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숨(breath)(11)
스륵―
나는 체스트 튜브 세트를 열었다.
곧 종이에 싸여 있던 의료기구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메스, 모스키토, 켈리, 포셉, 니들홀더 등등…….
여러 기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크으."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섬세한 의료도구들.
게다가 연국대병원은 작은 도구 하나도 고가의 제품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고급스러움의 향연이었다.
"연국대병원 오길 잘했다."
나는 잠시 부자가 된 듯한 기분에 취했다.
설렌다.
어떤 명품을 언박싱해도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남들은 옷, 시계, 신발, 전자기기 등등이 로망이라지만…….
정작 내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이런 의료기구들이다.
하루빨리 이런 도구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다.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능력을 테스트해 보기로 했잖아?’
잠시 취해 있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실험해 보자.
나는 메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먼저 블레이드 홀더(blade holder, 칼집)에 칼날을 끼워 메스를 조립했다.
그리고 허공의 무언가를 가르는 시늉을 해 보았다.
"……."
파앗―
하고 무언가 시작되었을까?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손은 그냥 허공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뻘쭘하네.
주위에 아무도 없기에 망정이지, 누가 보면 웃었을 것이다.
‘분명 그때는 메스를 쥐고 환자에게 가져다 대려는 순간 눈앞에 영상이 스쳤는데…….’
다시 한번 같은 자세를 취해 보지만 내 눈앞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조건이 뭐지?
환자가 있는 실제 상황이어야 되는 걸까?
아니면 무작위로 발생하는 걸까?
수많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일단 정리를 해 보자.’
나는 메스를 내려놓고 차분히 생각했다.
여태까지 내가 가지게 된 능력을 분류할 시간이 필요했다.
첫째.
편의상 <꿈>이라고 부르자.
느닷없이 시간이 멈추며, 완전히 현실과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보통 이럴 땐, 무언가 안 좋은 미래를 보는 경우가 많다.
둘째.
편의상 <비전>이라고 부르자.
이때 공간이동은 일어나지 않지만, 눈앞에 슬라이드처럼 영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딱 한 번뿐이었지만, 이때는 시술 과정을 미리 볼 수 있었다.
‘현재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꿈>과 <비전>, 이렇게 두 가지인 것 같아.’
저번에는 미처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 능력들을 컨트롤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백의신 같은 의사가 되겠다는 내 목표를 더 빨리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에라. 관두자."
내가 언제부터 무슨 대단한 초능력자였다고?
나는 의사다.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 수수께끼 같은 능력에 의존할 수는 없지.
어디까지나 외과의사의 기본은 의학 지식과 손 기술이다.
‘기본에 충실하자.’
잡생각은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기왕 기구들을 빌린 김에 연습이나 하기로 했다.
나는 손잡이 부분이 금빛으로 코팅되어 있는 니들홀더(needle holder)를 손에 쥐었다.
‘니들홀더를 다룰 때는 생각보다 악력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 만약 장시간 수술을 한다면 손에서 힘이 풀릴 수도 있겠어.’
근욱이에게 악력 트레이닝이나 받아 볼까?
나는 가운을 벗어서 처치실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으로 된 방포 위에 연습을 시작했다.
스윽―
사악―
니들홀더를 이용한 수처(suture)와 기구 타이(instrument tie)를 여러 번 반복했다.
‘천에만 실습해 보는 건 조금 아쉽네…… 사람의 피부와 질감이 너무 달라.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쓰는 연습용 패드가 있다고 들었는데, 마동섭 선생님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 연습에 몰두하고 있을 때.
따르르르―
콜폰이 울린다.
잠시 시간을 잊고 있었던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수십 분이 지나 있다.
그러고 보니 점심밥 먹는 것도 잊고 있었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송유주 선생님?"
나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송이 환자 수술은 잘 끝났을까?
인턴인 나로서는 수술방 안쪽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알 수 없다.
곧 무뚝뚝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좋은 소식, 나쁜 소식.>
좋은 소식, 나쁜 소식?
그러니까, 뭐부터 듣겠냐는 거지?
왠지 불안하다.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하면 대체로 반가운 소리는 나오지 않는단 말이지.
"좋은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은이 수술 잘 끝났다.>
"은이요?"
<송은이 환자.>
"……양송이 환자 말씀하시는 거죠?"
<어, 아무튼 그 환자.>
어김없이 이름을 헷갈리는 송유주 선생.
목소리는 약간 기운이 빠져 있다.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수술방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거의 녹초가 된다.
특히 탈곡기 교수님 수술방이라면 더하다.
탈곡기 교수님은 수술 중에 예민 보스로 소문이 자자하기 때문이다.
대신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해서,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환자들도 제법 있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나쁜 소식은 뭡니까?"
"네?"
나는 조금 놀랐다.
바로 병동으로 온다고?
보통 송이가 시행받은 엽절제술과 같은 수술은, 수술받은 당일에 중환자실에서 케어를 받게 된다.
아무래도 당일에는 출혈 등의 여러 가지 합병증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송이의 경우에는,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뭘 놀라? ICU에 자리 없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긴…….
한 달 전.
나는 간호사 차유리 선생과 함께 ICU에서 일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도 흉부외과 중환자실은 항상 북새통에 만원이었다.
자리가 없을 때는 다른 중환자실의 자리를 빌려야 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제일 문제없을 것 같은 환자를 바로 병동으로 올려 보낸다.
