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숨(breath)(21)
"아프긴 한데…… 기분은 괜찮아요."
송이가 갑자기 생뚱맞은 말을 한다.
기분이 괜찮다고?
응급실에 두 번이나 오는 게 유쾌한 경험은 아닐 텐데.
"사실 아까 소리 지르고 나니까 속이 후련했거든요. 엄마한테 대놓고 반항해 본 거 처음이었는데……."
나는 송이의 말에 픽 웃었다.
그런 이유였어?
아까 빽 하고 소리 지르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동안 엄마한테 얼마나 억눌리고 살았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엄마가 저 때문에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 처음 봐요."
힐끗―
나는 송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멀찍이 출입문 앞에 송이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자식 걱정에 눈시울이 빨개져 있다.
남편과 통화를 하는지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데, 한눈에 봐도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보인다.
"솔직히 그동안 엄마한테 서운했었는데…… 그래도 엄마가 내 성적만 신경 쓰는 건 아니었나 봐요."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다양한 가족들을 보게 된다.
그중 몇몇은 오히려 안 좋았던 관계가 회복되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송이와 엄마의 관계도 이참에 개선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선생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뭘?"
"혹시 제가 갑자기 반진호를 영접해서 너무 두근거린 나머지 이렇게 아프게 된 거 아닐까요?"
"뻘소리하는 거 보니까 기운이 아주 없진 않은가 보네."
"헤헤."
송이는 힘없이 웃었다.
"이제 다른 선생님이 내려와서 봐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심호흡 천천히 하고 있어."
나는 그렇게 송이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혹시 검사가 너무 늦어 버린 것은 아닐까?
폐가 이미 썩어 버려서 패혈증으로 진행했을지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송유주 선생님이 올 때까지 응급실 스테이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자 회전의자에 앉아 있던 여봉철이 빙글 몸을 돌리며 내게 말한다.
"신선한이. 니는 무슨 응급환자 달라붙는 자석이가?"
"예?"
"강남역에서 소개팅하다가 환자 주워 오고, 공연 보다가 환자 주워 오고…… 내가 니같이 바쁜 인턴은 처음 본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냥 적당히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될 수도 있었는데…….
나는 그게 잘 안된다.
고집인지, 오지랖인지.
무엇보다, 의사로서 환자를 돕는 일은 내게 당연한 일이다.
"엑스레이 떴다!"
그때 여봉철이 모니터에서 송이의 EMR(전자의무기록)을 열람했다.
나도 얼른 여봉철과 함께 흑백사진을 확인했다.
"쓰읍. 환자 폐가 와 이라지? 딱 절반이 허옇게 변하고 있는데…… 뭔지 잘 모르겠는데."
여봉철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래도 사진 한 장으로는 판독이 어려운 모양이다.
곧 옆에 있던 의사들도 모여들어 심각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이건 로바 뉴모니아(lobar pneumonia, 폐엽 폐렴) 온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원인이 뭘까…… 혹시 수술 부위에 문제가 생긴 건가?"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묘하게 엇나가고 있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단순한 폐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 응급실에서 정답을 알고 있는 의사는 오직 나뿐이었다.
‘답답하네.’
입이 간질간질하다.
정답을 알아도 대놓고 말을 못 하다니…….
마치 극장에서 다들 추리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데, 나만 뒷좌석에서 결말을 알고 있는 느낌이랄까?
"뭐, 일단 CT 함 찍어 봐야 알겠네. 교수님한테도 말씀드리자."
곧 레지던트들이 흩어지고 여봉철 선생은 전화를 들어 올린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환자의 증상을 최대한 빠르게 전할 수 있을까?
‘아!’
그때, 나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로바 토젼(lobar torsion) 진단을 위한 확실한 방법.
바로 내시경을 통해 꼬여 있는 기관지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선생님, 기관지 내시경도 빨리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자 여봉철 선생이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내시경? 내시경은 갑자기 와?"
"가래로 기관지가 막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아까 환자 숨소리가 너무 거친 게 마음에 걸렸거든요."
나는 토젼을 언급하는 대신 다른 핑계를 말했다.
여봉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기내과에 연락해서 브롱코(bronchoscopy, 기관지 내시경) 해 보는 게 나쁠 건 없지."
역시 여봉철 선생!
성격이 시원시원하다.
인턴인 내 말도 쿨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여봉철은 막 전화기를 들어 올리다가 나를 째려보며 말한다.
"근데…… 신선한이 니 많이 컸데이, 내한테 훈수도 다 하고? TS(흉부외과) 가더니 대가리 좀 컸나 보네?"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4월에 여봉철 선생님한테 많이 배워서 큰 거죠."
"새끼, 말이나 몬하면."
짜악―
여봉철 선생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등짝을 치고는 호흡기내과 당직의에게 연락했다.
"예, 수고하십니다! 여기 응급의학과인데…… 아, 범수 니가 오늘 당직이가?"
여봉철의 말투가 친근하게 바뀐다.
김범수 선생.
김뱀의 본명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에 김뱀 선생님이 호흡기내과에 있다고 했었지?
지난번에 소담이를 통해서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가꼬 브롱쿠스(bronchus, 기관지) 한번 봐주야 안 되겠나! 어 그래, 준비해 놓을 터이 퍼뜩 내려온나!"
딸깍.
