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89화 (89/241)

#89 숨(breath)(20)

송이의 얼굴이 하얘진다.

그럴 만도 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도끼눈을 한 송이 엄마였으니까.

"어, 엄마?"

엄마의 등장에 송이는 깜짝 놀란 표정이다.

나도 놀랐다.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

송이가 집에 이야기를 흘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너, 내가 네 SNS 주소도 모르는 줄 알았지?"

"헉!"

송이가 숨을 삼켰다.

<망 했 다>

그렇게 세 글자가 송이의 표정에 새겨진다.

그동안 SNS 계정을 엄마에게 몰래 사찰당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저번에 콘서트를 갔을 때도 이런 식으로 들통이 났으리라.

"보자 보자 하니까……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뭐? 아무리 고3이어도 반진호는 죽어도 못 잃어? 현생 포기하고 덕질하러 감?"

송이 엄마가 SNS에 써 놓은 문장을 그대로 읊는다.

그러자 송이의 표정이 쩌적 하고 돌처럼 굳는 것이 보인다.

10대들의 3대 악몽.

―엄마가 내 하드디스크 뒤지기

―엄마가 내 SNS 뒤지기

―엄마가 내 톡 뒤지기

그리고 그걸 본인의 눈앞에 전시하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다.

"너 시험 앞둔 고3이 학원 가야 할 시간에 지금 이런 데나 기웃거리고 있어? 제정신이야?"

그러자 송이가 머뭇거리면서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엄마, 여기서 공연 잠깐만 보고 학원 가려고 했어…… 진짜야."

"하이고, 퍽이나."

"진짜라니까!"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엄마 몰래 콘서트 갔다가 폐에 구멍 난 게 며칠 전인데!"

"아, 목소리 좀 줄여…… 쪽팔려 죽겠어 진짜."

송이의 얼굴이 빨개진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연에 정신이 팔려 이쪽을 쳐다보지 않고 있다.

나는 듣다못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송이 어머님!"

그러자 송이 엄마가 홱 하고 나를 바라본다.

"송이 제가 병원으로 불렀습니다. 잠시 이쪽으로 와서 얘기 좀 하시죠."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인파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으로 이동했다.

"아니 선생님. 대체 뭐길래 바쁜 고3을 오라 가라예요. 우리 송이 시험 망하면 선생님이 책임질 거예요?"

송이 엄마는 나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제가 시험을 책임질 수는 없지만, 의사로서는 책임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뭘요?"

"송이 빨리 검사받아야 합니다."

"아니 무슨 놈의 검사를 또 받아요? 병원 퇴원한 지 며칠 됐다고."

내 얘기는 듣지도 않는다.

마치 꽉 막힌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랄까?

나는 옅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보호자분,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문제가 커질 수 있어요. 지금 송이 심박수와 호흡수가 얼마고, 정상수치랑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아세요?"

움찔.

송이 엄마는 내 낮아진 목소리에 멈칫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오히려 더욱 완강하게 강짜를 부린다.

"아, 아무튼 안 돼요! 오늘 저녁에 잡혀 있는 학원 특강이 얼마짜리인지 알아요?"

"……."

"송이 너 이리 와. 곧 학원 시작할 시간인데 이런 데서 낭비할 시간 없어."

송이 엄마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딸의 손목을 홱 잡아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송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쫌! 그만해!"

우리는 놀란 눈으로 송이를 쳐다보았다.

쌔액, 쌔액.

송이는 흥분한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평소의 얌전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가뜩이나 상태가 좋지 않았던 아이가, 감정이 격해지면서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하고 있다.

"너…… 너 엄마한테 소리 지른 거야?"

송이 엄마가 말을 더듬거린다.

그동안 이렇게 딸이 자신에게 소리를 지른 게 처음인 모양이다.

그런데 송이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엄마랑 있으면 숨을 못 쉬겠어!"

"뭐?"

쩌적.

이번에는 송이 엄마의 표정이 굳는다.

분노, 서운함, 놀람…….

많은 감정들이 순식간에 그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간다.

"나 수술 끝나고 아직도 아파. 근데 엄마한테 미안해서 괜찮은 척하고 있었던 거란 말이야!"

"……."

"아무리 수험생이지만 나도 사람이잖아. 엄마는 내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준 적 있어?"

"……."

"물론 내가 이번에 거짓말한 거, 잘했다는 건 아닌데. 그런데……."

송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마치 둑에 막혀 있던 물줄기가 터져 나오는 것 같다.

"그냥…… 나 가끔 숨만 좀 쉬게 해 주면 안 돼?"

뚝뚝.

기어코 눈물이 떨어진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꾹꾹 눌러 왔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온 듯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송이의 숨소리가 이상하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지저분한 숨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콜록, 콜록."

"어머, 얘 왜 이래. 송이야!"

송이 엄마는 그제서야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본다.

"서…… 선생님, 얘 왜 이래요?"

"잠시만요."

나는 당황한 송이 엄마를 제치고 송이의 상태를 살폈다.

송이의 기침에서 피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나는 직감했다.

심각한 상황이다!

송이는 수술 후 내가 직접 쭉 지켜봤던 환자다.

지금 눈앞의 피 섞인 가래는 정상이 아니었다.

수술 직후에 나오는 피 섞인 가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옅어지기 마련인데…….

