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숨(breath)(2)
사람이 많은 지하철이라서 그런 걸까?
아까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놀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별거 아니겠지.’
송이는 다시 스마트폰 화면에 열중했다.
커뮤니티에는 이미 아이돌을 영접한 팬들의 간증 후기가 파도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단콘 쩔었다ㅠㅠㅠ 죽어도 여한이 없음.
―활동 당분간 이걸로 마지막이래잖아요…… 다음 활동까지 어떻게 또 기다림?
―그래서 다들 이번 막콘 기를 쓰고 간 거잖아요. 표 구하는 데 진짜 힘들었음.
―저 LA에서 왔어요 ㅋㅋㅋ 한국 땅 3년 만에 밟는데 그 이유가 탄산소년 때문임.
―저는 부장이 갑자기 야근하래서 배 째라 하고 도망쳐 나옴ㅋㅋㅋ다들 난리였다.
송이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보며 질 수 없다는 듯 스마트폰에 입력했다.
―저 고3 수험생인데 학원 특강 째고 달려갔어요 ㅠㅠ―헐 ㅋㅋ 송이버섯님 그래도 괜찮아요?
―저번에 부모님이 엄청 무서우시다 하지 않았어요?
온라인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관심을 주었다.
―괜찮아요 ㅠㅠ 그래도 탄산소년 봤으니까 죽어도 여한이 없음!
송이는 텍스트를 입력한 뒤, 한숨을 쉬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오늘 특강은 꽤 비쌌던 것으로 알고 있다.
대치동 1타 강사의 특강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부모님 말을 거역하고 내 맘대로 행동했어…….’
두근, 두근.
막상 저지르고 나니 가슴이 떨린다.
마치 쳇바퀴를 돌듯 집과 학교, 집과 학원을 반복하는 일상.
갑갑한 일상에서 탄산소년은 유일한 해방구였다.
물론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 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허락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1년 전, 이미 방에 붙여 놓은 탄산소년 포스터가 갈기갈기 찢긴 전적이 있다.
만약 그런 부모님에게, 하루만 놀고 온다고 말했다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아이돌 따위에 한눈을 팔아! 너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벼락보다 무서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뻔했다.
‘엄마 미안…… 지금처럼 공부할 수 있는 시기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거 알아. 그래도 한 번 지나간 오빠들 콘서트도 다시 오는 건 아니잖아!’
송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꽉 감았다.
그래, 괜찮아.
내일부터 다시 공부 열심히 하면 되잖아?
오늘 딱 하루만 일탈했으니까 다시 열심히 공부해야지.
서울대 갈 거야.
그리고 성공할 거야.
꼭 성공해서 우리 반진호 오빠랑 결혼해야지.
흐흐흐.
망상이 꽃을 피운다.
지금 송이의 머릿속은 ‘기―승―전―탄산소년’이었다.
그런데 가슴 불편감이 점점 심해진다.
이상한데?
곧 가슴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송이는 정신이 아득해진다.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옥죄고 있는 듯,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허억, 허억…… 이상하다…… 왜 이러지?’
설마 말이 씨가 된 건가?
아까 콘서트를 보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해서?
아이 씨…… 그렇다고 죽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고개를 푹 숙이고 헐떡이고 있자, 지하철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학생,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사람 불러 줄까요? 지금 빨리 내려서 병원에……."
"아, 안 돼요."
송이는 입술이 파래진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여기서는 안 돼!
아직 사당역.
적어도 강남까지는 가야 한다.
대치동 학원에 잡혀 있던 특강을 째고 왔기 때문이다.
‘여기 근처에서 병원 가면, 나중에 무조건 걸릴 거야.’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친구에게 대리 출석까지 부탁했다.
그런데, 만약 수업을 째고 콘서트를 뛴 걸 엄마 아빠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돋을 정도다.
‘참아 보자…….’
송이는 그렇게 30분을 넘게 참았다.
학원 앞 셔틀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무렵, 거의 좀비 같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리 출석 뛰어 줬던 친구가 기다리다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야, 양송이! 너 안색이 왜 그래!"
