병?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과장이 너무 심하다.
그런데 장풍 선생은 자기가 한 말에 별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
유유자적하게 휘파람을 불며, 멀리서도 눈에 띄는 오토바이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저건 할리데이비슨이잖아?’
와…….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다.
저걸 한국에서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옛날 할리우드 영화에서만 보던, 투박하고 마초적인 바디가 눈에 띈다.
딱 봐도 왠지 미국 서부 1번 국도에 있어야 될 것 같은데, 곡담시에서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게 선생님 바이크예요?"
근욱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러자 풍 선생이 씩 웃으며 말했다.
"멋있냐? 내가 이래 봬도 한국 아마추어 레이스 3년 연속 금메달 석권한 사람이야."
"우와……."
근욱이가 감탄한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일까?
그냥 아무 말이나 막 던져 보는 스타일인 것 같다.
혹시 이 사람의 본명은 장풍이 아니라 허풍이 아닐까?
"그럼 수고해라!"
부르릉!
풍 선생은 바이크를 타고 사라졌다.
굉음이 울려 퍼지고, 그의 실루엣은 거리 너머로 사라졌다.
보통 의사라 하면 떠올리는 보편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야…… 뭔가 멋있지 않냐? 왠지 선생님이나 과장님이 아니라 형님이라고 불러야 될 거 같기도 하고."
근욱이가 감탄하며 말했다.
풍 선생의 마초적인 이미지에 반해 버린 듯했다.
한편, 그동안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얼굴,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디서 봤지?
이목구비와 목소리가 왠지 익숙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래?"
"생각해 보니까 풍 선생님, 낯이 좀 익지 않아?"
그러자 근욱이는 픽 웃었다.
"야. 저렇게 특이한 외모면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의사인데 수염에 질끈 묶은 장발이라니. 나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그런가."
나는 뺨을 긁적였다.
착각이겠지?
하긴, 내가 저런 사람을 어디서 봤겠어.
나는 머릿속에 잠깐 떠올랐던 물음표를 지웠다.
우리는 숙소에 들어와 씻고, 내일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
* * *
<곡담제일병원>.
지역 거점 병원에 속하는 곳이다.
즉, 곡담에서 응급 중환자가 발생하면 여기로 오게 되는데, 여기서 해결하지 못하면 근처 대도시의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
다음 날 아침 7시.
우리는 셔츠에 곡담제일병원 가운을 걸쳤다.
응급실 첫 출근이다.
곧 우리를 반겨 주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달에 새로 오신 선생님 맞죠?"
"예."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서울서 오시느라 고생하셨네. 반가워요!"
나이가 지긋한 간호사 선생님 두 분이 우리를 둘러싸고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진한 사투리가 살갑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번 달 인턴 총각들은 둘 다 신수가 어쩜 이렇게 훤하대?"
"정말."
"어머, 어머. 우리 인턴 선생님 듬직하신 거 봐."
특히 근욱이가 인기가 많았다.
그렇게 환영을 받고 있는데, 흰 가운을 입은 응급의학과 과장 선생님이 지나갔다.
"과장님, 이번 달 인턴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래. 한 달 동안 사고 치지 말고."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는 우리에게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긴, 이게 보통이지.
아무리 곡담이라도 장풍 선생님처럼 성격이 특이한 사람들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어디 보자…… 의료팀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인가?’
간호사 2명.
응급 구조사 2명.
과장 1명.
그리고 나와 근욱이.
응급실을 책임져야 할 인력의 전부였다.
이러니 1인분의 의사로서의 역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총 12개의 베드.
우리가 앞으로 책임져야 할 병상이다.
그중에서 반 정도는 이미 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지잉―
그때, 우리가 담당해야 할 새로운 환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 환자네."
"누가 먼저 볼래?"
"가위 바위 보?"
"됐다. 내가 갈란다."
나는 슬쩍 주먹을 내미는 근욱이를 손바닥으로 툭 친 뒤 환자에게로 향했다.
첫 환자.
30대 남성.
나뭇가지처럼 마른 체형이다.
통증이 심한 듯, 거의 기어 오다시피 하며 걸어오고 있다.
뒤따라온 119 이송원이 나에게 말했다.
"앱도미널 페인(abdominal pain, 복부 통증) 2시간째 지속 중이라고 합니다."
"이쪽 베드로 오실게요."
나는 구조원에게 간략한 설명을 듣고 환자를 안내했다.
여기 곡담에는 나를 도와줄 레지던트, 교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응급실 과장 한 분이 상주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거나 최종 확인(confirm) 받을 때 도움을 요청할 뿐, 처음부터 도와주지는 않는다.
즉 연국대병원이 온실 속이었다면, 곡담제일병원은 말 그대로 야생.
의사 신선한으로서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었다.
‘내 판단력으로만 환자의 진단을 내려야 해. 내가 놓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임하자.’
