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전세 역전(4)
7월의 밤.
이제 바깥 공기에도 제법 여름 냄새가 난다.
근욱이와 나는 오랜만에 사복 차림으로 병원을 나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노가리집이었다.
와글와글―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북적거린다.
테이블마다 모여 앉은 직장인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저마다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우키키킥!"
가게 문을 열자마자 해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소리야?
분명 목소리는 소담이인데.
평소답지 않게 업되어 있는 걸 보니 술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다.
"이 웃음소리 어디서 나는 거냐?"
"저기 있네."
우리는 곧 안쪽 테이블에 앉은 소담이와 연서를 발견했다.
소담이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다.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다.
"왔어요?"
"선한아 안뇽~!"
작은 양철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손을 번쩍 든다.
우리는 옆자리에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근욱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선한이만 반갑고 나는 보이지도 않지?"
"에이. 무슨 소리예요. 근욱 오빠도 어서 와요."
"근데 너희들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저는 별로 안 마셨고, 이거 소담 언니가 다 마신 거예요."
이걸 소담이가 혼자서?
나는 테이블 위의 술병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혼자 마셨다기엔 결코 적지 않은 양이다.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소담이었기에 더욱 의외였다.
"병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크으~
소담이는 말없이 소주잔을 입에 털어 버리더니 허공에 외친다.
"야이 씨,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걸 보니, 문득 짐작이 갔다.
"너 영상의학과에서 무슨 일 있었구나. 혹시 추근덕 선생 관련된 일이야?"
아무래도 정답인 것 같다.
소담이의 얼굴에 잠시 우울한 표정이 스친다.
그러더니, 이윽고 피식 웃으며 꼬부라진 혀로 말한다.
"아니 뭐…… 에이 씨…… 살다 보면 그런 놈도 있고…… 내가 참고 넘어가야지 뭐어…… 키킥!"
뭐라는 거야?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소담이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완전 갔네 갔어."
"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거야?"
"그게요……."
결국 옆에 앉아 있던 연서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지난주 금요일.
영상의학과의 저녁 회식이 있었다.
대부분 선한 사람들로 구성된 과라, 처음에는 분위기가 평화로웠다.
그런데 2차 술자리에서 추근덕 선생이 합류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디 보자, 우리 인턴도 술 좀 마셔야지?>
그것이 시작이었다.
술에 취한 추 선생은 소담이에게 술을 강권했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이상한 말들을 꺼냈다.
연애 경험을 묻는다든가.
손금 좀 봐줄까? 라고 말을 한다든가.
소담이가 한사코 거절하며 물러서자, 취한 얼굴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과 오고 싶다 그랬던가? 그러면 분위기도 좀 띄우고 싹싹하게 굴어야지. 인턴이 그렇게 뻣뻣하면 사회생활 못 해~!>
그러자 주위에서 눈치를 보며 그를 만류했다.
그제서야 추근덕은 술이 좀 깬 듯 물러났다고 한다.
<아, 이거 갑질 뭐 그런 거 아니었다. 오해하면 안 돼? 그냥 사회생활 알려 주려 한 거야, 하하하!>
"뭐? 그런 일이 있었어?"
"재수 없네. 나 같으면 맥주잔으로 그 인간 뚝배기 깼다!"
나와 근욱이의 말에 소담이가 외쳤다.
"씨…… 나도 짜증나. 그때 정색하면서 항의했어야 했는데, 가만히 있었던 게 제일 열 받는다고!"
그럴 만하다.
막상 당사자의 입장이 되면 곧바로 항의하기 어렵다.
특히 수직적인 조직문화 안에서 상급자에게 직언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병원, 회사, 군대 등등.
어딜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 그래도 추근덕 평판이 안 좋던데, 원래 그런 사람이야?"
"에휴, 말도 마요. 저번 달에 다른 인턴한테는요……."
연서의 말이 이어진다.
곧 추근덕의 여러 언행들이 폭로된다.
소담이 앞이라서 그나마 이 정도였지, 다른 사례들은 더했다.
주로 인턴들에게 갑질을 하거나 은근슬쩍 추행을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거 참아야 되냐?"
"어떡해요 그럼."
"인사팀에 찌르면 안 돼?"
"그랬다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어서 다들 참았나 봐요. 우리 인턴들은 앞으로도 판독받으러 가야 하니까,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잖아요."
"하긴……."
근욱이와 연서는 혀를 찼다.
병원 인턴 제도의 특수성.
첫째. 소속이 없다.
둘째. 매달 새로운 환경에서 근무한다.
아홉 번 잘해도, 한 번 밉보이면 소문이 나서 평가가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더럽고 치사한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1년은 그냥 참고 지내는 편이다.
아마 대다수의 사회 초년생들이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특히 영상의학과 지망하는 인턴들은 추근덕한테 더더욱 뭐라 하기 힘들어요. 괜히 말 잘못했다가 찍힐까 봐……."
대충 상황은 알겠다.
터질 게 터지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안 그래도 인턴 대나무숲에는 아예 <추근덕 어록>이 존재할 정도였다.
―얘들아 너네 추 모 씨한테 무슨 소리까지 들어 봄?
―아, 그분?
―요즘 남자 인턴 부를 때 기본 호칭이 개XX던데?
―여자 인턴들한테는 저번 달부터 은근슬쩍 자꾸 들이댐. 이름값 하는 중인 듯.
등등…….
뒷얘기들이 흉흉하다.
