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숨(breath)(18)
"반진호한테 연락을 한다고?"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소담이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아, 별건 아니고…… 예전에 DM(다이렉트 메시지) 주고받은 적이 있거든."
그렇게 얘기하며, 소담이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
소담이의 SNS 계정 메시지에, 놀랍게도 반진호와 짧게 주고받았던 대화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몸은 괜찮으세요?
―헉…… 혹시 그때 연국대병원 그 선생님?
―네. 그 뒤로 불편하신 건 없는지 걱정돼서 연락드렸어요.
―그날 죄송했어요 선생님 ㅠㅠ 제 몸이 제 맘대로 컨트롤되는 게 아니라서 흑흑―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제가 더 죄송해요 ㅠㅠ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은 흔적이 있다.
심지어 그 뒤로도 몇몇 대화가 이어진다.
나는 놀란 눈으로 소담이를 쳐다보았다.
"너 반진호랑 메시지 주고받는 사이었어?"
"혹시나 해서 보냈는데 답장이 오더라고."
소담이의 얼굴이 빨개진다.
살다 보면 별 해프닝이 다 인연이 되는 경우도 있다.
워낙 황당하고 강렬한 사건이었던 만큼, 서로 의외의 인연이 생겼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메시지 아래 부분을 봐 봐."
소담이는 화면을 내렸다.
―특히 소아과 돌다 보면 애들한테 반진호 씨 얘기 많이 들어요.
―아 정말요?
―네.
―저 사실 데뷔할 때 그런 거 꿈이었는데 ㅋㅋㅋ 병원에서 아이들을 위한 깜짝 라이브 공연 같은 거요!
―저희 병원 그런 거 좋아해요. 다음에 한번 오세요.
―ㅋㅋㅋ 넹 다음에 깜짝 방문해서 공연 한번 할게요. 그때 선생님도 관객으로 꼭 오세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메시지 한번 해 볼까? 마침 우리 병원에서 수요일에 자선공연 있잖아."
솔깃하다.
농담처럼 시작했던 이야기인데, 왠지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만에 하나 그날 반진호가 병원에 온다고 한다면…….
그걸 미끼로 송이도 유인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일단 메시지는 보내 보자. 밑져야 본전이니까."
"뭐라고 보내지?"
"잠깐만."
나는 곧 소담이와 머리를 맞대고 반진호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했다.
물론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던져 볼 만한 떡밥이다.
과연 물까?
물었으면 좋겠다.
일단 지금은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니까.
"고맙다, 소담아."
"고맙긴. 저번에 네가 스케줄도 바꿔 줬잖아. 이렇게라도 보답해야지."
소담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옅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좀 막연하긴 하지만…… 선한이 네가 걱정된다고 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왠지 훈훈하군.
나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해 주는 친구가 있으니 든든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만 해도 몰랐다.
이때 우리가 만든 작은 변화가 눈덩이처럼 데굴데굴 굴러가서 큰 변화를 일으킬 줄은.
* * *
반진호.
꽃다운 얼굴을 가진 카리스마 래퍼.
팬들 사이에서는 신비주의적인 이미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카메라 뒤의 모습은 4차원 그 자체였다.
"대표님, 저 5일 만에 똥 쌌어요!"
덜컥!
대표실의 문이 열렸다.
책상에서 소박하게 짜장면을 먹던 대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진호야. 제발 너는 웬만하면 입을 열지 마라……. 팬들 앞에서도 그러는 건 아니지?"
고릴라 대표는 신신당부를 했다.
실제로 반진호는 소속사의 복덩이면서 동시에 골칫덩어리기도 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정말 멋있는 놈인데…….
입을 여는 순간 이미지가 와장창 깨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분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 이번 콘서트 때도 아슬아슬한 발언으로 관계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에이, 팬들 앞에서만 말조심하면 되죠."
"평소에도 말 좀 가려 가면서 해. 평소에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 거야!"
타악!
곧 젓가락을 내려놓은 대표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너 이번에 콘서트에서 또 이상한 소리 했다면서?"
"제가 뭘요?"
"뭐, 바지를 확 까서 보여 드릴 수도 없고? 네가 무슨 너훈아 선배님인 줄 알아, 인마!"
버럭!
고릴라가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반진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한다.
"그게 뭐 어때서요. 고자라고 오해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시원하게 까는 게 낫잖아요."
"저, 저 미친놈…… 우리 회사 주가 박살 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박살 나긴 왜 박살 나요? 제가 한 번 까면 오히려 주가가 떡상하면 떡상했지."
"어휴,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엔터계의 거물, 고릴라 대표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또라이를 키워서 회사의 명운을 맡기게 되었을까…….
인기가 너무 많으니 내칠 수도 없고.
"근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갑자기."
"대표님, 저 자선 콘서트 참여할래요."
"아, 또 뭔 개소리야?"
"저 이번 주 수요일에 연국대병원 여기 금방 갔다 올게요!"
반진호는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연국대병원 행사의 포스터가 떠 있었다.
뭐야, 작은 행사잖아?
이런 건 어디서 듣고 온 거야?
고릴라 대표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너 연국대병원에 꿀 발라 놨냐? 그런 쓸데없는 행사 가려고 하지 말고 신곡 작업이나 시작해."
고릴라가 인상을 쓰자, 반진호가 말을 끊으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대표님 쓸데없는 거라뇨? 지금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공연이 쓸데없다고 하신 거예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대표님 실망이에요!"