여봉철은 상황을 빠르게 설명한 뒤 전화를 끊고는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헤이, 하필 유주가 당직일 때 범수도 당직이네. 이라믄 좀 골치 아픈데."
"두 분이 왜요?"
"아니 둘 다 실력은 좋은데…… 붙여 놓으면 좀 곤란해지거든. 예전에 안 좋은 일도 있었고."
여봉철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콧등을 긁적였다.
곤란해지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잠시 후, 나는 그 말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 * *
잠시 후.
휘이잉―
응급실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송유주.
김뱀.
둘 사이에는 서리가 낄 것같이 차가운 기류가 흐른다.
두 사람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6월의 계절이 다시 겨울로 바뀌는 듯하다.
"환자 어디―"
"환자 어딨어?"
김뱀과 송유주가 여봉철을 향해 동시에 입을 열더니 서로를 째려본다.
"뭐야?"
"너야말로 뭔데."
"너도 여봉철한테 볼일 있어?"
"……설마 같은 환자냐?"
두 사람의 사나운 시선이 이번에는 여봉철에게로 모인다.
벌써부터 분위기가 안 좋은데?
여봉철은 난처한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그래, 같은 환자 맞다."
"얘가 폐 수술 받은 환자에 대해서 뭘 안다고 불렀어?"
송유주가 대뜸 김뱀을 가리키며 묻는다.
움찔―
김뱀의 눈썹이 치솟는다.
자연스럽게 선제공격을 당해 버린 모습이다.
물론 김뱀도 질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꾸한다.
"……환자 이름도 제대로 못 외우는 인간한테 그딴 말 들으니까 우습네. 너야말로 수술방에서 칼로 째는 거 말고 아는 거 있냐?"
곧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파지직!
둘 사이에 스파크가 일어난다.
독 vs 얼음이랄까…….
서로 상극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에헤이. 느그 또 싸우나? 하이튼 둘이 만났다 하면 와이라노! 예전부터 변하지를 않네."
여봉철이 둘 사이를 중재하려 했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를 극도로 싫어하는 표정이다.
‘정말로 사이가 무척 안 좋은가 보네.’
소위 말하는 <연국대 순혈 코스>.
예과 2년.
본과 4년.
거기에 인턴과 레지던트까지, 전부 합치면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내게 된다.
그만큼 분명 둘 사이에도 많은 일이 있었으리라.
아무튼, 그건 그거고.
지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선생님들, 이쪽입니다!"
나는 재빨리 송이가 있는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송이에게는 지금 1분 1초가 급하니까.
우리는 환자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나저나 CT 봤는데, 기관지 내시경 하자는 건 너무 빠른 결정 아니냐?"
김뱀의 물음에 여봉철이 대답했다.
"어어. 마침 선한이가 가래에 기관지 막히지 않았을까 하길래.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아서 연락했다 아이가."
그러자, 김뱀이 나를 째려보더니 피식 조소를 흘린다.
"또 너냐? 하여간 인턴 주제에 시건방지게…… 내가 몇 번을 말해도 바뀌지가 않냐, 너는?"
그때, 송유주가 웬일로 내 편을 들었다.
"흉부외과 인턴이 흉부외과 환자에 대해서 의견을 내는 게 뭐가 잘못이지?"
파지직!
다시 2차전이다.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일어나려 한다.
"너네 과 인턴이라고 감싸는 거냐?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인턴 주제에 건방지게 디씨젼(decision, 판단과 결정)을 막 내려도 된다고 생각해?"
김뱀의 빈정거림에 송유주는 태연히 대답한다.
"그 인턴 말 듣고 CPR 환자 목숨 겨우겨우 구한 게 누구였더라? 기억력이 안 좋은 모양이네."
콰르릉―
이번에는 둘 사이에 스파크 정도가 아니라 번개가 치는 것 같다.
송유주 선생님은 아마도 3월 달 PCI 환자 사건 때를 말하는 모양이다.
이건 무슨 삼보일배도 아니고…….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싸우는 것 같다.
대체 왜 저렇게 사이가 나쁜 거야?
"선생님들. 지금 환자 검사가 급한 것 같습니다."
나는 듣다못해 끼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기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환자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면서도 언쟁이 끊이지 않는다.
급기야 두 사람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야. 네 입으로 브롱코(bronchoscopy, 기관지 내시경)를 해야 한다고 판단한 이유를 말해 봐."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이번에는 또 얼마나 잘난 판단을 하셨는지 궁금하네."
왜 갑자기 둘이 싸우던 불똥이 나한테 튀는 기분이지?
‘둘 사이에 끼기는 싫은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고민할 시간이 아깝다.
그냥 말하자.
이제 CT도 찍었으니, 지금은 송이의 증상을 빨리 밝히는 게 중요하다.
"토젼(torsion, 꼬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토젼?"
김뱀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건 어디서 주워들었냐. 토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아? 하여간 이래서 어설프게 아는 놈들이……."
그때 송유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김뱀의 말허리를 끊었다.
"가능성 있지."
"뭐?"
"CT 사진 못 봤어? 우중엽으로 가는 기관지뿐만이 아니라, 정맥도 길이 막혀 있는 거."
"웃기지 마. 퇴원했던 환자한테 갑자기 토젼이라고? 난 여태까지 본 적도 없는데?"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어느새 우리는 송이가 누워 있는 베드 앞에 다다랐다.
"그럼 누구 말이 맞는지 한번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