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96화 (96/241)
  • #96 전세 역전(5)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니터 3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책상 앞의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빈자리의 모니터에는 흉부 X―ray와 로그인되어 있는 EMR 화면이 보였다.

    "실례합……."

    나는 목소리를 내려다가 멈칫했다.

    살짝 보이는 EMR 화면에는 수십 개의 쪽지가 도착해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아마도 영상판독요청 알림인 것 같았다.

    데스크에 이미 내가 준비한 것과 같은 영상판독요청서도 몇 개 놓여 있었다.

    ‘쪽지함 알람에 요청서까지…… 너무 쌓여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물론 영상의학과의 특성상 업무가 한꺼번에 집중되는 경우도 있다.

    병원 곳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판독요청이 날아오니까.

    그런데 지금은, 밀려도 너무 밀려 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그렇게 생각하며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자기야, 오빠 못 믿어? 몇 번을 얘기해? 나는 자기밖에 없다니까."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등받이를 눕힌 채, 다리를 책상에 올리고 전화기를 붙잡고 시시덕대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통화 내용이 좀 민망하다.

    굳이 엿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상한 대화들이 귀에 자꾸만 들어온다.

    "어휴, 우리 자기 삐졌어? 알았어, 오빠가 너 가지고 싶었던 구두 사 줄게…… 여기서 마누라 얘기가 왜 나와? 알았어. 우리 마누라보다 더 좋은 거 사 주면 되잖아."

    기가 막혔다.

    사적인 통화를 하느라 콜을 받지 못했다고?

    그것도 유부남이 애인이랑?

    ‘어이가 없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물론 남이 불륜을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일은 제대로 굴러가게 해야 할 것 아닌가?

    <콜폰>이라 하면 업무용 핸드폰이라, 항상 업무시간 중에는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이걸 편의상 개인 핸드폰 회선으로 합쳐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개인 용무 때문에 업무 요청을 한 시간이나 못 받는 건 너무하다.

    "실례합니다."

    "아, 깜짝이야."

    흠칫―

    남자는 내 목소리에 놀라서 전화기를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30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생긴 것만 봐서는 멀쩡하다.

    그런데 눈빛이 묘하게 썩어 있다.

    딱 첫인상을 보자마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든다.

    이 사람이 영상의학과의 추근덕 선생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뭔데?"

    "급하게 프리옵 판독 받아야 하는 환자가 있어서요."

    "알았어. 거기 두고 가."

    훠이훠이.

    추근덕 선생은 나를 손짓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바로 수술방 들어가야 하는 급한 환자입니다. 어큐트(Acute, 급성) SDH(Subdural hemorrhage) 환자라……."

    "하, 진짜."

    추근덕은 짜증이 난 듯 눈썹을 곤두세우더니 전화기에 대고 속삭였다.

    "잠깐.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꾸욱―

    추근덕 선생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본격적으로 나를 위아래로 노려보았다.

    ‘감히 네깟 게 나를 방해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거기 놓고 가라고 했냐, 안 했냐?"

    대뜸 말이 거칠어진다.

    그동안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말로 이런 사람이 있기는 있구나.

    막상 마주쳐 보니, 화가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신기했다.

    "급한 용무라서 재촉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X발, 인턴 새끼가 존나 귀찮게 구네."

    파악!

    추근덕은 내가 내민 판독요청서를 쓰레기처럼 구겨 버리더니 내 발치에 던졌다.

    잠깐만.

    이 인간이 방금 뭐 한 거지?

    그동안 병원에서 꽤 다양한 사람을 만나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 이 사람은 최악이다.

    고작 자기 기분이 상했다고 급한 환자의 영상판독요청서를 바닥에 내팽개치다니?

    "뭘 꼬라봐?"

    "……."

    "어? 어쭈, 이 새끼 눈깔 봐라. 그러다가 한 대 치겠다?"

    물론 의사들이라고 다 좋은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일인데도, 자기 기분에 따라 태업을 하는 인간들도 아주 간혹 있다.

    이 사람이 그런 케이스다.

    추근덕은 내 굳은 표정을 보며 잠시 움찔하는 듯했지만 이윽고 더욱 열을 올렸다.

    ‘이러면 안 되지.’

    참자.

    나는 인턴이다.

    ‘인턴 아래에는 타일 바닥밖에 없다’는 바로 그 인턴.

    앞으로 1년 동안은 정말 성질 죽이고 살아야 한다.

    애초에 연국대병원에 올 때 그렇게 마음먹었잖아?

    안 그러면 내년까지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환자가 수술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먼저다.

    ‘아무리 그래도 열받네. 한 대 칠 수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파앗―

    눈앞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갑자기 미래의 한 장면이 보인다.

    * * *

    ‘여기는 어디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병원은 아니다.

    카페테리아 라운지.

    바깥에 한강 야경이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최소 5성급 고급 호텔인 모양이다.

    ‘뜬금없이 호텔이라니…… 이번에는 대체 뭘 보여 주려고?’

    일단은 정보부터 파악하자.

    나는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는 냅킨을 확인해 보았다.

    로얄리버 호텔.

    내가 이름을 알 정도니 꽤 유명한 호텔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예상치 못한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자기야, 이제 화 좀 풀렸어?"

    창가에서 여자와 시시덕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누군지 딱 봐도 알겠다.

    사복을 입은 추근덕 선생이다.

    그의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었고, 옆에는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자가 품에 안겨 있었다.

    "몰라, 나 화났어."

    "기분 풀어, 자기야."

    "오빠는 와이프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당연히 우리 예쁜 자기지~"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여자의 볼을 쓰다듬는다.

    한마디로, 불륜 현장이다.

