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숨(breath)(15)
‘또 시작됐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런 경우, 무언가 안 좋은 미래가 보일 때가 많으니까.
곧 내 눈앞에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풍경이 펼쳐졌다.
학교 복도.
교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다.
힐긋 창문 너머로 살펴보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시험지에 집중하고 있다.
아마도 시험 시간 도중인 모양이다.
‘갑자기 학교로 이동했다는 것은…….’
혹시 송이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
내가 최근에 만난 교복을 입을 만한 학생은 송이 환자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서 송이를 찾아야 한다!
자칫하면 정보를 얻기도 전에 <꿈>이 끝나 버릴 수도 있다.
스윽―
나는 문을 통과하여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꿈속이라 이런 것도 가능하군.
이제 꿈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나름 익숙해졌다.
사각, 사각―
교실은 조용하다.
종잇장 넘기는 소리와 펜을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학교는 정말 오랜만에 와 보네.
고등학교 졸업하고 거의 10년 만인가?
잠시 추억에 잠겼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지금 딴생각에 한눈팔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서두르자.’
나는 학생들의 얼굴을 한 명씩 확인했다.
그런데…… 교복 입은 학생들은 왜 다들 비슷하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책상 위에 코를 박고 잠들어 있는 학생은 얼굴을 확인할 수도 없다.
‘분명 이 중에 송이가 있을 텐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흐으……."
우뚝―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창가 구석 자리에 몸을 쭈그리고 있는 여학생이 보인다.
익숙한 실루엣.
교복 차림의 송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송이가 왜 저러지. 어디가 아픈 걸까?’
안색이 안 좋다.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다.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펜을 붙들고 마지막 한 문제까지 집중하려 노력하고 있다.
따르르르―
종소리가 들리고, 시험지와 답안지가 앞으로 거두어진다.
와글와글―
곧 학생들은 서로 답을 맞춰 보거나 화장실로 달려간다.
그런데 송이는 책상에 엎드려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양송이, 괜찮아?"
"얘 왜 이래?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친구들이 송이의 상태를 눈치채고 모여든다.
"아냐. 괜찮아. 한 과목만 더 치면 오늘 시험 끝나잖아……."
송이는 힘겹게 말한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송이의 안색을 자세히 살폈다.
‘얼굴빛이 평소보다 노랗고, 식은땀 범벅이야. 호흡은 또 왜 저렇게 빨리 쉬고 있지?’
기흉이 재발한 건가?
단순한 기흉으로 이렇게 되지는 않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기흉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무언가가 시작된 것일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송이의 친구가 말했다.
"너 일주일 전부터 아팠다면서 해열제만 먹어도 되는 거 맞아? 병원에서 오라는 날에도 안 갔다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일주일 전부터 아팠다고?
그 말은 즉…….
시험 기간 내내 아파하면서도 병원에 오지 않았다는 소리다.
‘젠장, 시험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이건 아니잖아!’
그렇게 다그치고 싶지만, 꿈속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얘들아, 나 병원 가 봐야 될 것 같……."
쿨럭―
송이가 말하다 말고 기침을 한다.
그러자 친구들이 기겁하며 놀란다.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고 있다.
털썩―
송이는 결국 바닥에 쓰러진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송이야!"
"야, 선생님 불러!"
친구들이 사방에서 모여든다.
교실에서의 장면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꿈속 배경이 바뀐다.
연국대병원 응급실.
덩치가 커다란 의사가 복도를 달리고 있다.
마동섭이 급하게 응급실에 도착한 뒤 여봉철에게 말을 건다.
"양송이 환자 인투베이션(intubation, 기관내삽관) 했다고?"
"그래, 방금 CT 찍으러 갔다."
인투베이션?
그 말은 즉, 치명적인 응급 상황까지 갔다는 소리다.
나는 덩치 브라더스가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니 체스트(chest, 흉부) 엑스레이 봤재? 이거 봐라, 허어옇다! 수술하고 며칠 만에 이렇게 되기도 하나?"
"안 그래도 보고 오는 길이다. 이 정도까지 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마동섭은 말끝을 흐렸다.
여봉철이 EMR(전자의무기록)을 계속 확인하며 말한다.
"애초에 퇴원을 너무 빨리 시킨 거 아이가? 퇴원하는 날에도 CRP(염증수치) 높고, 열도 좀 났던데."
여봉철의 지적에 마동섭이 한숨을 쉰다.
"우리도 답답해. 퇴원하고 외래에 딴사람들보다 일찍 오라고 예약 잡아 줬는데 안 왔단 말이야."
"외래 날짜가 언제였는데?"
"저번 주 월요일."
"어허이."
여봉철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만 일찍 왔었어도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겠네."
"누가 아니래."
두 사람은 착잡한 표정이다.
굳이 자세한 내용을 듣지 않더라도 현재 송이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그때, 여봉철이 모니터 앞에서 방금 이미지가 올라온 CT를 클릭하면서 말한다.
"CT 떴다!"
곧 마동섭이 여봉철의 마우스를 가로채고 휠을 돌리며 CT를 살펴본다.
"줘 봐."
"에헤이. 같이 좀 보자."
휙휙―
모니터 속 CT 사진이 초 단위로 바뀌면서 송이의 현재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나는 화면을 쳐다보려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덩치가 너무 크다.
커다란 바위틈에 낀 도마뱀이 된 듯한 기분이랄까?
