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흉부외과는 처음이지?(12)
"네, 인턴 신선한입니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곧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병동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안경식 선생님 체스트튜브 (chest tube, 흉관) 넣으시는데, 어시스트 필요하다고 인턴 쌤 불러 달라고 하네요.>
흉관삽관을 하는데 옆에서 보조해 줄 의사가 필요한 모양이다.
오랜만에 휴게실에서 동기들과 어울리며 쉴 수 있나 했더니만…….
역시 언제나 손이 부족한 흉부외과의 일은 밤중에도 끊이지 않는다.
"예,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즉시 대답하고 먹던 치킨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중원이 형이 픽 웃었다.
"징하다, 징해. 오자마자 다시 불려 가는 거야?"
"넵. 얼른 가 봐야죠. 치킨 잘 얻어먹었습니다."
"수고~!"
나는 대답 대신 콜폰을 꺼내어 흔들며 휴게실을 나섰다.
저벅, 저벅―
휴게실을 나와 병동으로 올라가는 길.
나는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했다.
현재 나에게는 중요한 두 가지 정보가 있다.
첫째. <흉부외과의 모든 레지던트가 병동을 비우는 순간>
둘째. 환자는 <저산소성 뇌 손상(Hypoxic brain damage)>에 빠지게 된다.
이 한정된 정보만으로 미래를 바꾸고 환자를 구해 내야 한다.
‘잠깐…… 생각해 보니 오히려 류명인이라는 변수를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관점을 바꿔 보자.
류명인은 꽤 쓸 만한 카드일 수도 있다.
명색이 과 수석 아니던가?
인턴 중에서는 가장 능력 있는 놈이라는 뜻이다.
공부를 잘하니, 그만큼 아는 것도 많겠지.
녀석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환자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사이코 같은 녀석이긴 하지만…….
어쩌면, 류명인과 힘을 합쳐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을 대비해서, 너무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며칠 후.
흉부외과 생활도 어느덧 2주 차.
나와 류명인은 나름대로 인턴생활을 잘 헤쳐 나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걱정했던 것만큼 서로 부딪힐 일은 많지 않았다.
엄연히 각자 맡아야 할 환자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요일 아침.
전체 회의가 끝나고 모두 해산할 무렵.
막 회의실을 나서는데, 한쪽에서 레지던트들끼리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송유주. 너네 인턴 두 명 일 잘한다고 소문났더라. 이번 기수 인턴 중에서 투톱이라면서?"
나는 시선을 슬쩍 돌렸다.
심장외과 쪽 레지던트들이 송유주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인턴 두 명이라니…… 설마 우리를 말하는 건가?
"그래 봤자 인턴이지."
송유주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자 레지던트들이 픽 웃으며 말했다.
"어이구, 배부른 소리 하네. 우리 파트 인턴들이 그 정도로 해 주면 나는 업고 다니겠다."
"심장 쪽은 어떻길래?"
"야야, 말도 마라. 이번 달 우리 쪽 인턴들은 완전 어리바리 까고 장난 아녀. 아직 프리옵(pre―operation, 수술 전) 오더도 제대로 못 내고 헤매고 있다니깐?"
그렇게 말하면서 레지던트들은 본관 쪽으로 걸어갔다.
멀찍이서 이 말을 듣던 심장 파트 인턴들은 잔뜩 기가 죽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반면, 나는 우연히 들은 말들에 어안이 벙벙했다.
<일 잘한다고 소문난 인턴>
<인턴 중 투톱>
그 정도인가?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잘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송유주 선생에게 칭찬 한 번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어쨌거나, 일을 잘한다는 평가는 꽤 고무적이다.
나도 모르게 뺨이 간질간질해진다.
"후후후……."
"깜짝이야."
내 웃음소리가 아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류명인이 내 옆에 나타나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방금 말 들었어요?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우리 얘기하는 거."
"그래. 네가 일을 잘해서 소문이 난 모양이다."
"형도 이제는 저를 인정하나 보네요?"
"응. 그래. 너 최고."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며칠 전부터, 나는 녀석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협력하기 위해서다.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놓으려면 이 정도 맞장구는 해 줘야겠지.
그러자, 녀석은 내 영혼 없는 리액션에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긴 제가 좀 남다르긴 하죠. 주머니 속에 송곳이 있으면 언젠가는 튀어나오기 마련이랄까?"
녀석은 언제나처럼 잘난 척을 했고, 나는 피식 웃었다.
‘이 녀석, 단순해서 다루기 쉽네.’
어떤 의미로는 순수한 녀석이었다.
그렇게 병동으로 올라가 한참 일하고 있을 때쯤, 송유주가 우리를 불렀다.
"인턴들. 이따 오후 3시 환자 보고 회의에 인턴들도 필참해야 하는 거 알지? 그때까지 인턴 잡 다 끝내. 회의 중간에 나간다고 쌉소리 하지 말고."
"예!"
우리는 군말 없이 송유주 선생의 말에 따라 착실히 움직였다.
여전히 칭찬이나 격려 한마디 없는 무뚝뚝한 말투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송유주 선생의 말투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저, 선배님!"
"왜?"
"이거 드세요!"
홰액!
갑자기 류명인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송유주에게 내밀었다.
뜬금없네…….
동그란 막대 사탕이다.
"송유주 선배님이 가장 좋아하는 딸기밀크맛 츕스라고 해서 제가 사왔습니다!"
류명인이 이번에야말로 자신 있다는 듯 말한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다면, 열한 번 찍는 또라이도 있는 법이다.
송유주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 사탕 끊었어."
"예?"
"치과 치료."
쌔앵.
송유주는 자리를 떴다.
류명인은 또다시 멍하니 남겨졌고, 나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몇 번을 봐도 꿀잼이네.
