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93화 (93/241)

#93 전세 역전(2)

"성추행?"

"처음 들어요?"

"응. 추근덕 선생님이 펠로우 중에서 제일 성격 더럽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소담이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펠로우(fellow).

전임의, 임상강사 등으로도 불린다.

다시 한번 대학병원 의사들의 진화 단계를 그려 보자면 아래와 같다.

인턴

→ 레지던트

→ 펠로우

→ 교수

레지던트 3~4년 과정을 마친 의사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1) 대학병원을 떠난다.

2) 대학병원에 남는다.

즉 간단히 말하자면, 레지던트들이 대학병원에 남는 경우 펠로우로 진화한다고 볼 수 있다.

교수 바로 아래에서 다양한 일을 수행해야 하기에, 펠로우들은 스스로를 ‘펠노예’라는 단어로 부르기도 한다.

물론 그래 봤자 인턴인 우리보다는 한참 위다.

"추근덕이 대체 어떤 사람인데 그래?"

"원래 창양대병원에 있던 사람인데 레지던트 마치고 바로 우리 병원으로 왔나 봐요."

"창양대?"

"네. 그쪽에서 악질로 유명했다던데요? 그런데 또 논문은 엄청 열심히 써서 우리 병원으로 올 수 있었나 봐요."

연서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충 들어도 추근덕 선생의 이력은 화려했다.

멱살을 잡는 건 기본.

맘에 안 들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치거나.

소위 ‘조인트를 깐다’고 표현하는 정강이 차기까지.

"심하네. 영상의학과에는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 드물다고 들었는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대학병원에는 특유의 수직적인 조직문화가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폭력이 악습처럼 남아 있는 곳도 있다.

특히 일이 거칠고 남자들이 많은 과(科)는 그런 악습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문화들이 사라지고 있으며, 특히 연국대병원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 폭력?

게다가, 써져리(Surgery, 수술)과(科)도 아닌 영상의학과에서?

믿기 힘든 일이었다.

"폭력도 폭력인데,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여자들한테 하는 짓이었대요."

연서의 말을 들어 보니 이쪽은 더 이력이 화려했다.

은근슬쩍 손잡기.

몸매 품평하기.

단둘이 술 마시러 가자고 들이대기 등등…….

"정말이야?"

"미친…… 이름값 하네."

근욱이와 나도 혀를 내둘렀다.

간략하게 요약된 이야기만 듣는데도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때, 문득 아버지가 나에게 말했던 명언이 떠올랐다.

<원래 나쁜 놈들치고 한 가지만 하는 놈은 없는 법이다.>

<그게 무슨 말인데요 아버지?>

<장사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 보면은, 가끔 질 나쁜 놈들이 있는데…… 가만 보믄 그런 놈들은 한 가지만 나쁜 것이 아니더라고!>

추근덕 선생이 딱 그런 케이스인 것 같다.

갑질, 폭력, 성추행 등등.

한마디로 안 좋은 점만 가득 모아 놓은 종합선물세트다.

앞으로 영상의학과에서 한 달을 보내야 하는 소담이의 얼굴이 더욱 침울해진다.

"나 이번 달 괜찮을까……?"

"에이. 설마 언니한테 그런 짓거리를 하겠어요?"

연서가 소담이를 위로했다.

부원장님의 딸, 로얄 중의 로얄.

그러니, 아무리 추근덕이라도 소담이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소담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하다.

소담이는 영상의학과를 진지하게 진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고작 한 달이 아니라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시달릴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이번 달 모두들 무사히 잘 넘겨 봅시다!"

"수고!"

드르륵―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그렇게 다 함께 식당을 나서기 전, 나는 풀이 죽어 있는 소담이에게 말했다.

"소담아."

"응?"

"혹시 내가 도와줄 일 생기면 말해."

"으응…… 고마워 선한아."

그렇게 말하는 소담이의 목소리가 개미 기어가는 듯하다.

벌써부터 걱정된다.

과연 기가 약한 소담이가 이번 달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띠잉―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늘부터는 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당장 자기 코앞의 일만 챙기기도 바쁜 인턴생활이다.

* * *

Q. 병원에 있는 과를 둘로 나누자면?

= 수술과 / 비(非)수술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이를 나누는 기준은 ‘수술방’에 들어가느냐 아니냐로 나뉜다.

수술방(OR, Operating Room).

일부 서양권 국가에서는 Operating Theater라고 불리기도 한다.

씨어터.

그러니까 극장이라는 말이다.

매일매일 한 편의 영화가 펼쳐지는 곳.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수술을 몇 번이나 받게 될까?

그 수술에는 각각의 사연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 환자의 사연에, 의료진들의 축적된 경험에서 나오는 의료 기술들이 함께 뒤섞인다.

그렇게 하나의 수술이 영화처럼 완성되는 곳, 그곳이 바로 수술방인 것이다.

그리고 7월.

나의 NS(Neuro―Surgery, 신경외과) 스케줄이 시작되면서, 나는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드디어 수술방 첫 경험이다!’

생각만 해도 손이 근질근질했다.

나는 아직 인턴을 시작하고 제대로 된 수술방 경험을 하지 못했다.

흉부외과에서도 병동 환자들을 보는 주치의 역할만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 봤자 인턴이라 대단한 일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기대되네.’

월요일 아침.

나는 새로운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남자 탈의실에 가운을 벗어놓고 수술실 복도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옆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깜짝이야!