‘안 보여!’
같이 좀 봅시다!
나는 두 사람의 어깨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심각한 대화는 이어지고 있다.
"이거, 완전 돌아 버린 거 아이가?"
"돌았네."
"이라믄 우째야 되노?"
"한상기 교수님한테 빨리 말씀드리고 응급 수술 잡아야겠다!"
타닥―
마동섭은 곧 콜폰을 붙잡고 응급실 스테이션을 나섰다.
그제서야 나는 모니터 화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CT 화면에서 보이는 영상은 내가 기존에 봤던 영상들과는 너무 달랐다.
그때, 갑자기 다시 공간이 일그러진다.
‘잠깐, 너무 빠르잖아! 아직 CT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
파앗―
세 번째 공간은 수술방이다.
분위기가 심각하다.
마스크를 쓴 의사들이 수술에 열중하고 있다.
비록 눈밖에 보이지 않지만, 내 앞에 보이는 작은 체구의 사람이 송유주 선생님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한상기 교수가 집도의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은 수술 필드(field, 수술 부위)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나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서 수술 필드를 바라보았다.
‘헉!’
폐가 완전히 까맣다.
나는 비록 수술방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폐의 원래 색깔이 분홍색인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폐는…….
숯덩이처럼 시커멓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누런색 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런 건 처음 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벽에 붙어 있는 칠판에 적힌 환자의 이름을 확인해 보았다.
<17/F 양송이>
송이의 폐가 저렇게 까맣게 되어 버렸다고?
말도 안 돼!
불과 며칠 동안 저렇게 변할 수가 있나?
그때, 머리 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마취과 선생님이 고개를 들고 외친다.
"혈압 유지가 쉽지 않습니다!"
마취과 선생님의 표정이 심각하다.
한상기 교수가 필드에서 바삐 손을 움직이며 대답한다.
"네크로시스(necrosis, 괴사)가 심하네요. 아마도 전신에 균이 퍼진 것 같아요. 조금만 버텨 주세요!"
그러고는 잠시 후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러니까 오라고 할 때 왔어야지! 이 상태로 도대체 얼마나 있었던 거야!"
파앗―
한상기 교수님의 한탄을 뒤로하고, 그렇게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 * *
그날 밤.
나는 숙소 책상에 앉아 태블릿 PC로 흉부외과 전공서적을 다운받았다.
낮 동안은 일에 치여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지금은 조용한 환경에서 집중할 수 있…….
"쿠르르르―"
……지는 않구나.
근욱몬이 이층 침대에서 코를 골고 있다.
코 고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흉부외과 책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겼다.
책의 제목은 .
몸은 피곤해서 바로 침대에 눕고 싶지만, 정신은 아직 또렷하다.
꿈속에서 잠깐 보았던 이미지가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폐가 그 정도로 단기간에 시꺼메질 수 있는 거야?’ 원인을 찾아야 대비를 할 수 있을 텐데…….
일단 차근차근 살펴보자.
나는 폐 절제 수술 후 나타날 수 있는 대표적인 합병증들을 살펴보았다.
부정맥.
호흡기 감염.
상처 벌어짐.
등등…….
그렇게 한동안 ‘수술 후 합병증’ 챕터를 열심히 읽어 보았다.
하지만 폐를 그렇게 까맣게 만들어 버릴 만한 합병증은 찾을 수 없었다.
"돌겠네."
후우.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덩치 브라더스 선생님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돌아 버린 거 아이가?>
<돌았네.>
그건 그냥 감탄사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손끝에서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갑자기 이층 침대에서 근욱이가 튀어 올랐다.
"움컵컵!"
콰앙!
근욱이는 펄쩍 뛰어오르더니 천장에 이마를 박았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깜짝이야. 잘 자다가 왜 그래?"
"악몽 꿨다."
"악몽?"
"꿈속에서 내가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였거든. 그래서 외계인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동료인 줄 알았던 선한이 네가 사실은 정체를 숨긴 외계인 끝판왕이었어…… 나쁜 놈……."
근욱이가 잠이 덜 깬 채 헛소리를 시작한다.
네 무의식 속의 나는 대체 어떤 모습인 거냐?
‘그런데 괜히 뜨끔하네.’
어쩌면 근욱이가 눈치가 빠른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 미래예지 능력을 남들에게 숨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외계인 같은 건 아니지만.
그때, 근욱이가 갑자기 다리를 부여잡으며 말한다.
"야야. 다리 쥐 났어. 피 안 통한다."
잠깐.
피가 안 통한다고?
근욱이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신경이 쓰인다.
왜일까.
그 속에 뭔가 힌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야야, 피 안 통한다니까. 나 다리 좀 주물러 줘."
근욱이가 쩔쩔매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피가 안 통한다…….
피가 안 통한다고……?
‘그래. 폐에 오랫동안 피가 돌지 않았다면 그렇게 폐가 까맣게 썩어 버릴 수도 있겠지!’
확인해 보자.
어떻게?
가장 빠른 방법은 물어보는 것이다.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나는 가운을 챙겨 입고 숙소 문을 나섰다.
"야, 어디 가냐?"
"병동 좀 잠깐 다녀올게."
"다리 좀 주물러 달라니까?"
"코에 침 발라."
"크윽, 매정한 놈…… 역시 저놈은 빌런이 틀림없어."
나는 근욱이가 헛소리를 하는 것을 뒤로하고 흉부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