<응급실 초진>.
말 그대로, 응급실을 방문한 처음 보는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뜻한다.
이 과정은 마치 스무고개와 비슷하다.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선택지를 빈틈없이 좁혀 가며 정답을 맞혀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헛다리를 짚으면?
큰일이 일어난다.
가령, 심근경색 환자를 단순한 흉통으로 생각하고 진통제만 쥐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생각해 보자.
환자는 응급실에서 집으로 돌아간 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망할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의사가 엉뚱한 판단을 내려서 이상한 치료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이렇게 한번 잘못된 길로 들어선 환자는 초기에 완치될 기회를 놓치고 한참을 고생한 후에야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니 응급실에서 초진을 보는 의사들은 책임감이 막중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요. 으허헝……."
환자는 배를 부여잡고 호소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복통이라…….
응급실에서 가장 흔한(m/c, most common) 증상 중 하나다.
곧 내 머릿속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위염?
맹장염?
장 폐색증?
천공?
심지어 암까지.
생각해 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너무나도 많다.
즉,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나 마찬가지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
"헉헉, 아랫배가, 꼬이는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 장이 좀 안 좋아서 그런가…… 어제 떡볶이랑 불닭볶음면을 같이 먹긴 했는데, 그래서 장염에 걸렸나 봐요."
그렇게 말하며 숨을 헐떡인다.
장염?
환자는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나는 여봉철 선생의 조언을 떠올렸다.
<응급실에서 젤 중요한 게 뭔 줄 아나? 환자가 하는 말을 일단 의심하고 들어 보는 거야. 다 믿으면 안 돼.>
그리고 송유주 선생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내가 다른 사람 말을 믿을 것 같냐? 난 내가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
즉, 의사는 타인의 말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물론, 그게 환자 본인의 의견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렇게 환자의 CC(chief complain, 주요 호소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일단 수액이랑 진통제부터 놔 드릴게요. 설사나 구토는 없었어요?"
나는 몇 가지 처방을 내렸다.
곧 응급 구조사가 환자의 팔에 고무 끈을 묶었고, 금세 혈관에 라인을 잡았다.
그러고는 바로 수액 라인을 통해 진통제가 들어가 환자의 통증을 덜어 주었다.
이에 앞서 환자가 응급실에 들어오자마자 혈압과 체온 등 기본적인 바이탈(vital sign, 활력 징후) 체크는 이루어졌었다.
다행히 환자는 열도 없고, 바이탈은 정상이었다.
슥슥―
나는 환자의 차트에 내 이름을 사인했다.
<이제부터 이 환자는 의사 신선한의 책임>이라고 선언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기본부터 시작하자.’
환자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들.
히스토리(History taking).
신체검사(Physical examination).
나는 누워 있는 환자의 무릎을 살짝 굽힌 뒤, 배에 여러 군데를 누르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환자분. 여기가 아프세요?"
"으으, 잘 모르겠어요."
RLQ(Right lower quadrant, 우하복부)에 국한된 통증이 아니었고, 머슬 가딩(muscle guarding, 근성방어)도 거의 없었다.
‘일단 맹장염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머릿속에서 가능성을 한 가지씩 지워 나갔다.
"잠시만 앉아 보실게요."
그리고 나는 환자의 아래쪽 등을 좌우 한 번씩 두드려 봤다.
"으악―!"
등 아래쪽을 두드리자 환자는 더 심한 통증을 나타냈다.
이때,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30세 이상의 남성?
간헐적으로 아랫배를 찌르는 듯한 급작스러운 통증?
거기에 등 쪽 갈비뼈 척추 쪽을 두드렸을 때 심한 통증!
한 가지 가능성이 유력하게 의심된다.
"최근에 소변봤던 거 기억나요? 혹시 색깔이 좀 특이하거나 그렇지는 않았어요?"
"글쎄요…… 소변 색깔이 좀 진했었나?"
내 머릿속의 스무고개는 이미 끝나 있었다.
‘어디 보자…… 낮에는 영상판독이 30분이면 가능하다고 했었지?’
나는 환자에게 말했다.
"환자분, 옷 갈아입고 복부 CT검사 한번 해 보실게요. 그리고 소변검사도요."
"예에? 아니…… 장염인데 왜 그런 검사를 해야 하죠?"
환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는 병원 내 시스템을 통해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Abdomen― Pelvis CT]
1. 4mm sized Lt. mid ureter stone with hydronephrosis.
2. A few calyceal stones in both kidneys.
‘빙고.’ 내 예상이 맞았다.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검사 결과를 확인한 뒤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응급실 과장은 내 말을 듣더니 되물었다.
"결석?"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변 검사에서 혈뇨가 나왔고, 복부 CT에서도 요관에 돌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어디 보자."
딸깍, 딸깍.
과장은 모니터를 확인했다.
잠시 후, 화면을 보던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