저거 어디까지 시도하나 보자.
* * *
예전에 마동섭이 인턴생활을 ‘튜토리얼’로 비유한 적이 있던가?
어찌 보면 그 말이 맞다.
마치 게임처럼, 인턴 잡에도 매번 도전 과제들이 있다.
오늘의 주된 미션은 <환자 퇴원시키기>.
환자가 퇴원에 임박하면 인턴들의 할 일도 많아진다.
흉관을 뽑는 작업은 물론.
퇴원 후 복용해야 하는 약들도 처방해야 하고, 필요한 진료 예약도 잡아야 한다.
거기에 퇴원 후 생활에 대한 환자 및 보호자들의 질문에도 답해 주어야 한다.
가끔 하루에 5명의 환자까지 퇴원시켜야 하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오늘은 다섯 명이나 퇴원 시켜야 하네. 빨리 일 처리를 해야 점심 먹을 짬이 생길 것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류명인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말한다.
"형, 저도 오늘 5명이에요. 퇴원 환자."
"아, 그래?"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를 곧잘 한다, 류명인은.
"마침 잘됐네요. 내기할래요? 누가 일 처리 빨리 하나."
"뭐?"
"시작해요!"
투다닥!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류명인은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또라이네, 이거.’
저놈은 뭐든지 경쟁으로 생각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내 페이스대로 일을 했다.
류명인의 내기 따위는 무시하고, 내가 퇴원시킬 환자들에게 다가갔다.
"환자분, 안녕하세요."
"예에."
"오늘 퇴원하실 거라, 가슴에 있는 관을 뽑아 드릴게요."
<흉관뽑기>는 생각보다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뽑는 과정에서 외부의 공기가 들어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흉관만 뽑아야 하는데 이 흉관이 다른 조직을 물고 나와도 안 된다.
나는 한 명, 한 명 신중하게 흉관을 제거했다.
환자들은 그동안 나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주치의 선생님, 나 때문에 너무 고생하셨네."
"제가 뭘요. 어머니가 수술받느라 고생하셨죠. 퇴원하면 꼭 건강하셔야 합니다."
"우리 선생님 보러 다시 오고 싶은데?"
"안 돼요, 어머니~ 다시 병원에 입원하실 일 없어야 좋은 거예요."
나는 웃으며 환자들의 퇴원 절차를 진행했다.
한 명, 한 명 신중하게.
그렇게 흉관을 뽑고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그러자, 보란 듯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류명인이 말한다.
"형, 제가 더 빨랐네요?"
그렇게 말하며 으스댄다.
초딩이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타이르듯 말했다.
"명인아. 엑스레이도 확인해야 하는 거 알지?"
흉관제거를 하고 나면 반드시 흉부 촬영을 해야 한다.
앞서 얘기했던 공기가 들어가거나, 출혈이 있는 상황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하죠. 제가 누구예요?"
류명인은 언제나처럼 자신 있는 표정이다.
물론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예전에 조진기가 일으켰던 사건도 있으니까.
‘혹시 모르니까 내가 확인해야겠다.’
잠시 후.
나는 스테이션에서 류명인이 흉관을 뽑은 환자들의 엑스레이를 확인했다.
"……실수 없이 잘하긴 했네."
별다른 이상이 없다.
저번에 송유주 선생에게 지적받은 이후부터 류명인은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
자신감도 넘친다.
물론 가끔 그 자신감이 과해서 불안해 보일 때도 있지만.
어쨌든 녀석은 꽤 민첩하고, 머리도 내가 본 동기들 중에서는 가장 좋다.
‘괜히 과 수석이 아니라 이건가?’
녀석은 조진기와 다르다.
조진기가 C급 이하였다면, 녀석은 A급 이상.
만약 우리 파트의 레지던트가 송유주 선생이 아니었다면, 분명 칭찬받는 인턴생활을 하고 있겠지.
‘이 녀석은 능력치가 뛰어난 놈이야. 이놈 걱정할 게 아니라, 내 환자나 걱정해야…….’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파앗―
눈앞이 캄캄해졌다.
미래가 보였다.
그런데, 여태까지 보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패턴이었다.
* * *
"후우."
병원 뒤쪽 담배터.
벤치에 앉은 송유주의 모습이 보인다.
담배 연기 한 줄기가 새벽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그 풍경이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동섭이 나타나 그녀를 향해 손을 불쑥 내민다.
"이리 내놔."
"……."
"담배 끊었다며? 매일같이 폐암 환자들 폐 보고 있으면 담배 피울 생각이 쏙 들어간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막 불붙인 거야."
잠깐. 이건?
분명히 예전에 한 번 보았던 미래다.
그런데, 이걸 왜 또다시 보여 주는 거지?
‘여태까지 똑같은 예지가 두 번 반복된 적은 없었는데…….’
재방송도 아니고, 뭐야?
나는 황당해하면서도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는 들었다. 너희 파트에서 일 났다며?"
"Hypoxic brain injury(뇌 손상)."
"어쩌다가?"
"하필이면 레지던트들이 전부 수술방에 들어가 있고 병동에 인턴들만 남았을 때 벌어진 일이라."
송유주가 씁쓸하게 말한다.
여기까지는 아직 바뀐 내용이 없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조금 달랐다.
"나도 그때 응급 수술 때문에 수술방에 있었는데, 어쩐지 느낌이 싸하더니만…… 병동에 나라도 남아 있었어야 했는데. 내 탓이다."
"어쩔 수 없었지."
"그래도 연국대 수석 인턴이라는 놈이 그런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에휴……."
잠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연국대 수석>이라는 놈이 사고를 친다고?
그 말은…….
사고를 치는 게, 내가 아니라 류명인이라는 소리다.
나비 효과.
그 결과가 지금 내 눈에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