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03화 (103/241)
  • #103 여름 바다의 기연(6)

    곡담제일병원의 숙소.

    앞으로 우리가 한 달간 생활해야 할 공간이다.

    처음 응급실의 인상이 다소 허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는 한술 더 뜬다.

    "이야, 대박이다."

    "여기 못해도 삼십 년은 된 것 같은데?"

    "저 약간 시간여행 하는 기분이에요! 타임머신 타고 온 것 같기도 하고……?"

    연서는 아까부터 신이 나 있다.

    곧 우리는 둘씩 짝을 이루어 배정된 방으로 흩어졌다.

    당연히 근욱이와 내가 한방을 쓰게 되었다.

    딸깍―

    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이 켜졌다.

    곧 오래되어 해진 듯한 가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근욱이가 구식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기가 찬 듯 말했다.

    "방도 엄청 낡았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적어도 관리는 잘돼 있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불과 1년 전.

    반쯤 폐허나 다름없는 공간에서 의대생 시절을 보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 환경에 비하면 이 정도는 감지덕지다.

    그리고 직원분이 전달해 준 의사복과 가운은 충분히 깨끗했다.

    "영 불안한데. 자다가 침대 무너지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며 근욱이가 이층 침대를 누르자, 프레임에서 삐걱거리는 불안한 소리가 났다.

    "헉, 봐 봐! 삐걱거리잖아."

    "……네 힘으로 누르면 멀쩡한 침대도 삐걱대, 근욱아."

    "아냐, 선한이 네가 2층으로 올라가! 나는 친구를 자다가 엉덩이로 압사시키고 싶지 않다."

    근욱이는 불안한 듯 나를 위층으로 올려 보냈다.

    나는 대충 짐을 푼 뒤 방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간 몇 년 동안이나 연국대에서 파견 온 인턴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해 왔을까?

    방 구석구석에는 이미 왔다 간 인턴들의 흔적이 많았다.

    연국대병원에서 몰래 가져온 듯한 당직복들이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여기 병원에서 나눠 주는 옷이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다들 연국대에서 당직복을 가져왔나 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숙소 방을 둘러보다가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근욱아. 여기 뭐가 막 적혀 있는데?"

    "어디?"

    "방문 앞에."

    우리는 한 곳을 쳐다보았다.

    방문에는 무언가가 적혀 있는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게임의 던전 맵을 그려 놓은 것 같은 병원 지도.

    응급실 내 각 물품의 위치들.

    곡담시 맛집 이름과 번호.

    근처 배달음식점 리스트.

    병원 생활 주의점.

    등등.

    그간 인턴들이 남긴 팁(tip)들이 몇 겹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특히 인상 깊은 문구들도 있었다.

    <웰컴 투 헬>

    <문신 환자 주의할 것, 호랑이가 용보다 더 무섭.>

    <케바케. 내가 봤던 용 문신 환자는 겁나 무서웠음 ㅎㄷㄷ>

    마지막 문장은 무슨 다잉 메시지 같다.

    "선한아. 이거 그거 같지 않냐? 방탈출 게임."

    "방탈출?"

    "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단서들을 남긴 거지."

    "그럴싸한데?"

    근욱이와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연서의 얼굴이 나타났다.

    "짐 풀었으면 나갑시다!"

    깜짝이야.

    연서는 산책 가기 직전의 강아지처럼 신난 표정이다.

    소담이가 그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 목조건물이라 소리 다 들려. 너네 목소리 건너편에 우리 방까지 들리더라."

    아무래도 작은 병원이다 보니 숙소의 규모가 아담하다.

    남녀 숙소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연국대병원과는 또 다른 환경이었다.

    "첫날이니까 밖에서 먹어야죠! 곡담 시내 구경 좀 해 봅시다."

    "그래, 내일부터 24시간씩 근무하면 오프 날에는 잠만 자다가 끝날지도 몰라."

    "어디서 먹을까?"

    "저만 믿어요. 제가 맛집 다 알아 놨다고 했죠? 갑시다!"

