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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94화 (94/241)

#94 전세 역전(3)

이 목소리는?

한 달 동안 지겹게 들었던 목소리다.

류명인이 나를 향해 눈을 흘기고 있다.

마스크로 가려져 있지만 눈빛만 봐도 류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뭔데?"

"제 거라구요."

"이름 써 놨냐?"

"써 놓은 거나 다름없죠. 아까 복도 끝에서 걸어올 때부터 이 융포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음."

초딩이냐?

유치한 녀석.

나는 서랍 옆 칸을 바라보았다.

굳이 이것 말고도 다른 융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내가 손을 떼자, 류명인은 자기가 1점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우리 서로 다른 과로 흩어져도 아직 경쟁 끝난 거 아닌 거 알죠? 형이랑 저는 라이벌이라는 거 잊지 마요!"

그놈의 경쟁.

너나 실컷 해라.

나는 녀석을 무시한 채 머슴처럼 융포 더미를 들고 수술실로 향했다.

"형, 저 무시하지 마요!"

"어 그래, 라이벌. 수고해라."

나는 13번 수술방에 융포를 가져다 놓았다.

이제 수술방 준비는 끝났다.

다음은 환자를 에스코트할 시간이다.

‘좋아, 이제 수술실 입구 로비로 가자!’

와글와글―

수술실 로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침 첫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이었다.

나는 휠체어에 걸려 있는 번호판을 확인하며 13이라는 숫자를 찾았다.

‘찾았다. 13번 방 환자.’

마취과와 수술방 간호사들이 환자에게 몇 가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환자 옆에 서서 기다렸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이번 달 NS 인턴 쌤이시죠?"

나를 부른 것은 하늘색 수술 모자에 마스크로 입을 가린 간호사 선생님이었다.

"네, 맞습니다."

"마취과랑 수술방 팀 확인 끝났으니까 들어가시죠."

"예."

드르르―

나는 환자의 휠체어를 밀고 수술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수술방에 들어가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오, 인턴 첫날인데 준비 착실히 잘해 놨네……."

이 목소리는?

조금 전 탈의실에서 만났던 허기진 선생님이다.

마스크로 얼굴이 안 보이지만, 수수깡처럼 가느다란 팔 때문에 금방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네, 인계받은 대로 포지션 기구들이랑 융포 챙겨 놨습니다."

"그래, 잘했어…… 첫날이라 걱정돼서 좀 일찍 들어와 봤는데 역시 듣던 대로 일 잘하는구나……."

"감사합니다."

허기진 선생.

듣던 대로 친절했다.

허기진 선생님이 도와주어, 환자 포지션(position, 자세)을 잡고 수술 준비하는 과정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프리옵은 다 챙겨 놨지? 오늘 마지막 수술 환자가 엑스레이 판독이 아직 없는 것 같던데……."

"아, 이번 수술 준비 끝나고 바로 판독받아 놓겠습니다."

나는 빠릿하게 대답했다.

프리옵(pre―op).

수술 전 준비 과정을 뜻한다.

이 또한 앞으로 내가 챙겨야 할 몫이다.

"그래, 우리 환자들이 응급 수술이 많아서 프리옵이 잘 안 챙겨져 있는 경우가 많아…… 그러니까 인턴들이 잘 챙겨 줘야 돼."

솔직히 감동이었다.

레지던트가 이렇게 인턴 걱정을 해 주다니?

괜히 ‘허보살’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렇게 허기진 선생님과 함께하는 신경외과의 첫날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 * *

만약 수술실을 <극장>이라고 비유한다면.

그중에서 인턴의 역할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의 역할은 절대 아닐 것이다.

조명을 준비하고.

음향을 점검하고.

소품을 체크하는 등등.

관객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스태프들 중 하나가 아닐까.

일주일 후.

나는 내 새로운 역할에 점점 적응하고 있었다.

드륵―

13번 수술방에 들어간다.