"어, 좀 아파……."
"괜찮아?"
"응. 출석 대신 해 줘서 고마워…… 나 집에 갈게……."
하지만 상태가 영 좋지 않다.
친구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야 안 되겠어 너 병원 가 봐야 될 거 같아. 구급차 부르자."
잠시 후.
왜애앵―
구급차가 덜컹거리며 달린다.
그럴 때마다, 안에 누워 있는 송이는 악을 썼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고통이 더욱 커지는 듯하다.
"환자분, 제일 가까운 병원이 연국대병원이에요. 거기로 이송할게요."
그 뒤로도, 구급대원들은 옆에서 이것저것 묻는다.
"환자분, 성함이랑 생년월일이 어떻게―"
"환자분, 구체적으로 통증이 어떻게―"
"환자분, 평소 질환이나 드시는 약―"
송이는 끙끙대며 대답한다.
가슴이 아프고 숨 쉬기가 힘들다.
17년 인생에 이렇게 괴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빨리 병원에 가서 편해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병원 도착했습니다. 거동 가능하세요? 일어나셔서 걸으실 수 있겠어요?"
"예……."
드르륵―
곧 구급차의 문이 열렸다.
송이는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깜짝 놀랐다.
처음 마주친 응급실 의사의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으데가 아프십니꺼?"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
산 도적 같은 얼굴.
연국대병원 응급실의 마스코트, 여봉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녀를 살폈다.
* * *
띠리리리―
띠리리리―
"으음……."
흉부외과 당직실.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커다란 곰처럼 덩치 큰 의사가 누운 채 뒤척인다.
오늘의 당직은 마동섭.
수술이 끝나고 당직실 침대에 뻗어 있던 그의 머리맡에서 콜폰이 계속 울린다.
띠리리리―
마동섭은 겨우 눈을 뜬다.
그러고는 전화기의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전화기 너머로 구수한 사투리가 들린다.
마동섭은 눈을 감은 채 당직실 침대에 누워 대답한다.
"네, 흉부외과입니다."
<고생 많십니다. 저희 뉴모(pnemothorax, 기흉) 환자 한 명 있어가 연락드렸심니더.>
왠지 말투와 목소리가 익숙하다.
이런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우리 병원에 몇 없을 텐데…….
마동섭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봉철이냐?"
<뭐고. 동섭이가?>
역시 사투리의 주인공은 여봉철이었다.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목소리가 별로 반갑지 않다.
마동섭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기흉 환자 왔다고?"
<그래. 목소리가 와 그리 피곤해 뵈노?>
"말도 마라. 오늘 수술만 열 시간 하고 뻗어 있었어."
<욕봤네.>
"욕봤지."
<근데 니 3년 차인데 아직도 당직 스나?>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당직이야. 오늘은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더만…… 나 좀 쉬자 봉철아."
<쉬기는. 퍼뜩 안 인나나, 시끼야.>
여봉철이 수화기 너머에서 으르렁거렸다.
동섭이는 피식 웃고 무거운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어떤 환자인데?"
마동섭은 이제야 잠에서 깨었는지 환자의 정보를 자세히 묻기 시작한다.
<17살 여자 환자인데, 특별한 히스토리는 없꼬. 학원 마치고 집에 갈라 카는데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대.>
"가슴이?"
<어. 가슴통증이랑 호흡곤란. 엑스레이 찍어 보니까 오른쪽 기흉이 있네.>
"어느 정도야? 레터럴(lateral, 폐 측면) 이랑 에이펙스(apex, 폐 첨부) 몇 센티미터 떠 있어?"
마동섭은 X―ray상에서 폐 첨부 및 흉벽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물어본다.
<그건 안 재 봤는데, 50% 이상인 것 같은데? 거의 토탈 콜랩스(total collapse)네.>
토탈 콜랩스.
한쪽 폐가 거의 짜부라졌다는 뜻이다.