    연서가 신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 * *

    우리는 택시를 타고 곡담 시내로 향했다.

    다행히 이번 기사분은 신사적이고 친절했다.

    하지만, 롤러코스터를 연상시키는 운전 습관은 똑같았다.

    택시에서 내린 뒤, 소담이가 어지러운 표정으로 내 옷깃을 붙잡고 말했다.

    "나 진짜 다시는 이 동네에서 택시 안 탈 거야."

    "버스는 더 난폭하다는데?"

    "그게 가능해?"

    "승객 타자마자 문 닫히기도 전에 출발한대. 바로 손잡이 못 잡으면 뒷좌석까지 다이렉트로 날아간다더라."

    내 말에 소담이의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

    앞으로 곡담에서 생활하려면 이 속도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덕분에 빨리 도착해서 좋죠. 이 근처에 방송에 나왔던 밀면집이 있대요!"

    연서가 신나게 앞장서서 길을 찾는 동안,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곡담의 시내는 분위기가 독특했다.

    철물점, 슈퍼마켓, 사진관 같은 오래된 가게 간판들.

    그리고 그런 가게들 사이에 생뚱맞게 가끔씩 튀어나오는 세련된 카페들.

    야시장 점포.

    그라피티 벽화.

    지자체에서 만든 구조물들.

    등등.

    여러 가지 재료들을 한 대야에 집어넣고 섞어 버린 비빔밥 같은 거리였다.

    그리고 가로등 사이로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곡담해수욕장 축제기간]

    시간: 8월 15일 ~ 17일

    "우와, 축제!"

    "재밌겠다!"

    "마지막 날에 불꽃놀이도 한대요."

    "우리도 갈 수 있을걸? 중간에 하루는 넷이서 같이 통으로 오프(off)로 빠질 수 있잖아."

    "그래, 우리도 다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가자!"

    근욱이가 신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근데 저기 그라피티, 아까 역에서 본 거랑 똑같은 거 아냐?"

    "어, 진짜다!"

    "사진 찍자!"

    여행지에 온 기분이다.

    곡담 시내는 곳곳을 탐방하는 재미가 있었다.

    연서는 브이로그 카메라를 꺼내 이곳저곳을 촬영했고, 곧 우리는 음식점에 도착했다.

    "어머니, 밀면 4개랑 손만두 2판 주세요!"

    연서가 주문하자 근욱이가 주문을 더한다.

    "사리 2개 추가요!"

    "혼자 사리 2개? 돼지야!"

    "아니, 선한이도 사리 필요할걸? 그치?"

    소담이와 근욱이가 투닥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밀면은 금세 우리 테이블에 올려졌다.

    "맛있겠다!"

    근욱이가 젓가락을 들자 연서가 잽싸게 근욱이를 막는다.

    "어헛. 사진 찍고 드시라구욧!"

    연서가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말했다.

    "내일 근무는 나랑 근욱이랑 하기로 한 거 맞지?"

    곡담제일병원 파견.

    내일 아침부터 2명 / 2명으로 나뉘어 24시간 교대로 응급실에서 근무하게 된다.

    짝숫날 근무: 선한 + 근욱

    홀숫날 근무: 소담 + 연서

    그리고 그달의 중간과 마지막에 이틀간의 오프(off, 비번)가 4명 인턴 모두에게 주어지게 된다.

    월말에 있는 오프에는 인턴 교대가 이루어지게 되고, 중간에 있는 오프에는 인턴들끼리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당장 내일부터 시작되는 근무는 나와 근욱이가 먼저 시작하기로 했다.

    "내일부터 24시간 근무 괜찮겠어요? 피곤할 것 같은데."

    "상관없어. 있다 좀 일찍 잠들면 되지 뭐."

    "근데 아까 그 택시 아저씨 환자는 어떻게 됐대?"

    "아까 나오기 전에 슬쩍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브레인(Brain, 뇌) CT 포함해서 검사 결과 다 괜찮았대요."