수술실 안에는 수술방 간호사와 마취과 선생님이 환자를 기다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여기 침대 위로 올라오실게요."

환자가 수술용 침대에 올라가면, 재빨리 휠체어를 수술장 밖으로 내놓아야 한다.

그러고는 환자의 탈의를 돕고 여러 가지 모니터링 기구를 몸에 부착한다.

"환자 마킹된 수술 부위 확인합니다."

"LEE 세트 소독된 것 열겠습니다."

"테이블 낮춥니다."

"거즈팩 오픈합니다. 하나, 둘, 셋……."

수술방은 분주하게 돌아간다.

마취과 의사.

간호사.

수술방 인턴.

수술방에서 수술 준비를 하게 되는 주요 인물들이다.

여기에서 인턴인 내가 버벅대면 안 된다.

만약 내 임무를 정해진 시간 내에 하지 못하면?

컨베이어 벨트 전체가 멈추고 만다.

나 하나 때문에 수술시간이 지연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환자분, 팔에 혈압 측정하는 기구 좀 두르겠습니다."

나는 환자의 팔을 들었다.

그리고 혈압을 재는 커프를 감고, 가슴 구석구석에 심전도 단자를 각각의 위치에 색깔별로 붙였다.

‘흰건빵.’

<흰건빵>을 속으로 되뇌었다.

흰색.

검정색.

빨강색.

심전도 단자 색깔을 외우기 위한 방법이다.

심전도 단자를 의료용 투명 테이프로 덮고, 보비 플레이트(bovie plate, 의료기구)를 환자의 몸에 부착하면서 마취 준비가 금세 끝났다.

"자, 환자분 이제 주무실게요."

쉬익―

마취과 선생님은 환자의 인투베이션(intubation, 기도삽관)을 준비한다.

환자는 이내 눈을 감고 잠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략 10분이다.

‘엄청 매끄럽네.’

새삼 감탄스럽다.

인투베이션.

수술실에서는 매우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진행된다.

마치 숙련된 드라이버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에 탑승한 기분이랄까?

‘그래, 이렇게 안전하게 시행되어야 하는 게 맞지. 그동안 내가 봤던 건 너무 특이한 상황들이었어.’

그때, 어느새 튜브를 환자의 기도에 집어넣은 마취과 선생님이 손을 내 눈 앞으로 내밀었다.

"플라스터."

"예."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플라스터(의료용 테이프)를 마취과 선생님에게 건네었다.

튜브 고정이 끝나고, 환자의 혈관에 수액 라인이 추가되면서 마취 과정이 마무리된다.

"마취 끝났습니다."

마취과 선생님이 말했다.

이 말인즉슨.

<인턴, 너의 쇼타임이다.>

라는 말과 같다.

길고 긴 수술 시간 중, 내가 잠깐이나마 무대 위에 출연하는 순간이다.

‘포지셔닝은 중요해. 실수 없이 잘 하자.’

슥, 슥.

나는 재빠르게 움직이며 환자의 포지션을 잡았다.

베드를 움직이고.

높낮이를 조절하고.

환자 자세를 고쳐 잡고.

융포로 환자의 몸 아래에 쿠션을 받치고.

등등.

이렇게 포지션까지 잡고 나면, 환자는 비로소 소독을 거쳐 수술을 받게 된다.

인턴이 환자를 수술방으로 옮기고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 일명 카인(car―in) 과정은 여기까지다.

"휴우."

나는 무대에서 퇴장했다.

수술실 복도에서 잠시 한숨을 돌렸다.

<공기>처럼 일해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수술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혹시 이러다 갑자기 짠 하고 환자의 미래가 보이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신경외과에서 별다른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다 좋다.

다 좋은데…….

약간 심심하다.

하루가 너무 단조롭달까?

"좀 심심하네."

침대에 누운 채 그렇게 말하자, 위층에 누워 있던 근욱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얼씨구, 일중독이냐? 남들은 힘들다고 난리인데 너는 아직도 일이 부족해?"

물론 그런 건 아니다.

