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전세 역전(6)
"브이로그요?"
"응. 갑자기 흥미가 생겨서."
나는 구체적인 말을 아꼈다.
어차피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계획이다.
그러자 연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상하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근데 오빠 표정이 왜 그래요. 혹시 또 이중인격 나오고 있는 거 아니죠?"
응?
나는 입매를 만졌다.
나도 모르게 사악한 웃음을 짓고 있었던 모양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온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그래."
나는 성질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물론 인턴이 되면서 얌전히 지내고 있긴 했지만…….
추근덕 선생처럼 질 나쁜 인간을 참아 줄 생각은 없다.
갑질하는 것들에게는 갑질로 되갚아 줘야지.
그것도 몇 배로 말이다.
* * *
7월 15일.
추근덕은 호텔 라운지 바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한강이 보이는 호텔.
그리고 옆자리에는 미녀.
이게 바로 그가 의대생 때부터 꿈꿔 왔던 라이프였다.
"오빠 근데 와이프랑 이혼한다 그러지 않았어? 언제 갈라설 거야?"
"어휴, 또 보챈다. 너는 어려서 모르겠지만 막상 이혼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추근덕은 능글맞게 웃으며 여자를 쓰다듬었다.
남들이 볼 테면 보라지.
어차피 이런 곳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오빠는 와이프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당연히 우리 예쁜 자기지~ 오늘 약혼 기념일인데 너랑 있는 거 보면 모르겠어?"
"진짜야?"
"그럼."
추근덕은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표정으로 여자에게 속삭였다.
따르르―
그때 주머니 속에 있던 전화가 울렸다.
추근덕 선생은 입가에 검지를 들어 올린 뒤 전화를 받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지금 병원 일이 바빠서…… 늦게 들어갈 거야. 나중에 전화할게."
뚝―
그렇게 아내에게 대답하고 얼른 통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여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안겼다.
추근덕의 입가에 헤벌쭉 미소가 걸렸다.
‘흐흐. 인생 살맛 나는구만.’
추근덕, 38세.
그의 인생은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제 교수 자리만 꿰차면 상위 0.1퍼센트 인생의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다.
연국대 인맥을 위해 지금의 와이프와 결혼했고, 그 덕분에 올해 연국대병원의 의사가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혼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얼른 방으로 올라가자. 나 자기랑 놀고 싶어서 병원 일도 대충 끝내고 왔단 말이야."
그렇게 여자의 허리를 감싸고 호텔로 올라가려 하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추근덕 선생님?"
"응?"
화들짝!
추근덕의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누구지?
이곳에서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이 없을 텐데…….
추근덕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눈이 커졌다.
"너, 너는?"
분명 낯이 익었다.
이번 달 신경외과 인턴.
쉽게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며칠 전, 밤중에 판독요청서를 들고 와서 눈을 시건방지게 부릅떴던 녀석이기 때문이다.
"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추근덕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에게 불륜 현장을 목격당했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건…….
인턴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녹화가 되고 있는 듯, 빨간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인다.
"브이로그 촬영 중이었는데요."
"브, 브이로그?"
"예. 요새 호캉스가 유행이잖아요."
호캉스? 브이로그?
왜 하필 지금 이 시간에 여기서?
속으로 오만 가지 의문이 다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카메라에 나 찍힌 건 아니지?"
"글쎄요. 추근덕 선생님이 잠깐 찍혔을 수도 있는데, 이건 제 채널에 올리기 전에는 편집해 드릴게요."
뭐라고? 어디에 올려?
추근덕의 눈이 커졌다.
모골이 송연해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한은 정중하게 꾸벅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쇼."
"야, 잠깐! 잠깐만!"
후다닥!
추근덕은 사색이 되어 신선한의 뒤를 쫓았다.
함께 있던 여자를 내팽개친 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쫓아가며 다급히 말했다.
"야, 그거 얼른 지워!"
"제가 왜요?"
"내가 찍혔을지도 모른다면서. 이거 사생활 침해인 거 몰라?"
그러자 선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요."
"뭐가?"
"우연히 찍힌 걸로 그렇게 화내실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찔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뜨끔.
추근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직 불륜이라는 것을 들킨 것도 아닌데 너무 오버해서 몰아붙인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같이 있던 분이랑 혹시……."
선한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추근덕이 펄쩍 뛰며 말을 끊었다.
"이 새끼야. 지우라면 지워야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너 병원에서 내 얼굴 계속 안 볼 거야?"
추근덕은 으름장을 놓았다.
이 정도 말하면 듣겠지.
고작 인턴 주제에 펠로우인 내 말을 안 듣고 배겨?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제가 아내분께 이 영상을 전달하기라도 할까 봐요?"
쩌적.
추근덕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눈앞에 있는 인턴은 결코 생긴 것처럼 순진무구한 상대가 아니었다.
천연덕스럽게 말을 하는데, 그 뒤에 계략을 숨기고 있었다.
"너, 너 이 새끼…… 인턴 주제에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뇨. 인턴이 어떻게 펠로우를 협박합니까."
"이 자식이!"
와락!
추근덕은 멱살을 잡았다.
그런데, 어느새 선한의 표정이 바뀌었다.
웃고 있던 얼굴에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무표정이 그 자리에 있었다.
