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85화 (85/241)

#85 숨(breath)(16)

밤 11시.

흉부외과 병동은 한산했다.

마침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던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선한 쌤 웬일이세요?"

"아, 레지던트 선생님들한테 여쭤볼 게 좀 있어서요."

"이 시간에요?"

간호사는 놀란 표정이다.

하긴 밤 11시니까.

"저번에는 수술도구 빌려 달라고 하더니…… 하여간 진짜 열심이셔. 선생님들 지금 당직실에 계실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 당직 선생님이 누구였지?

나는 근무표를 확인하기 위해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어라, 이 시간에 웬일이야?"

나를 부른 것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안경식 선생님이었다.

레지던트 1년 차.

첫날부터 탈곡기 교수님에게 탈탈 털리던 바로 그 사람이다.

서로 친해진 적은 없지만, 그동안 오가면서 얼굴은 많이 본 적 있었다.

‘그래, 안경식 선생님이라면 무언가 힌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1년 차 레지던트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경험이 많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막 물어보려는데, 안경식 선생이 먼저 말했다.

"마침 잘됐다. 우리끼리 먹기에는 좀 많았었는데."

"예?"

안경식 선생은 씩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어서 거부할 수 없는 한마디를 던졌다.

"족발보쌈 좋아해?"

* * *

흉부외과 당직실.

당직 레지던트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몇 개의 책상과 작은 테이블, 이층 침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제든지 환자의 EMR(전자의무기록)을 확인할 수 있도록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는 것도 보인다.

"들어와, 들어와!"

"예."

나는 안경식 선생의 뒤를 따라 당직실로 들어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당직실이구나.’

인턴인 내가 이곳을 구경하는 건 처음이었다.

크지 않은 방 여기저기에서 생활의 흔적이 느껴졌다.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피 묻은 수술복들.

넘쳐흐르기 직전인 쓰레기통.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여러 책들과 프린트해 놓은 종이들.

냉장고 겉면은 온갖 배달 음식들 번호가 적혀 있는 자석들로 가득하다.

정말 드라마 속에서 보던 그런 당직실이었다.

좋게 말하면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이고…….

솔직히 말하면 너저분하다.

물론 정신없이 바쁠 땐 내 숙소도 개판 오 분 전일 때가 많으니 별로 할 말은 없지만.

"선배님~ 야식 가져왔습니다!"

안경식이 신나게 말했다.

그러자 침대 일 층에 누워 있던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

깜짝이야.

그냥 옷 더미가 쌓여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송유주 선생님이었다.

체격이 작고 마른 편이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었다.

"너는 그 오그라드는 선배님 소리 언제까지 할래?"

"에이, 한 번 선배님은 영원한 선배님 아닙니까. 제가 의대생 꼬꼬마 시절부터 선배님을 얼마나 존경―"

"쌉소리 그만하고, 먹자."

송유주는 잠이 덜 깬 얼굴로 테이블을 치우다 문득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진정한?"

"……신선한입니다."

대체 언제쯤 내 이름을 제대로 외우시려나.

설마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니겠지?

"아 선배님, 병동 스테이션에서 방황하고 있길래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저희끼리 다 먹기에는 조금 많을 것 같아서요."

"그래, 잘했어."

"히히."

안경식 선생이 히죽 웃으며 테이블 위에 음식을 풀어놓는다.

그러다 문득 불안한 표정으로 송유주에게 묻는다.

"선배님, 그나저나 제 이름은 제대로 기억하고 계신 거 맞죠? 저희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설마……."

"안경."

"……흑."

"정신 사납게 서 있지 말고 앉아서 먹기나 해."

안경 선생은 서글픈 표정으로 소파에 앉으며 포장을 풀었다.

나도 그 옆에 자리를 잡고 포장된 음식을 세팅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자, 언제 울적했냐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거는 안경 선생이다.

"그러고 보니 서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 나는 안경식이라고 해."

"신선한입니다."

"알지. 너 유명하더라! 레지던트 1년 차인 나도 쩔쩔매는 일을 벌써부터 척척 해낸다면서?"

"아닙니다."

나는 종이컵에 음료수를 따르며 멋쩍게 웃었다.

조금 어색할 수 있는 자리.

하지만 안경식 선생이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은 덕분에 나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여기 족발보쌈이 진짜 맛있거든. 오늘 좋은 거 하나 배워 간다 생각하고 먹어 봐."

그렇게 맛있다고?

나는 레지던트들이 먹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난 뒤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족발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와…….

충격이다.

쫀득하고 기름진 고기가 혀 위에서 살살 녹는다.

세상의 근심 걱정이 잠시 사라지는 듯한 맛이다.

잠깐 내가 병동으로 올라왔던 본연의 이유를 망각할 뻔했다.

"어때?"

"장난 아니네요."

내가 감탄하자, 안경식 선생은 히죽 웃으며 막국수를 비비며 말했다.

"그치? 여기가 송유주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족발집이야."

"그런 쌉소리는 왜 하냐. 얘가 알아서 뭐 하게?"

응? 고급 정보다.

이거는 류명인한테 알려 주면 좋아 죽을 거 같은데?

나는 잠시 이 정보를 류명인에게 팔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만약 알려 주면, 걔는 삼시 세끼 족발만 사 와서 상납할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앞으로 이런 맛집이 궁금하다면 나에게 물어보면 돼! 내가 흉부외과 지식은 아직 딸리지만, 근방의 배달음식 맛집 정보는 꽉 잡고 있거든!"

"자랑이다."

송유주 선생이 옆에서 핀잔을 주자 안경식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송유주 선생님도 야식 같은 걸 먹는구나.’

나는 맞은편의 송유주 선생을 힐끗 바라보았다.