지금도 충분히 바쁘다.

타이밍이 안 맞으면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것은 매한가지다.

"이번 달은 왠지 반복적인 일만 하는 것 같아서."

"그게 정상이야 인마! 그동안 네 인생이 지나치게 다이내믹했던 거라고."

그런가?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동안 내가 너무 자극에 물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강남역 사건.

징계위원회.

전쟁 같던 섬망.

무의촌.

양송이 환자 등등.

남들이 10년 동안 겪는 이벤트를 몇 달 만에 한꺼번에 겪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수술방에서 카인 카아웃 계속하다 보면 무슨 공장에서 일하는 거 같지 않냐?"

"맞아. 큰 병원이라서 그런지 수술이 무슨 공장에서 찍어 내는 것처럼 엄청 바쁘게 돌아가."

"환자 한 명, 한 명 기억도 잘 안 나."

수술방 인턴.

환자와 접점이 없다.

수술실에 들어가며 마취하기 전까지 잠깐 대화하는 정도.

그 외에는 오로지 반복적인 작업이다.

환자1 카인 & 카아웃.

환자2 카인 & 카아웃.

환자3 카인 & 카아웃…….

그렇게 하루가 끝난다.

나는 찰리채플린의 영화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게 아마 <모던타임즈>였던가.

컨베이어 벨트에 부속품처럼 딱 붙어서 나사를 조이는 장면이 유명하다.

어쩌면 지금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내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욱아. 나는 환자랑 소통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

"……."

"그런데 수술방은 생각보다 삭막하고 건조한 공간인 것 같아."

"……."

"나중에 외과의사가 돼도 똑같을까? 환자 얼굴은 기억도 안 나고, 그냥 매일 하는 수술만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걸까?"

근욱이는 대답이 없었다.

내 질문이 너무 진지했나?

잠시 후 위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쿠르르르……."

잠든 거냐?!

에라, 됐다.

나는 이불을 끌어 올려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단조로운 일상을 즐기기로 했다.

‘이번 달은 스무스하게 흘러가겠네. 수술방 준비의 기본적인 부분을 배우는 데 집중하자.’

하지만,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발생했다.

7월의 어느 날 밤.

막 운동을 한 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연서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연서] : 오빠 오늘 오프?

[선한] : 어 왜?

[연서] : 지금 병원 앞 코다리 술집으로 나올 수 있어요?

술집이라니?

지금 시간이 10시다.

이 야심한 시각에 갑자기 연서가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 걸까?

평소에는 없던 일이었다.

"뭐야. 누군데?"

근욱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내 핸드폰 화면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헐 뭐야. 너 연서랑…… 일 끝나면 술집에서 몰래 둘이서 만나는 사이였어?!"

그런 거 아니다, 인마.

나는 흥분한 근욱이의 얼굴을 옆으로 밀어내고 답장을 보냈다.

[선한] : 무슨 일인데?

[연서] : 저 소담 언니랑 둘이 나와 있는데 언니가 너무 많이 취했음 ㅠㅠ 저 혼자 부축 못 할 것 같아요

[선한] : 소담이가 취했다고?

의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담이는 술을 거의 안 마신다.

기껏해야 한두 잔 정도.

심지어 다 같이 치킨을 먹을 때도 항상 조용히 닭만 뜯던 소담이었다.

그런 소담이가 만취 상태라니?

왠지 느낌이 심상치 않은데…….

나는 답문을 보냈다.

[선한] : 알았어 근욱이 데리고 금방 갈게

그러자 근욱이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야, 나는 왜 끼워?"

"같이 좀 가자."

"귀찮아."

"만약 얘가 정신 잃었으면 나 혼자 옮기기 힘들 거 같아서 그래. 근육 뒀다 뭐 할래?"

내 말에 근욱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소담이 몸무게 정도는 한 팔로도 들 수 있지."

역시 근욱몬.

헬스 중독자다운 대답이었다.

이럴 때마다 이 녀석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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