추근덕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살면서 이런 걸로 남들 협박해본 적은 없는데……."
타악!
몸이 휘청 꺾였다.
자신 있게 내뻗은 팔이 어느새 선한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아, 아! 내 팔!"
"그동안 병원에서 아랫사람들이 잠자코 맞아 줬던 모양인데.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되시나 봐요?"
추근덕은 선한의 손을 뿌리치려 버둥댔지만, 그럴수록 더욱 단단히 조여 올 뿐이었다.
‘젠장, 이 자식…… 손은 곱게 생겨서 왜 이리 아귀힘이 세?’
추근덕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살면서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자신보다 열 살은 어린 인턴에게 제압당하다니!
안 그래도 창피한데, 호텔 직원들이 수군대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결국 그는 팔이 꺾인 채 쩔쩔매다가 애원했다.
"아…… 알았으니까 이거 좀 놓고 얘기합시다! 제발요, 인턴 선생님!"
* * *
다음 날.
병원의 사내 게시판에 추천수와 댓글이 폭발하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루 종일 그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야, 대박."
"아까 게시판에 그 글 봤냐?"
"웬일로 추근덕 그 인간이 사과문을 다 썼대?"
구내식당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인턴들이 흥미로운 가십거리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아까 사과문 봤어요?"
연서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식판을 가져오며 말했다.
그러자 식사 중이던 소담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과문이라니?"
"언니 아직 못 봤구나."
곧 연서는 히죽 웃으면서 캡쳐된 이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사과문]
안녕하세요, 영상의학과 추근덕입니다.
그동안 저는 수련의와 전공의들에게 수차례 욕설을 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성적 모욕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간 저의 부적절한 언행에 피해를 입은 분들께 진심으로 깊이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언행에 주의하도록 하겠으며 다음 사항들을 약속드립니다…….
"정말 사과문이잖아?"
소담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나는 여유롭게 샌드위치를 씹었다.
비록 성에 차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계약 이행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두고 봐야겠지.
"근데 뜬금없이 웬 사과문?"
"모르죠."
"절대 자발적으로 이런 걸 올릴 인간이 아닌데……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아니면 영상의학과 교수님한테 혼난 거 아니에요? 아랫사람들한테 갑질 좀 적당히 하라고."
곧 테이블 위에서 온갖 추측이 오간다.
"혹시 누구한테 뚜까 맞기라도 한 거 아닐까요? 참교육 당해서 정신을 차렸다든가."
연서가 주먹을 쥐고 장난스럽게 휘두르며 말했다.
나는 혼자 피식 웃었다.
폭력이라니, 무슨 섭섭한 소리를.
그보다는 조금 더 고상한 방법을 썼지.
"아 참, 카메라 잘 썼어. 고마워 연서야."
연서는 내가 내민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물론 메모리카드는 비워져 있는 상태다.
내가 찍은 영상을 공개하지 않는 대신, 추근덕에게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계약]
―여태까지의 언행에 대한 사과문을 사내 게시판에 올린다.
―앞으로 인턴 및 레지던트들에 대한 폭언, 폭행, 성추행 등을 중지한다.
―앞으로 나에게서 환자 번호가 문자로 오면 5분 안에 판독한다. 흉부 영상 외에도 다른 부위도 어떻게든 담당 세부 전문의의 판독을 받는다.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는 일이 있으면…… 무슨 말인지 아시죠?>
며칠 전, 호텔 로비에서 내가 한 말에 추근덕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도 아내에게 불륜 사실을 들키는 것이 무서운 모양이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우리 와이프한테 말하지는 않는 거지? 정말 약속하는 거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야 내가 나설 필요 있나.
올해 연말쯤, 추근덕은 불륜 사실을 들키겠지.
그리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BGM 삼아 부인의 프라이팬에 이빨이 날아갈 것이다.
불륜에 대한 응징은 아내의 몫으로 남겨 두도록 한다.
‘올해 인턴생활하는 동안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네.’ 말 잘 듣는 노예 1호가 생겼다.
그것도, 꽤 활용 가치가 높은.
* * *
그 뒤로 2주일.
내 일상생활은 조금 더 편해졌다.
신경외과의 주된 일과인 프리옵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어느 평화로운 오후.
허기진 선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스파인(spine) MRI 요청 보냈었는데 아직도 안 떴네…… 종양이 어디까지 먹었는지 애매해서 판독 받아 놓으라고 교수님이 이야기했었는데…… 평소보다 늦는 거 보니까 이거 또 추근덕 선생님인가 본데……?"
수술을 앞두고 판독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인턴아, 이거 어떡하지? 수술시간 얼마 안 남아서 빨리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잠깐만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선한] : 선생님. 조금 전에 저희 쪽 허기진 선생님이 보내 드렸던 주신형 환자 스파인 MRI 판독이 늦네요.
나는 문자를 보내 놓고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띠링―
나는 메시지함을 확인했다.
딱 봐도 허겁지겁 쓴 듯한 문자가 보였다.
[근덕] : 미안ㄴ 화장실이라 지금ㅂ로갈게!!
[선한] : 서두르세요.
[근덕] : 10분만 주면 안되겠니?
또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화면 너머로, 화장실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추근덕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나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선한] : 5분 드리겠습니다. 얼른 뛰어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