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여름 바다의 기연(2)
"내가 실습했던 병원은 학교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어. 시설이 낙후돼서 반은 공사 중이었고."
나는 내가 실습했던 병원의 풍경을 떠올려 보았다.
베드가 400개.
그중에서 항상 50개 정도만 차 있던 현실.
정말 운이 좋아야 환자를 볼 수 있었다.
만약 운이 좋지 못한 경우?
실습기간 내내 하루 종일 자료만 들여다보고 있어야 했다.
"에이, 그래도 기본적인 실습은 다 하지 않았어? 전국 어딜 가나 환자들은 있기 마련인데."
근욱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얘가 뭘 모르는구나.
나는 어떤 예시를 들어야 와닿을까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가령, 산부인과 실습을 해도 환자 중에 산모가 한 분도 없었어."
"아……."
세 사람은 탄식했다.
그럴 만도 하다.
특히나 산부인과 실습은 환자의 동의가 없이는, 출산 참관과 내진(vaginal examination) 등이 불가능하기에 실습 경험이 쉽지 않다.
일운대 실습 병원같이 환자 수가 적은 병원에서는 실습 경험을 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뭐, 그래도 의미 있는 실습이었어. 교수님들도 열심히 지도해 주려고 노력하셨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당시에는 괴로웠다.
의대생에게 실습 경험은 정말 황금 같은 기회인데, 그걸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험을 못 쌓아서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의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우리가 가는 병원은 그 정도는 아닐 거야. 곡담은 큰 도시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그때, 마침 연서가 창밖을 가리켰다.
"오, 저기 봐요!"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새 수도권에서 벗어나며 논밭들이 펼쳐지고, 아침 햇살이 반듯한 수로에 부딪혀 빛나는 것이 보였다.
"야아, 날씨도 좋고, 경치도 이쁘네요."
"그러게. 인턴 시작하고 나서 이렇게 여유로웠던 적이 얼마 만이냐!"
그렇게 우리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신나게 나누었다.
한 시간 후.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보니 모두들 피곤한지 눈을 감았다.
소담이가 꾸벅꾸벅 존다.
근욱이는 아예 코까지 골면서 잠들었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졸음이 쏟아졌다.
커튼으로 가려지지 못한 창문 틈으로는 햇살이 얇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햇살은 반대편에 앉은 연서의 어깨에서부터 내 발끝을 향해 떨어졌다.
햇살이 가는 길을 눈으로 따라가다,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덜컹, 덜컹―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얼핏 잠에서 깼는데, 누군가가 날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눈을 살며시 떠 보았다.
그리고 나를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연서와 눈이 마주쳤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냥 구경하고 있었는데요."
"뭘?"
"선한 오빠, 자는 모습이 애기 같구나 싶어서."
연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는 머쓱히 입가를 닦았다.
연서는 이렇게 가끔 생뚱맞은 말을 꺼내서 나를 당황시킬 때가 있었다.
옆에서 근욱이와 소담이는 아직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3월에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내과 돌 때?"
첫 인턴생활.
나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다.
그때 연서가 연국대병원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을 도와주었던 기억이 난다.
"저랑 이렇게 친해질 줄 몰랐죠?"
"그랬지. 심지어 이렇게 스케줄이 또 우연히 겹치게 될 줄도 몰랐어."
100명이 넘는 인턴들 중에서 스케줄이 두 번 이상 겹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맞아요.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연서가 말했다.
"재밌을 것 같아요. 곡담."
"그러게."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연서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아직도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한동안 흘렀다.
* * *
좁은 좌석에서 등이 배길 때쯤, 우리는 곡담역에 도착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곡담역에 도착합니다. 잊고 내리시는 물건이 없도록―>
"으갸갸갹."
근욱이는 요란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챙겨 역 바깥으로 나왔다.
곧 여행객을 환영해 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열정의 도시! 곡담시에 어서 오세요!>
간판은 오래되어 색이 바랬다.
그리고 누구의 장난인지, ‘곡’ 자의 기역 받침이 지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간판이 올려져 있는 외벽을 따라서 각종 그라피티가 요란하게 그려져 있었다.
‘대한민국에 이런 도시가 있었다니…….’
흡사 그라피티 거리로 유명한 뉴욕의 거리를 보는 듯했다.
예술과 열정의 도시라고 알려져 있는 곡담의 수식어답게, 이 도시의 첫인상은 꽤 터프했다.
"여기가 곡담이구나."
외벽에서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자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탁 트인 풍경이었다.
아파트 단지 빼고는 높은 건물이 많지 않다.
지평선이라고 부를 것까지는 아니지만,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저기 곡담역 간판 아래 그라피티가 이 도시 대표적인 핫 스팟이래요. 우리 사진 한번 찍고 가요!"
연서가 어느새 셀카봉을 들고 신이 나서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 왔는데 기념으로 사진 한번 찍자!"
한 손으로는 내 팔을 끌고 다른 손으로는 캐리어를 끌며 근욱이가 동참했다.
찰칵―
고담, 아니 곡담시 간판 아래 그라피티를 배경으로 우리 네 명은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보자 보자. 잘 나왔나?!"
근욱이와 연서는 머리를 맞대고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근욱이보다 머리 하나 아래에서 소담이도 머리를 빼꼼 내밀고 사진을 확인했다.