이런 걸 ‘파도 파도 괴담뿐이다’라고 하는 건가?
―연초에는 얌전하더니 왜 저러는 거?
―원래 저런 인간이었대요. 예전 병원에서는 여자 동료들한테 틈만 나면 들이댔다 함.
―유부남 아님?
―맞음ㅋㅋ
―웃을 일이 아니야 ㅠㅠ 나 영상의학과 가려고 했는데 저런 인간이랑 매일 마주칠 생각 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인턴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이 또 윗사람들에게는 잘한다.
게다가 논문도 많이 써서 조직 내에서도 인정받는다고 한다.
"언니, 그냥 아빠한테 확 말해 버리자니까요. 부원장님이 아시면 가만히 있겠어요? 참교육 한번 합시다!"
연서의 말에 소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런 일로 아빠 소환하고 싶지 않아. 앞으로 내가 알아서 잘 대처해봐야지……."
소담이에게는 안 좋은 기억들이 있다.
대학생 시절, 로얄이라고 은근히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들.
그러니 아빠 찬스를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을 만도 하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저번에 아빠를 이용해서 나를 도와줬던 것은 무척 예외적인 상황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 야, 쟤 쓰러진다."
"어떡해!"
"잡아!"
쿠웅.
소담이가 장렬히 전사한다.
아까부터 위태위태하더니 결국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는다.
한바탕 쏟아내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떡하지?"
"일단 숙소로 옮기자."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이런 날을 위해 키워온 활배근이다."
"오, 역시 근욱몬."
"자, 내 등에 얹어!"
영차!
근욱이는 소담이를 업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
우리는 소담이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택시 탈까?"
"됐어. 어차피 이 거리는 잡히지도 않아."
"힘들면 말해, 교대해줄게."
골목은 아직 시끌시끌했다.
저마다의 이유로 술을 마시며 고충을 토로하고 있는 직장인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소담이를 업고 좁은 골목에서 벗어나 횡단보도로 향했다.
부우웅―
도로 위의 차들이 무심히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병원이라는 사회에서, 우리 인턴들이 무척 작은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되는 순간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이런 일들에 점점 무뎌지고 익숙해져서 받아들이는 게 사회생활인 걸까?’
곧 나는 스스로의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엄연히 다르다.
사회생활에 적응한다는 건, 인간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마찰에 적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게 아니니까.
누군가가 명백히 잘못 처신하고 있는 것이고, 그걸 교정해야 하는 일이다.
‘추근덕이라.’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원래 질 나쁜 인간들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지만…….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인지, 낯짝 한번 보고 싶네.
* * *
그리고 그날은 머지않아 나에게 찾아왔다.
<프리옵(pre―op) 챙기기>
수술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검사의 판독결과를 챙기는 것을 말한다.
모든 환자들은 수술받기 전에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검사가 있다.
흉부 엑스레이와 심전도 검사.
또 이 검사들은 판독결과가 있어야만 한다.
만약 이 결과가 없다?
그러면 마취과에서 수술에 협조할 수 없다고 나온다.
이를 병원 사람들끼리는 ‘마취과에서 수술방을 열어 주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밤 10시.
오늘도 신경외과는 응급 수술이 열려 있다.
하나의 수술이 마무리되어 가고, 다음 수술을 연이어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허기진 선생님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으아…… 판독이 아직도 안 왔네. 이거 판독 없으면 마취과에서 수술방 안 열어 줄 텐데 큰일이네……."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벌써 3시간째.
영상판독요청을 보냈지만, 영상의학과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오지 않고 있었다.
이럴 경우 수술을 시작조차 못 하게 된다.
"인턴아…… 이거 아직 판독이 안 왔어?"
그가 내게 묻는다.
안 그래도 나도 초조해지던 차였다.
"<중요>에서 <긴급>으로 돌렸는데 아직 안 왔습니다."
"당직 선생님한테 문자는 해 봤어?"
"예."
"전화는?"
"두 번 해 봤는데 계속 통화 중이었습니다."
허기진 선생은 곤란한 표정으로 수술방 안쪽의 PC로 당직표를 확인해 보더니 말했다.
"아, 오늘 당직 추근덕 선생님이었구나. 이 사람 좀 이상하다면서? 판독받기 힘들다고 하던데……."
좁은 병원 사회에서는 소문도 빠른 법.
이미 신경외과에도 추근덕의 악명은 유명한 것 같다.
"어떻게 하죠?"
"일단 내가 영상의학과에 전화해 볼게……."
허기진 선생은 콜폰을 들어 올린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공허한 연결음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이런, 진짜 전화도 안 받으시네. 바쁘신가……."
허기진 선생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다.
안 그래도 마른 사람이 얼굴에 핏기까지 없어지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안 되겠다.
이럴 땐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제가 직접 가 보겠습니다."
"그럴래?"
"예."
"그래, 이 환자 카아웃(car―out)은 내가 할 테니까…… 너는 빨리 뛰어가 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술방에서 판독요청서를 프린트해서 바로 영상의학과로 달렸다.
이렇게 다른 과에 비벼 가면서 일을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인턴의 몫이니까.
* * *
똑똑―
나는 노크를 하고 영상의학과의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검은색 바탕으로 된 X―ray, CT 를 판독하는 방이기에 영상의학과는 전반적으로 어두침침했다.
마치 수면등만 켜 놓은 것처럼, 주황색 할로겐등만이 천장에서 약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건가?’
그때,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