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98화 (98/241)

#98 전세 역전(7)

"어디 보자…… 한 5분 뒤에 새로고침 하면 될 것 같네요."

나는 여유롭게 말했다.

허기진 선생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5분 후.

그는 모니터 화면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내 말대로 영상판독 결과가 버젓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허기진 선생은 마치 마술쇼를 보고 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진짜로 엄청 빨리 왔네…… 어떻게 한 거야?"

"그냥 협조요청 문자 하나 보냈어요."

"문자?"

"예. 정중하게."

나의 간단한 대답에 허기진 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원래 추근덕 선생님이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도 아니고."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동안 추근덕 선생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더군다나, 인턴이 펠로우의 약점을 잡고 있다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힘들겠지.

‘그나저나 내 능력이 이렇게 쓰일 때도 있네.’

나는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여태까지 일어났던 예지 능력은 나를 테스트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다르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한 번쯤은 선심 쓴다는 것일까?

마치 누군가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하여간 이 능력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네.’

변덕 심한 날씨 같달까.

어떨 때는 거친 풍랑처럼 나를 절벽까지 몰아세우고, 어떨 때는 부드러운 순풍처럼 날개를 달아 준다.

아무튼 이 능력 덕분에, 7월의 신경외과 스케줄은 마치 일등석에 앉은 것처럼 순탄하게 흘러갈 것 같았다.

"선한이가 일을 참 잘하네…… 나는 기가 약해서 이런 거 독촉 잘 못하는데……."

"앞으로도 맡겨만 주세요."

"그래, 잘 부탁해!"

허기진 선생은 믿음직스럽다는 듯 나를 다독였다.

나는 그 뒤로도 추근덕을 통해서 각종 영상판독을 필요할 때마다 빠르게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어쩌면 이 또한 의사가 되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과 부대낀다는 소리니까.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미래를 보는 능력으로 이런 인간관계까지 새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드디어 고대하던 8월이 다가왔다.

#여름 바다의 기연(1)

8월 첫째 날 새벽.

나는 내 방에서 여행용 캐리어를 펼쳐 놓고 있었다.

"어디 보자…… 빼먹은 건 없나?"

평상복.

잠옷.

세면도구.

헤드폰.

읽고 싶었던 책 한 권.

충전용 배터리.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한 달 동안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모조리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여행 짐 싸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이게 몇 년 만이더라?’

생각해 보면 나는 여행이라는 것을 가 본 적이 별로 없다.

남들 다 가 보는 해외여행 경험도 전무하다.

그럴 만한 금전적인 여유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한 번, 대학생 때 혼자 전국 철도여행을 한 적은 있었다.

아직도 그날 홀가분한 옷차림으로 여행을 떠나며 느꼈던 상쾌한 바람이 잊히지 않는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처음 꺼내 든 여행 가방이라 감회가 새롭다.

"벌써 나가냐?"

"예."

이른 새벽, 아버지가 거실로 나오셔서 말했다.

"밥 한술 뜨고 가지 그러냐?"

"시간 없어요. 동기들이랑 같이 서울역에서 열차 타기로 해서요."

"그 뭣이냐, 한 달 동안 어디서 일하다 온다고?"

나는 분주하게 신발 끈을 묶으며 대답했다.

"곡담이요."

"곡담?"

"네."

곡담.

인구수 35만의 해안도시.

연국대병원은 전국에 수많은 협력병원이 있다.

우리 인턴들은 그중 몇몇 병원에 정기적으로 파견을 가게 된다.

물론 규모 면에서는 연국대병원보다 훨씬 작은 곳들이다.

이렇게 군소병원들을 체험해 보는 것도 의사 커리어에 소중한 경험이 된다.

"어이구. 그 먼 곳까지 가서 고생 좀 하겄구나."

"다 경험이죠."

"그려, 아주 좋은 경험 되겄다. 몸 성히 잘 다녀와야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회상에 젖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젊었을 때 곡담에 한 번 놀러 갔었는데. 거기가 경치도 좋고 참 놀기 좋은 도시였다. 곡담 사람들 열정이 넘치는 걸로 유명하잖냐, 가끔 과해서 문제지."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실 때, 작은누나가 눈곱을 떼며 걸어와 말했다.

"야, 올 때 선물 사 와."

"선물?"

"거기 특산물 있을 거 아냐."

특산물이라.

곡담에 뭐가 유명하지?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총알택시나 성격 급한 사람들, 바다축제 등으로 유명하기는 하던데…….

나는 이윽고 무언가를 떠올린 뒤 말했다.

"곡담은 과메기가 유명하다던데?"

"그럼 올 때 과메기."

"뭐야, 과메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물건이 중하냐? 성의가 중하지. 아무튼 뭐든 사 와. 빈손으로 오면 죽인다."

그렇게 말하며 내 엉덩이를 발로 툭툭 친다.

괜히 심술이다.

하여튼 작은누나는 나만 보면 어떻게든 시비를 걸고 싶어서 안달인 모양이다.

"그리고, 거기 가면 한 달 내내 일만 하진 않을 거 아냐? 곡담 해수욕장 유명하니까, 바닷가 가서 하루쯤 놀기도 할 거잖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처억.

작은누나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말했다.

"사고 치지 마라."

"뭐?"

"괜히 휴가철에 여자랑 얽혀서 사고 치지 말라고. 남자는 자고로 거기 간수를 잘해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얼른 작은누나의 말을 끊고 문을 나섰다.

하여간 순수한 동생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휴우."

새벽 거리로 나서며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거리는 한산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한 손에는 여행 가방.

발걸음이 산뜻하다.

마치 대학생 때 여행을 가며 느꼈던 그날의 상쾌함이 떠오른다.