    "다행이네."

    "그러게. 아줌마 여기 사리 하나만 주세요~"

    벌써 한 그릇에 사리까지 뚝딱한 근욱이는 사리를 추가 주문한다.

    그때, 연서가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 우리 첫날부터 환자 이송하면서 병원에 도착한 거잖아요."

    "그렇지."

    "응급실 과장님한테 환자 던지면서 첫인사한 거 역대급 사건 아닙니까? 이거 도대체 누구 내공임?"

    연서가 범인을 수색하는 듯한 제스처로 우리를 가리켰다.

    내공(內功).

    무협지에 나올 법한 단어다.

    하지만 전국의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장난스러운 표현이기도 하다.

    가는 곳마다 환자가 몰리거나, 유난히 빡센 환자를 맡게 되는 등 운이 좋지 않은 경우 ‘내공이 안 좋다’고 표현한다.

    그때 근욱이가 국물을 들이켠 뒤 나를 가리켰다.

    "당연히 선한이지. 얘 가는 곳마다 이상하게 환자 꼬이는 거 모르냐?"

    "그래요?"

    "응. 얘 완전 환자 자석이야, 자석."

    근욱이가 목소리를 스산하게 깔며 말을 이었다.

    "각오해라. 우린 이제 소년 만화에 나오는 탐정 캐릭터랑 별장에 놀러 온 거나 다름없다고."

    탐정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가는 곳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근욱이는 내가 그런 캐릭터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긴, 그동안 전적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해요."

    "그러게. 범인이 선한이였네."

    근욱이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너희 내공 보존의 법칙 몰라? 나처럼 미리 내공이 폭발하면 뒤로 갈수록 편하대."

    "믿어도 됩니까?"

    "두고 봐, 이번 달 아주 편안한 한 달이 될 거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내심 다르게 생각했다.

    편한 인턴생활?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인턴 1년 동안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고 싶다.

    ‘이번 달에도 미래가 보이는 사건이 생기려나?’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곡담에서의 첫날 저녁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저녁 7시 반.

    나와 근욱이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24시간의 근무를 위해 병원으로 돌아갔다.

    연서와 소담이는 좀 더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둘, 둘 나뉘어 이동했다.

    우리가 도착할 때쯤, 병원 주차장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캬~ 하늘 색깔 봐라. 분홍색과 주황색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거 봐 봐. 구름은 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쁘냐!"

    근욱이가 갑자기 감성적인 멘트를 내뱉는다.

    나도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해가 지고 있는 노을 쪽을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바라보는 하늘과는 또 다른 운치가 느껴지는 노을이었다.

    그때.

    처억―

    근욱이가 갑자기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선한아. 화무십일홍이라는 표현 알고 있니?"

    갑자기 웬 한자성어?

    저번에 봄에 벚꽃을 보면서도 그러더니…….

    근욱이 얘는 가끔 아재 같은 감성을 내뿜을 때가 있다.

    "제아무리 붉은 꽃도 십 일을 못 간다, 뭐 그런 뜻 아냐?"

    "그렇지."

    근욱이는 갑자기 스윗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의 청춘도 그런 것 아니겠니?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덧없는 것…… 나는 너와 곡담에서 함께 2인 1조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청춘을 지내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한단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갑자기 혓바닥이 길다.

    이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과도하게 달라붙는 근욱이의 두꺼운 팔을 밀어내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라니? 난 그냥 소중한 친구와의 우정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뻘소리 하지 말고."

    "오프 때 바닷가로 헌팅 한 번만 가자."

    역시.

    아직도 포기 안 했군.

    나는 근욱이의 얼굴을 밀어냈다.

    "혼자 가."

    "선한 형님, 제발!"

    "안 가."

    "에휴. 너는 무슨 돌부처도 아니고, 멀쩡한 얼굴이 아깝다."

    근욱이가 그렇게 투덜대고 있는데, 병원 쪽 방향에서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병아리들. 밥 먹고 오는 길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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