체스트 튜브(chest tube, 흉관)을 넣어야 하는 상황임을 마동섭은 인식했다.
<체스트 튜브 넣을 준비 해서 연락 달라고 간호사한테 전해 줄까?>
"응…… 전해 주라. 금방 응급실 갈게."
<그래 이따 보재이.>
삐익―
마동섭은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는 응급실 간호사에게 전화가 올 때까지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려 다시 눈을 감는다.
띠리리리―
그때, 다시 콜폰이 울린다.
"아따…… 좀만 눈 감고 있다 가려 했더니, 누가 이렇게 찾나."
콜폰을 들여다보니, 신선한이다.
응? 이 녀석이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선생님, 오늘 마지막 수술 끝나고 병동으로 온 환자 X―ray 한번 봐주셨으면 하고 연락드렸습니다. 수술 들어갔었던 안경식 선생님이 당직 선생님한테 연락해서 확인받으라고 해서요."
오늘 오랜만에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한다며 들떠 있던 안경식이 수술 끝나자마자 병원을 나간 모양이다.
흉부외과 1년 차인 안경식은 이비인후과 1년 차로 일하고 있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서로 바쁘다 보니 오프를 맞추어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날은 정말 드물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안경이 아까 나가면서 나한테 뭐라 뭐라 부탁했던 게 이거구나.’
마동섭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음…… 그래? 잠깐만 전화기 잡고 있어 봐. 확인해 볼게."
마동섭은 침대 밖으로 나와 바로 옆의 책상 위에 있는 모니터 앞으로 흐느적흐느적 걸어간다.
잠시 엑스레이를 집중해서 보던 마동섭이 말했다.
"음. 이 정도면 문제없어."
<네, 감사합니다.>
신선한이 전화를 끊으려 하는 찰나, 마동섭의 머릿속에 무언가 갑자기 스쳐 지나간다.
‘신선한한테 체스트 튜브(chest tube, 흉관) 넣는 거 가르쳐 줄까?’
흉관삽관은 주로 흉부외과 레지던트 1년 차의 일이지만, 아주 가끔 인턴들에게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야, 신선한."
<네?>
"지금 바쁘냐? 응급실에 체스트 튜브 넣으러 가는데 따라와라."
마동섭은 이야기를 한 뒤 잠시 반응을 기다렸다.
예상대로, 곧 밝은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급한 일 없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응급실 앞에서 보자."
<네. 선생님. 바로 가겠습니다!>
신선한의 씩씩한 대답을 들으며 마동섭은 전화를 끊었다.
‘참 열심히 하는 녀석이란 말야…… 인턴 4개월째면 슬슬 풀어질 만도 한데.’
역시 에너지 있는 신입이 있으니 좋구만.
누군가 힘을 내면, 같이 일하는 사람도 상승효과로 힘을 얻게 되는 법이다.
어느새 잠은 달아났다.
마동섭은 가운을 걸치고 당직실을 나섰다.
* * *
첫 경험.
누구에게나 기억에 남는 처음은 있다.
처음으로 두발자전거를 타는 것을 성공한 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날,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한 날 등등…….
그리고, 오늘은 나름대로 나에게 첫 경험으로 기록될 날이었다.
"선생님."
"어, 신선한."
나는 응급실로 가는 길에 마동섭을 마주쳤다.
우리는 응급실로 함께 걸어가며 말했다.
"환자 차트는 봤습니다."
"응, 단순한 primary spontaneous pneumothorax (1차성 자발 기흉) 같아서, 일단 흉관 넣고 CT 찍어 볼 거야."
기흉을 치료하기 위한 흉관삽관.
흉부외과에서는 밥 먹듯이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제가 어시스트 서 드리면 되겠죠?"
"어시스트? 언제까지 어시스트로 만족할래? 그동안 옆에서 많이 봤잖아."
"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뉘앙스가 이상하다.
설마, 단순 어시스트를 바라고 나를 같이 가자고 한 게 아닌가?
나의 의아한 표정을 눈치챈 듯, 마동섭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