인기척이 없어서 놀랐다.

얼굴이 창백하고 마른 남자였다.

마치 유령처럼 등장한 남자는 살포시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너 이번 달에…… 우리 NS 인턴이라면서? 얘기는 많이 들었어…… 나는 허기진이라고 해."

그렇게 말하며 수수깡처럼 마른 손을 내민다.

뼈밖에 없다.

잘못 쥐면 부러지겠는데?

나는 그의 움푹 파인 볼살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인계장에 적혀 있던 내용들을 떠올렸다.

[R2 허기진]

―NS 2년 차 레지던트 선생님. 몸이 너무 마르셔서 발걸음 소리가 안 나니까 깜짝 놀라지 말 것. 엄청 착하심. 허보살.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조심스레 마주 쥐고 악수했다.

"안녕하세요. 신선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동안 네 이름 많이 듣기는 했어…… 이전에 수술방 턴 돈 적 있었니?"

"아뇨, 이번이 첫 수술방 턴입니다. 저번 달까지는 주로 병동이랑 응급실 돌았었어요."

내 말에 허기진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술방의 기초적인 일들은 인턴 때 제대로 배워 놔야 돼.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얼마든지 나한테 물어보고……."

목소리에 힘이 없다.

금방이라도 공기 중으로 증발할 것 같은 인상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나를 향한 반가운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이참에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 인계장에는 수술 준비하고, 환자를 수술방에 넣고 빼는 일만 자세히 적혀 있던데. 혹시 수술 어시스트(assist, 보조) 서는 일도 있을까요?"

그러자 허기진 선생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인턴의 일은 인계장에 있는 그게 다야……."

그리고 특유의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마. 수술 준비하는 게 쉬운 일처럼 보이지? 그런데 수술방 처음이면 그것만 잘해 내기도 쉽지 않을 거야……."

그의 말이 맞다.

여태까지 내가 배웠던 것은 모두 병동 잡(job)이었지만 이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3월 첫 턴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팁 하나 미리 말해 줄까?"

"예."

"자고로 수술방 인턴은 공기 같아야 하는 거야…… 다른 선생님들이 네 이름을 모를수록 좋아."

공기?

그게 무슨 뜻이지?

나는 의아해했지만, 허기진 선생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곧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될 거야. 아무튼 오늘 13번방 들어오는 거지? 이따 보자고……."

허기진 선생님은 흐느적흐느적 사뿐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내가 처음 만난 신경외과 선생님, 허기진.

그동안 만났던 레지던트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선생님이었다.

‘이렇게 신경외과 시작이구나. 수술방에서도 잘해 보자!’

나는 1회용 수술 모자와 마스크를 질끈 동여맨 채 13번 수술방으로 걸어갔다.

* * *

드륵―

수술실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서늘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수술실은 세균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20~22℃의 온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반팔의 수술복 차림으로는 조금 춥게 느껴진다.

팔을 타고 오르는 한기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가 연국대병원의 수술실이구나.’

나는 새로운 기분으로 수술실을 둘러보았다.

무영등(無影燈)과 베드.

전자식 수술도구.

환자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위한 각종 기기들.

최신 시설이어서 그런지, 모교에서 느꼈던 수술방의 느낌보다 훨씬 청결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오직 외과 수술을 행하는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무균의 공간.

내가 외과의사가 된다면, 앞으로 평생 집처럼 여겨야 할 풍경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아직 수술 전이라도 분주하구나.’

주위에 사람이 많다.

아직 환자가 들어오기 전인데, 4―5명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술을 준비하는 마취과 의사들은 마취기구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수술방 간호사들은 수술기구들을 세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들 각자의 일로 바빠서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아 참. 이 사람들 구경할 게 아니지. 나는 나대로 준비를 해야지!’

나는 인턴만의 수술 준비를 혼자 시작했다.

일단 환자의 수술 포지션(position, 자세)을 잡을 때 쓰이는 포지션 기구들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

터억―

마치 헬스장에서 운동하기 전에 아령이나 기구들을 미리 세팅해 두는 것처럼, 쇳덩어리로 된 포지션 기구들을 환자 베드 주위에 내려놓았다.

‘다음은…… 그래, 융포를 챙겨야지!’

융포.

융포는 말 그대로 초록색의 두꺼운 보자기 같은 천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환자의 포지션을 잡은 뒤, 이를 받쳐 주는 쿠셔닝을 위해서 융포가 사용된다.

융포가 몇 개가 필요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노끈에 묶여 있는 융포 더미 여러 개를 미리 챙겨서 수술방에 가져다 두어야 한다.

‘저기구나! 융포를 모아 두는 곳이.’

수술실 복도로 나와 고개를 돌려 보니, 한편에 커다란 쇳덩어리로 된 컨테이너 박스 같은 서랍장이 보였다.

벌써 서랍장 주위에는 인턴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융포 더미 몇 개를 어깨에 짊어지고 각자의 수술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쌀가마니를 어깨에 둘러메고 일하러 가는 머슴들을 보는 것 같다.

나도 그 무리 속으로 재빨리 합류했다.

융포는 5개씩 끈으로 묶여 덩이째 쌓여 있었다.

‘3뭉치 정도 가져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융포 더미에 손을 뻗으려는 찰나.

터억―

옆에서 희멀건 손이 불쑥 끼어들더니 내 융포를 붙잡는다.

"이거 제가 찜한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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