    이건 뭐 막장 아침드라마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순간.

    따르르―

    추근덕 선생의 핸드폰이 울린다.

    화면에는 ‘와이프’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추근덕은 여자에게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올린 뒤 소곤소곤 전화를 받는다.

    "어 지금 병원 일이 바빠서…… 늦게 들어갈 거야. 나중에 전화할게."

    추근덕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안겨 있던 여자가 피식 웃으며 눈을 흘긴다.

    "쓰레기네."

    "쓰레기라서 싫어?"

    "아니, 좋아."

    "흐흐흐. 얼른 방으로 올라가자. 나 자기랑 놀고 싶어서 병원 일도 대충 끝내고 왔단 말이야."

    그렇게 얘기하며 추근덕은 애인의 허리를 감싼다.

    눈꼴사나워 죽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파앗―

    장소가 이동된다.

    이번에는 가정집이다.

    거실의 오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 추근덕의 몰골이 심상치 않다.

    눈가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후줄근한 사각팬티 바람으로 식탁 뒤에 숨어 있다.

    그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외친다.

    "여보, 여보! 그거 좀 놓고 이성적으로 얘기하자!"

    "이성적?"

    씨익, 씨익.

    식탁 맞은편 아내의 손에 커다란 프라이팬이 들려 있다.

    아무래도 화가 잔뜩 난 듯하다.

    쌍심지를 켠 눈빛에서 열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동안 내가 호구로 보였지? 프라이팬으로 더 처맞고 싶지 않으면 당장 이거 해명해!"

    아내는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종이들을 가리킨다.

    ‘저 종이들은 뭐지?’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갑자기 흥미진진해진다.

    이 맛에 막장 드라마 보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테이블 위를 슬쩍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A4 용지에 프린트된 호텔 영수증 문서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귀하는 올해 50회 이상의 방문으로 로얄리버 호텔 VIP 등급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귀하의 방문 이력을 확인하시려면 아래 링크…….>

    연 50회?

    맙소사, 많이도 갔다.

    그러면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호텔을 들락거렸다는 소리다.

    A4 용지를 확인하던 추근덕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이건 어디서 났어?"

    "당신 메일 스팸함에 영수증이 버젓이 쌓여 있더만! 그놈의 호텔은 왜 그렇게 자주 간 거야?"

    "……."

    "뭐, 호텔 VIP 등급? 그래. 내가 오늘 저승길 티켓도 VIP로 끊어 줄게! 너 죽고 나 죽자!"

    부웅, 부웅!

    무쇠로 만든 프라이팬이 허공에 휘둘러진다.

    살벌한 바람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못지않은 타격 폼에, 추근덕이 잔뜩 쫄아서 침을 삼킨다.

    "게다가 방문 이력에 7월 15일? 야 이 쓰레기야. 이날은 심지어 우리 기념일이었잖아! 호텔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세미나……."

    "세미나? 세미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세 미 나?"

    퍽― 퍽, 퍽!

    ‘세’에 한 방.

    ‘미’에 한 방.

    ‘나’에 한 방.

    본격인 매타작이 시작된다.

    산타가 선물을 주시러 오신다는 감미롭고 평화로운 크리스마스 캐럴 BGM과 무척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아, 아! 여보 나 죽어! 뼈 부러져!"

    추근덕이 얻어맞으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분노한 아내의 프라이팬에는 자비가 없었다.

    부인은 추근덕을 코너에 몰아세우며 외친다.

    "하도 낌새가 이상해서 내가 다 알아봤어. 올해 초부터 내내 어린 여자 데리고 놀았다며? 언제 철들래, 이 인간아!"

    그러자 추근덕 선생의 입가가 억울하게 씰룩거린다.

    뭔가 말하려는 것 같은데?

    설마 ‘그 대사’를 하려는 건가?

    "사,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

    퍼억!

    기어코 프라이팬이 안면에 꽂힌다.

    그리고 얼굴에는 시뻘건 피멍이 든 채, 추근덕 선생의 이빨이 허공을 날아간다.

    * * *

    파앗―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이런 미래예지는 처음이었다.

    마치 한 편의 막장 드라마 축약본을 보고 온 것 같기도 하고.

    ‘뭐, 아무튼 속이 시원하긴 하네.’

    더운 날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켠 기분이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추근덕이 얻어맞는 걸 보고 났더니 기분이 나아진다.

    "뭐야. 뭘 쳐다봐?"

    "아닙니다."

    나는 웃음을 참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대사를 말했다.

    혹시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이곳에 오기 전부터 미리 생각해 둔 방법이었다.

    "선생님, 조금 전에는 용무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거 이기환 교수님 수술인데 괜찮으세요?"

    "뭐?"

    "이제 20분 뒤면 직전 수술이 끝나는데, 영상 판독이 안 돼 있어서 다음 수술이 미뤄지기라도 하면……."

    "이 새끼야. 그걸 왜 이제 말해?"

    교수의 이름을 대자, 추근덕이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한다.

    자기가 던졌던 판독요청서를 서둘러 집어 들며 말한다.

    "금방 판독결과 올려 보낼 테니까 돌아가!"

    "네. 알겠습니다."

    덜컥―

    나는 영상의학과의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수술실로 돌아가는 길.

    문득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른다.

    이걸 실행에 옮겨도 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곧장 연서에게 연락했다.

    "연서야."

    "네?"

    "혹시 브이로그용 카메라 좀 빌려줄 수 있어?"

    "카메라? 빌려주는 건 어렵지 않죠. 그런데 갑자기 왜요?"

    연서가 의아한 듯 묻는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대답했다.

    "나도 한번 찍어 보고 싶어서. 브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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