신기했다.

로봇 같은 이미지 때문인가.

왠지 밥도 정시에 정해진 영양분만 섭취할 것 같은 인상인데…….

알고 보면 송유주도 평범한 사람인 모양이다.

"그런데 아까 병동에서 뭐 하던 중이었어? 안 좋은 환자 있는 거 아니지?"

안경 선생이 내게 묻는다.

안 그래도 질문을 할 만한 적절한 타이밍을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곧바로 말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어서 레지던트 선생님들께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뭔데? 말해 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최대한 자연스러운 이유를 대야 한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아까 우연히 검색엔진에서 폐 사진을 봤는데, 폐 전체가 완전히 검은색이더라구요. 도대체 어떤 경우에 그렇게 되는지 궁금해서요."

그러자 두 사람이 희한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심해에서 발견된 미지의 생명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다.

"그게 다야?"

"예."

"그게 궁금해서 이 시간에 병동에 왔다고?"

"아…… 궁금한 게 있으면 잠을 못 자는 성격이라서요."

"푸하."

안경 선생은 재밌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너 좀 특이한 캐릭터라는 얘기가 많던데, 그게 사실이었구나. 아무튼 폐 전체가 시커멓다고?"

"예."

"담배 많이 피운 사람들은 폐 겉면에 검정색이 얼룩덜룩 많이 보이기는 할 텐데."

안경 선생이 추측을 시작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폐가 까맣다고 하면, 보통은 심한 흡연 때문에 생긴 까만 반점으로 뒤덮인 폐를 떠올리게 되니까.

하지만, 아니다.

나도 담배를 많이 피운 사람의 폐가 어떤 모양인지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꿈속에서 내가 본 이미지는 조금 달랐다.

더군다나 담배를 입에 대 보지도 않은 송이의 폐가 2주 만에 그렇게 변했을 리도 없지 않은가.

남은 2주 내내 담배를 물고 살아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저분한 검은색 반점이 아니라, 아예 폐 전체가 균일하게 검은색이었어요."

내 말에, 안경식 선생이 의아해하면서 말을 이어 갔다.

"흠…… 아니면, 튜머(tumor, 종양)가 너무 크게 되면, 그 안쪽이 괴사되면서 흑갈색의 진흙같이 변해. 그래서 폐가 있어야 할 자리에 튜머가 까맣게 보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꺼먼 진흙같이 보였던 건 아니고?"

종양?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송이 폐에서 2주 만에 종양이 그렇게 크게 자랐다고?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종양이 있었다면, 며칠 전 수술할 때 진작에 보였겠지.

나는 질문을 이어 갔다.

"네,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다시 사진을 찾아보려 해도 검색이 잘 안되더라구요."

"흐음."

"혹시 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나요? 피가 안 통하면 그렇게 까맣게 되는 경우도 있는가 싶어서요."

"글쎄……?"

안경 선생은 자신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무리였나?

말로만 설명하려니 한계가 있다.

이건 마치…….

말로만 인상착의를 설명한 뒤,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송유주 선생이 말했다.

"토젼(torsion, 비틀림)."

"예?"

"로바 토젼(lobar torsion, 폐엽의 뒤틀림) 되면 그 정도로 썩을 수 있지."

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그때 안경식 선생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선배님, 토젼이라뇨?"

"처음 들어?"

"어, 예전에 배웠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선배님이 설명해 주시면 금방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헤헤."

"쉽게 말하자면."

송유주는 옆에 있던 포장용 비닐봉지를 들었다.

그리고 바람을 집어넣어 빵빵하게 만들고는 말했다.

"이게 환자의 폐야."

꾸깃!

갑자기 송유주는, 마치 닭 목 비틀듯 봉지의 입구를 한 바퀴 돌렸다.

"만약 환자의 폐가 제자리에 얌전히 있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어?"

"아아……."

"공기도 통하지 않고, 피도 통하지 않겠네요."

우리의 말에 송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기가 통하지 않는 건 당연하고, 피가 돌지 않아 조직 자체가 점점 썩게 되지. 이걸 폐가 돌았다고 표현해."

그제서야, 비로소 꿈속에서 들었던 여봉철과 마동섭의 말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완전 돌아 버린 거 아이가?>

<돌았네.>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그냥 감탄사인 줄 알았는데…….

문자 그대로, 폐가 몸속에서 한 바퀴 돌아 버렸다는 뜻이었다.

‘그래.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야!’

송이는 현재 폐의 3분의 1을 잘라 낸 상태다.

즉, 폐 근처에 원래는 없었던 ‘빈 공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그만큼 폐가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남아 있던 오른쪽 폐가, 예기치 않게 비틀려서 돌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와, 선배님,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어요? 전 여태까지 그런 환자 한 번도 못 봤는데."

"있지. 특히 우상엽 절제 수술 받고 나서, 우중엽이 도는 경우가 흔하지."

나는 송이가 받은 수술을 떠올렸다.

송유주 선생님이 지금 방금 말했던 바로 그 수술이었다.

‘송이도 우상엽 절제술을 받았었어!’

퍼즐이 맞춰졌다.

정답을 찾은 것 같다.

곧이어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을 안경식 선생이 바로 질문했다.

"그럼 토젼이 되면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당연히 응급 수술 해야지."

송유주 선생이 대수롭지 않은 듯 간단히 대답한다.

나는 질문을 이어 갔다.

"선생님. 그렇다면 만약 토젼이 된 상태에서 너무 늦게 치료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왜. 아는 환자야?"

"……예?"

"진짜 그런 환자가 있어서 걱정하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잖아."

송유주 선생의 눈빛은 추리 만화의 명탐정처럼 예리하게 빛나며 나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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