이번에는 젊고 건강한 양송이 환자가 첫 번째 선택지가 된 것이다.
‘그만큼 주치의인 내가 열심히 케어해야 되겠구나.’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잘됐다.
송이 환자는 특별하다.
내가 처음으로 칼을 댄 환자니까, 가급적 내가 세세하게 신경 써 주고 싶다.
무사히 퇴원하여 다시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럼 송이 환자 받을 준비 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여기서 수술 다 끝나면 6시쯤일 거야. 이따 올라갔을 때 환자 상태 이상하면 가만 안 둔다.>
"예."
뚝―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가 끊긴다.
그런데…….
좀 막막하다.
송유주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수술 직후의 환자를 내가 케어하는 건 처음이잖아?
‘얼른 준비해야겠어.’
다행히 나에게는 약간의 준비시간이 주어져 있다.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제일 먼저 같은 층의 마취과 회복실로 이동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두 시간가량 마취에서 깨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하루하루가 스파르타네."
나는 급히 수술도구들을 다시 종이에 싸며 처치실을 나섰다.
* * *
잠시 후.
나는 병동으로 돌아와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때마침 병동에 있던 마동섭 선생에게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바이탈(vital sign) 관리가 기본이지."
첫째도 바이탈.
둘째도 바이탈.
아무튼 바이탈이 핵심이다.
수술 첫날이니만큼 바이탈의 변동성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말이 쉽지, 판단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
혈압이 떨어진다?
심박수가 빨라진다?
똑같은 현상이라도, 원인은 수십 가지다.
그냥 찻잔 안의 산들바람일 수도 있고, 태풍이 오기 전의 전조일 수도 있다.
"수술 후에는 보통 심박수가 빠르고 혈압이 높은 경우가 많은데, 통증 조절만으로 괜찮아지는 경우가 많아."
만약 예상되는 바이탈을 벗어나는 경우, 당직 레지던트에게 연락해야 한다.
"그리고 또……."
헉헉.
눈이 팽팽 돌아간다.
마동섭 선생님은 투머치 토커였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이기에, 하나도 빠짐없이 귀에 새겨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지났고, 콜폰으로 송이의 병동 도착 노티(notification, 연락)가 왔다.
<인턴 선생님, 양송이 환자 병동으로 온다고 회복실에서 연락 왔습니다. 처방 부탁해요~>
나는 양송이 환자가 회복실에서 병동으로 전실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환자를 보기 위해 병실로 갔다.
저벅―
나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송이 부모님들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보호자에게 짧게 인사한 뒤 송이에게 다가갔다.
"송이 환자. 괜찮아요?"
그러자 막 수술을 끝내고 온 송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코에 산소줄을 꽂고 있다.
머리카락은 산발이다.
입 주변에는 피와 섞인 침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인투베이션 과정에서 약간의 피가 묻어 나왔으리라.
흉관에 소변줄까지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습은, 송이가 만만치 않은 수술을 견디고 왔음을 알게 해 준다.
그렇게 침대에 붙어 하나가 되어 있던 송이는 나를 발견하자 생긋 웃음을 짓는다.
"선생님……."
"괜찮아요? 많이 아프죠."
"진통제 맞고 나니까 괜찮……."
송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갑자기 표정을 찡그린다.
입을 벌려 말을 하려니 가슴이 더 아픈 모양이다.
"지는 않구요……."
마취가 완전히 깨지는 않은 송이는 몽롱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간다.
"근데 너무 신기했어요. 잠깐 눈 감았다 뜨니까 다 끝나 있어서……."
"내가 수술 잘 끝날 거라고 했잖아요."
"헤헤."
송이는 힘없이 웃더니 산소줄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근데 선생님…… 이거 빼면 안 돼요?"
"지금은 달고 있어야 돼요. 좀 불편해도 참아요."
"제 얼굴 안 그래도 오징어인데…… 코에 이거까지 달고 있으면 너무 못생겼잖아요……."
간호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웃음이 나왔다.
이 와중에 얼굴이 신경 쓰이나?
하여간 웃긴 아이다.
"선생님 앞에 이런 모습 보이기 싫은데, 헤헤. 아 맞다. 난 반진호 오빠밖에 없지……."
뭐라는 거야?
아무 말 대잔치다.
마취가 덜 깨, 마음속에서만 맴돌아야 할 대사들이 마구 밖으로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오늘은 수술 끝난 날이니까, 편하게 쉬고 심호흡만 열심히 해 주면 돼요. 가래 나오면 뱉어 주고, 피가 좀 섞여 나와도 놀라지 말고."
"네에."
"고생했어요."
나는 송이를 다독여 주었다.
* * *
그렇게 양송이가 나온 지 4시간이 지났고, 송유주 선생님이 퇴근 전에 병동에 들러 환자의 상태에 대하여 체크해 주었다.
저녁 8시.
막 일을 마치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오는데, 간호사들 몇 명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독하다 독해……."
"애를 잡네 잡아."
애를 잡는다니?
나는 스테이션에서 수다를 나누고 있는 간호사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송이 환자 어머니요."
송이 어머니가 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내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아낀다.
"아무리 그래도 수술 첫날인데…… 이따 병실 가 보시면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송이가 회복실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설마 또 등짝 스매싱을 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송이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아니…… 송이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