‘이건 단순히 폐엽절제술 후에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야. 분명 폐에 큰 문제가 생긴 거야!’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증상이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때마침 사람들의 환호성이 무대 쪽에서 울려 퍼졌다.

<숨을 쉴 수 없어!>

"꺄아아―"

모자를 벗어 던진 반진호가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앞좌석에서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무대를 이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소리에 송이의 기침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송이야. 응급실로 가자. 걸을 수 있겠어?"

송이는 파리해진 얼굴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송이를 부축했다.

송이의 몸은 뜨거웠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열을 재 보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못해도 38℃는 될 것 같았다.

‘토젼(torsion, 비틀림)이 이미 시작된 거야. 빠른 치료가 정답이다!’

나는 송이를 부축한 채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만약 늦으면, 셉시스(sepsis, 패혈증)으로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고 송유주 선생님이 말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때마침 등장한 반진호를 구경하기 위해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만요, 좀 비켜 주세요!"

우르르―

나는 마치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가 된 기분으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때 송이 엄마가 황급히 나를 따라오며 묻는다.

"선생님. 우리 송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요? 예?"

조금 전까지의 고압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다.

평소와는 다른 송이의 숨소리, 얼굴빛, 그리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방울…….

송이 엄마가 알고 있던 딸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야, 양송이. 너 왜 그래…… 병원 가자. 아니, 여기가 병원이지."

송이 엄마는 경황이 없는지 횡설수설한다.

급기야는 울먹거리며 나한테 매달린다.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선생님. 우리 송이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여차하면 정말 나에게 무릎을 꿇기라도 할 기세다.

나는 내 팔을 붙잡는 송이 엄마의 손을 떼어 놓고 말했다.

"진정하세요. 지금 외래는 닫혀 있고, 응급실로 가야 돼요."

"으…… 응급실이요?"

"송이는 제가 데려갈 테니, 저기 원무과 가서 응급실 수속부터 밟아 주세요!"

송이 엄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잉―

응급실의 문이 열린다.

호흡을 가삐 내쉬는 송이와 함께 응급실로 들어서자, 스테이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마침 근무를 보고 있던 여봉철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신선한이 아이가? 무슨 일이고?"

"선생님, 이 환자 좀 봐주세요!"

나는 급하게 외쳤다.

여봉철 선생은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부축해 온 환자를 살펴보며 말했다.

"가만 보자, 낯이 익은데…… 혹시 예전에 뉴모(pneumothorax, 기흉)로 왔던 그 환자 아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역시 여봉철 선생은 눈썰미가 좋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환자들이 들락거리는 곳이 응급실인데, 그 와중에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니.

"흉부외과에서 수술받았던 환자인데, 검사 한번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호자는 어디 가고 니가 데리고 왔어?"

"보호자분은 지금 환자 등록하고 있어요."

"치프 컴플레인(chief complaint, 주 호소 증상)이 뭔데?"

"발열을 동반한 객혈이요. 엑스레이 찍어 보는 게 급할 것 같아요!"

우리는 헐떡이는 송이를 간이침대에 눕혔다.

"흉부외과 노티(notification, 알림)는 돼 있는 기가? 네가 TS(흉부외과) 연락하고 데리고 온 거재?"

여봉철 선생님은 내가 데리고 왔으니, 당연히 흉부외과에 연락이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니요. 그냥 로비에서 자선공연 구경하러 갔다가, 이상해 보여서 데리고 온 거예요. 제가 지금 연락하겠습니다!"

"뭐? 공연 구경하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여봉철 선생은 직감한다.

"내가 환자 살펴보고 정식 노티 할 꺼니까, 선한이 네가 미리 말 좀 해 놔래이!"

"예, 알겠습니다!"

여봉철은 급하게 송이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사이, 나는 오늘의 당직 선생님인 송유주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저 인턴 신선한입니다. 며칠 전에 퇴원했던 양송이 환자 기억하시죠? 이 아이가 토……."

아차!

토젼(torsion)이라고 말할 뻔했다.

아직 검사도 안 한 상황.

토젼이라고 말해 버리면 어떻게 알았는지 추궁당할 것이다.

고작 인턴인 내가, 환자의 안색만 보고 폐가 돌아 버린 걸 알 리가 없으니까!

아니, 이건 어떤 흉부외과 의사가 와도 안색만 보고 맞힐 수는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은퇴한 백의신이 의료현장으로 돌아온다면 모를까…….

<토 뭐? 보미팅(vomiting, 구토증상) 했다고?>

수화기 너머에서 송유주의 의아한 듯한 질문이 들려왔다.

나는 얼른 말을 바꾸어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객혈을 하고, 열도 나고 호흡수가 빨라서 응급실로 데리고 왔습니다."

"데려오다니, 어디서?"

"자선공연 구경하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공연?"

"……."

"일단 간다."

뚜욱―

송유주는 짧게 말하고 끊었다.

그사이, 다른 인턴이 와서 심전도검사를 했고, 흉부 엑스레이검사와 피검사가 진행되었다.

* * *

잠시 후.

송이는 엑스레이를 찍은 뒤 다시 응급실 베드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하고 있으니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진 표정이다.

하지만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송이야. 지금 좀 어때?"

나는 골똘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송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잠시 후, 송이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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