연서와 근욱이가 뭐가 그리 좋은지 사진을 보고 웃기 바쁘다.
그런데 소담이가 헉하고 놀라더니 입을 연다.
"야, 근데 우리 바로 뒤에 글자들 봐 봐…… CPR이야."
"헉, 뭐라고요?"
"정말이네."
소담이의 말대로였다.
사진 속, 우리 네 명의 얼굴 사이사이로 글자 3개가 명확히 보였다.
C/P/R.
병원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단어.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즉 심폐소생술의 약자였다.
"뭐야 이거 불안하게…… 이번 달 응급실에서 CPR 엄청 터지는 거 아니야?"
우리는 고개를 돌려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는 벽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평화 토끼?
그런 닉네임을 가진 아티스트가 자기 이름을 칠해 놓았다.
하필 우리 머리에 절묘하게 가려져 CPR이라는 글자만 보였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가 막혔다.
"얘들아, 이런 거 뭐라 그러더라?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운 거 같은데."
"복선?"
"그래, 복선 아닐까?"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차라리 심령사진처럼 귀신이 찍힐 것이지, 이건 귀신보다 더 무섭다, 야."
근욱이와 소담이가 주고받는 말에 연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외쳤다.
"에이. 뭐 이런 거 가지고 불안해들 하십니까. 평화의 토끼, 귀엽네요. 자 이제 병원으로 가요~!"
우리는 그렇게 불길한 기분을 지우며 역 바깥으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 근욱이가 여운이 남는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토끼는 곡담이랑 좀 안 어울리기는 하네. 원래 곡담은 용과 호랑이의 도시인데."
"용과 호랑이?"
"청룡파랑 백호파 말이야."
"그게 뭔데요?"
"너희도 몰랐구나. 나도 오기 전에 중원이 형한테 들은 얘긴데, 곡담시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대."
근욱이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십 년 전.
곡담시는 <청룡파>와 <백호파>가 도시를 양분하여 휘어잡고 있었다고 한다.
무자비한 청룡파.
과격한 백호파.
하루가 멀다 하고 시장 한복판에서 피 튀기는 혈투가 일어나는 도시, 곡담!
물론 그건 옛날얘기고, 지금은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곡담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뜨거웠던 혈투의 잔재는 여전히 곡담시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에이. 무슨 조폭 영화도 아니고. 뻥 아니에요?"
"아니 진짜라니까? 듣기로는 아직도 과거에 활약하던 사람들이 무림 고수처럼 숨어 있대!"
나는 근욱이의 말에 피식 웃었다.
예술과 열정의 도시 곡담.
그리고 CPR이라는 글자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우리의 곡담시 파견.
왠지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근데 우리 뭐 타고 이동할까?"
"짐이 많아서 택시 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럴까? 소문으로만 듣던 곡담 택시를 타 보는구나!"
심지어 곡담은 택시도 유명하다.
왜 유명하냐고?
너무 빨라서!
과장 섞인 농담으로, 월미도 바이킹 못지않은 스릴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택시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역 앞의 택시 정류장에 여러 대의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기사들이 몇몇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한 택시 아저씨가 우리와 날카로운 눈을 마주친다.
"어이!"
시라소니 같은 인상이다.
반듯한 콧수염에 희끗한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화려한 색상의 셔츠를 입고 있다.
그는 우리를 발견하더니 바로 담배를 끄고는 달려왔다.
"서울 사람들입니까!"
"예."
"얼굴만 봐도 딱 알죠. 캬캬. 이쪽으로 타십쇼."
나이에 비해 괄괄하고 기운찬 아저씨다.
아직 우리가 타겠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택시 아저씨는 우리의 짐을 트렁크에 싣기 시작했다.
"이 동네 뭐 볼 게 있다고 멀리까지 왔습니까. 시벌, X같은 촌 동네."
말투가 거칠다.
왠지 왕년에 한가락 하셨을 것처럼 생겼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핑크색 셔츠의 소매 사이로 문신이 살짝 보인다.
‘저건…… 호랑이 꼬리?’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팔에 호랑이 문신이라니.
설마 백호파?
어쩌면 근욱이가 말했던 도시 전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하게 되었다.
"어디로들 가십니까?"
"곡담병원이요."
"병원? 아, 뭐 문병이라도 오셨나배?"
"네, 뭐……."
우리는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택시를 잘못 골랐나?
그런 생각을 해 봤지만 이미 늦었다.
곧 우리의 짐은 트렁크에 꽉 차도록 간신히 들어가게 되었다.
"출발합니다. 꽉 잡으쇼~"
부아앙!
아저씨는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우리는 곡담의 운전문화에 얽힌 소문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단지 택시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인데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차멀미가 있는 소담이의 얼굴이 거의 혼절하기 직전의 상태가 된다.
"내비게이션에 25분 찍히는데 15분 안에 끊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그러지 마!
내비게이션이랑 경쟁하지 말라고!
우리는 한마음으로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택시 아저씨는 심지어 운전에 집중도 하지 않으면서 신나게 노래를 튼다.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
"아싸!"
부아앙!
그렇게 우리의 파란만장한 곡담 인턴생활 첫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