나는 맑은 공기를 만끽하며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 * *

서울역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완전히 날이 밝은 뒤였다.

나는 대합실에 앉아 생수를 마시며 문자를 보냈다.

[선한] : 다들 어디?

[소담] : 거의 다 왔어. 놋데리아 앞에서 볼까?

[연서] : 지하철 한 정거장 남았어요. 놋데리아 오케이~

[근욱] : 나도 거의 다 왔음!!

잠시 후 얼마 되지 않아, 야생의 근욱몬을 마주쳤다.

얼씨구?

옷차림에 신경 좀 썼다.

선글라스도 꼈네?

녀석은 들뜬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물었다.

"옷 어떠냐?"

나는 근욱이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강남역에서 미팅을 할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스판 티 금지.

꽉 끼는 바지 금지.

큰 벨트 금지.

등등.

내가 어제 몇 가지를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비로소 근욱이의 패션은 봐줄 만하게 되었다.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파견 가는데 옷을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그러자 근욱이는 히죽 웃었다.

"야, 피 끓는 나이에 여름 바닷가로 가는 건데 신경 좀 써야 하지 않겠냐?"

"누가 들으면 휴가 가는 줄 알겠네."

"아무리 일하는 거라도 기분이라도 새롭잖아. 우리 같은 인턴이 기분 전환할 시간이 이럴 때밖에 더 있냐?"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등 뒤에서 연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일찍 왔네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놓칠 뻔했다.

평소에 병원에서 보던 연서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공들여 세팅한 머리.

하늘거리는 민소매 옷차림.

시원시원하게 뻗은 몸매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름 날씨와 참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평소랑 분위기가 좀…… 많이 다르십니다?"

근욱이가 연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당황한 듯 말한다.

역시 연국대 대표 비주얼.

어딜 가도 눈에 띈다.

오죽하면 멀찍이 걸어 다니는 서울역의 수많은 행인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에이, 별로 힘준 것도 아닌데. 제가 작정하고 힘주면 님들 다 쓰러질걸요?"

그렇게 말하며 연서가 머릿결을 장난스럽게 찰랑거리며 촐싹댄다.

나는 픽 웃었다.

외모는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하는 짓은 평소의 옆집 강아지 같은 성격 그대로다.

그리고 우리 네 명 중 마지막 멤버가 등장했다.

"안녕."

돌돌돌―

묵직한 바퀴 소리가 들려온다.

소담이는 자기 몸만 한 캐리어를 낑낑대며 끌고 나타났다.

뭐가 저렇게 커?

이민 가는 줄 알았네.

안 그래도 작은 몸집인 소담이에 비해 가방이 너무 거대하다.

아니나 다를까 근욱이가 딴죽을 걸었다.

"혹시 가방 안에 사람 들었냐?"

"남이사."

"고작 한 달 있을 건데 무슨 짐을 그렇게 많이 싸 왔어? 비켜 봐, 그 가방에 나도 들어가겠다."

"넌 두꺼워서 못 들어가, 근육 바보야."

소담이는 오자마자 근욱이와 투닥댔다.

두 사람은 은근히 잘 논다.

아니, 그보다는 근욱이가 친화력이 좋다고 해야 맞다.

가만 보면 은근히 인싸 기질이 있는 녀석이란 말이지.

"야, 가방 이리 내놔. 끌어 줄게."

"됐어."

"같이 움직일 때 답답할 것 같아서 그런다."

근욱이는 소담이의 캐리어 손잡이를 뺏다시피 하며 대신 끌어 주었다.

‘근력을 아끼는 것은 헬스인의 도리가 아니다!’

근욱이가 평소에 말하고 다니는 신조였다.

"그나저나 우리 기차 시간 얼마나 남았지?"

"20분 정도 남았어요."

"다들 아침 안 먹었지? 저기 기차 타러 가는 길에 푸드코너 있던데 하나씩 사서 들어가자."

"그럴까요?"

"렛츠 고!"

우리는 활기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고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본 열차는 곡담역까지 운행하는 고속 열차입니다. 저희 승무원은 고객 여러분께서 편하게 여행하실 수 있도록―>

열차 내 스피커에서 발랄한 음악과 함께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진다.

우리 네 명은 의자를 돌려 마주 앉았다.

"야, 기차여행은 정말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대학교 1학년 때 생각나네요."

"과자 먹을 사람?"

"저요!"

우리는 군것질거리를 꺼내서 나누었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경험이다.

곧 열차가 출발했다.

위이잉―

익숙한 풍경들이 창문 밖으로 사라지고, 곧 새로운 풍경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우리 가는 곡담병원 말야. 거기는 아무래도 시설이 좀 열악하겠지?"

"인계장 읽어 보니 그렇다고 하던데요. 응급실 환자들도 여기랑은 완전 캐릭터가 다르대요."

곧 우리는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지내게 될 곳은 어떤 곳일까?

"사실 저랑 소담 언니는 연국대 말고 다른 병원 가 보는 거 처음이에요."

연서와 소담이.

두 사람은 연국대 출신이다.

당연히 학생 때도 연국대병원에서 실습을 했을 것이다.

근욱이는 타 학교 출신이지만, 나름 빅5 병원에서 실습을 했다.

즉, 이 중에 지방 병원을 경험한 것은 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이 중에서 서울 바깥에 있는 병원 체험해 본 게 선한이밖에 없네."

"그러게. 일운대에서는 실습 어땠어?"

"실습?"

나는 씁쓸히 웃었다.

지방 의대의 열악함?

단순히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실습 환경의 차이다.

바로 이 실습에서 서울의 큰 대학들과 ‘넘사벽’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내가 실습했던 병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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