"아니……."
"제가 아무리 회사에 벌어 준 돈이 많다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냉혈하게 변할 수 있어요!"
한번 무언가에 꽂힌 반진호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심지어 소속사 대표조차도.
그리고 그날, 새로운 스케줄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비밀리에 잡혔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수술 예정인 다른 환자의 CT 판독을 받기 위해 1층에 있는 영상의학과로 향하고 있었다.
띠잉―
3층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누군가 허겁지겁 올라탄다.
익숙한 얼굴.
홍보팀장님이다.
꾸벅 인사했더니, 나를 보자마자 화색을 띠며 경례를 붙인다.
"어, 자기야 오랜만!"
자기야…….
언제나 부담스러운 호칭이다.
이분은 가끔씩 나를 볼 때마다 자기야 자기야 하고 부른다.
예전에 내 얼굴을 팔아서 병원 이미지 홍보에서 재미를 톡톡히 봤던 모양이다.
나이 드신 아저씨가 자꾸 그렇게 부르니까 좀 이상하지만, 그냥 친근함의 표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홍보팀장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래 보여?"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나는 알면서도 물었다.
그러자 홍보팀장이 싱글벙글 웃다가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건 비밀인데…… 자기한테만 특별히 알려 주는 거야."
홍보팀장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귓속말로 내게 속삭였다.
"사실 다음 주에 우리 병원 암센터 공연에서 탄산소년 반진호가 섭외돼서 깜짝 출연하기로 했거든."
"반진호요?"
"알아?"
당연히 알지.
나는 속으로 웃었다.
홍보팀장은 입이 귀에 걸린 듯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우리 딸내미도 엄청 좋아하는 아이돌이거든."
"유명하긴 하더라구요."
"지금 제일 핫한 애가 우리 병원에서 깜짝 공연을 하는 거니까 엄청나게 화제가 될 거야."
"잘됐네요."
나는 장단을 맞추며 슬쩍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섭외가 된 거예요?"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그쪽 소속사에서 연락이 오잖아. 우리는 완전 땡큐지."
시나리오는 이렇다.
원래 계획대로 공연이 진행된다.
시립교향악단에서 연주자들이 찾아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연주한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마술쇼 등의 엔터테인먼트도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원봉사 아카펠라 그룹이 탄산소년의 노래를 부르며 마무리하는 것…….
여기까지는 똑같다.
그런데 그때.
랩 파트를 부르면서 반진호가 깜짝 등장하는 것이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1순위 반진호!
아마 난리가 나겠지.
이 모든 과정은 인터넷으로 생중계될 예정이다.
갑자기 규모가 커진 탓에 병원 측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스케일이 커지면서, 촬영장비와 조명부터 재점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덩달아 홍보팀장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진 것이다.
"아 참, 이건 대외비다. 어디 가서 막 말하고 다니면 안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반진호가 섭외되기까지의 과정을 안다면 홍보팀장님은 깜짝 놀라겠지?
사실 나도 놀랐다.
이렇게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줄은 몰랐거든.
그리고 그날 오후, 병원으로부터 공지 문자가 도착했다.
===
[홍보팀]
6월 27일 수요일.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자선음악회가 본관 1층 로비에서 열립니다.
조세오 씨가 MC를 맡을 예정이며, 깜짝 게스트의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많은 호응 부탁드립니다.
===
환자 한 명을 병원으로 부르기 위해서 이렇게 일을 키우게 되다니…….
하지만 그만큼 공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송이는 절대 병원으로 오지 않을 테니까.
이제 부르기만 하면 된다.
‘제발 병원으로 와라, 송이야. 엑스레이 한 번만 찍자.’
* * *
삑삑―
도어록이 열린다.
"다녀왔습니다."
"우리 딸 왔어?"
달칵―
주방에 있던 송이 엄마는 현관으로 달려 나온다.
방 2개의 오래된 아파트.
송이의 학업을 위해서 송이 가족이 4년째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이다.
저녁 9시지만 송이 아버지는 집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로 이사 오는 바람에, 왕복 2시간 반 거리의 회사에 출퇴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딸 고생했어."
"응."
"오늘 학원 수업 안 졸고 잘 듣고 왔어? 병원에 있다 오니까 적응 힘들지?"
송이 엄마는 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말투가 사근사근하다.
딸이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할 때면 한없이 천사 같은 엄마다.
"오늘 국사 8단원까지 끝내야 되는 거 알지? 너 입원한 동안 공부 못 한 거 따라잡아야 돼."
"알았어."
송이는 그렇게 얘기하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도 엄마는 계속 송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했다.
"수술 부위 좀 아픈 거 말고는 괜찮은 거지?"
"응. 좀 아프긴 한데, 견딜 만해."
"그래, 지금 큰 문제 없으니까, 시험 끝나고 연국대병원 가자. 일주일 미룬다고 별일 없을 거야."
내심 병원 외래에 제때에 보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송이에게 더욱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과일 깎아 줄까?"
"아냐 괜찮아."
"먹고 싶은 거 없어?
"괜찮대두. 나 이제 공부할게 엄마."
"우리 딸 화이팅!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엄마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송이를 응원한 뒤 방을 나섰다.
"휴우."
송이는 엄마로부터 해방된 채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이마에 땀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손으로 만져 보니 열이 살짝 나고 있었다.
시험 걱정만 하고 있는 엄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몸에는 이상징후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이상하다…… 어제부터 몸이 왜 이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