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61화 (61/241)

#61 흉부외과는 처음이지?(9)

송유주는 기억을 떠올렸다.

4년 전, 어느 여름날.

그녀는 교수실에서 진로 상담을 받고 있었다.

<흉부외과에 오겠다고?>

<예.>

송유주는 고개를 끄덕인 뒤 눈앞의 교수를 바라보았다.

백의신 교수.

전설적인 외과의사.

그는 한때 송유주의 지도교수였다.

물론 지도교수의 역할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다.

학기에 한 번 정도, 밥을 사 주면서 형식적으로 진로를 상담해 주는 것뿐이다.

어느 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받을지, 어느 과에 관심이 있는지 등등…….

물론 송유주 정도의 인재라면 연국대가 아니더라도 어느 병원에서든 환영받을 것이다.

학창시절 이미 USMLE(미국 의사면허 시험) 과정의 대부분을 패스한 송유주라면, 미국에서의 트레이닝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연국대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수료한 뒤 흉부외과에 지원하려 합니다.>

송유주가 말했다.

그러자 백의신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대가리 총 맞았군.>

<……네?>

<다른 과 알아봐라, 아니면 해외로 뜨든가. 미국에 간다고 하면 내가 추천서 써 줄게. 내 추천서면 어디든 프리패스일걸?>

백의신은 하품을 했다.

과묵한 카리스마로 유명한 백의신.

하지만 실제 그의 성격은 조금 달랐다.

과묵하기보다는 약간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언제 무슨 말을 할지 예측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그 탓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백의신을 껄끄러워했다.

교수들조차 그러했으니, 학생들은 오죽했을까.

그나마 학생 중에서 백의신과 감히 ‘대화’ 비슷한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송유주가 유일했다.

<교수님, TV 방송에 나와서는 흉부외과 홍보하고 다니시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저보고는 왜…….>

송유주가 당혹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의신이 딴소리를 했다.

<야, 짜장면 왔다.>

<넵!>

옆에서 함께 상담을 받던 동기 남학생이 바짝 얼어 있다가 부리나케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곧 테이블 위에 투박한 배달 음식들이 펼쳐졌다.

한 학기에 한 번 있는 진로 교육에 고작 짜장면 배달이라니.

남들은 그래도 스테이크는 먹는다던데…….

송유주는 볼멘 표정으로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백의신은 짜장면을 비비며 말했다.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머리에 총상 입은 게 아니라면 흉부외과에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어설픈 동경으로 흉부외과 올 생각이면 때려치워. 한번 결정하면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니까.>

<…….>

<마치 이 짜장면이 한번 뿔어 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이 집에서 누가 시켰냐. 죽을래?>

<죄…… 죄송합니다!>

짜장면을 시켰던 동기가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백의신은 불어 터진 짜장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아무튼 수술방 인생을 요약하자면, 이 맛없는 짜장면 한 그릇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백의신의 설명이 이어졌다.

힘든 수술이 많은 과일수록 인생이 고달픈데, 그중에서도 흉부외과는 특히 응급수술과 힘든 수술이 많다.

밥을 한 입 먹다 말고 달려가야 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수술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으니 사람들이랑 다 같이 시켜 놓고, 수술 끝나고 가면 짜장면은 한 덩이로 굳어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비벼 먹는 게 아니라 떡 먹듯이 입으로 베어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지도학생이 조심스레 물어본다.

<그럼 간짜장으로다가…….>

<간짜장? 레지던트가 어디서 간짜장을 찾아. 정신 놨어?>

백의신이 노려보았다.

학생은 깨갱 하고 입을 다물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특이한 화법에 주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송유주는 그런 백의신의 건조하고 시니컬한 말투가 좋았다.

<웃어? 내 말이 농담 같냐.>

<아닙니다.>

송유주는 얼른 입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제멋대로인 백의신의 말투에 은근히 빠져들고 있었다.

세계 최고 권위자의 포스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너 같은 애들 흉부외과 왔다가 1년 만에 도망치는 경우 많이 봤다. 그럴 거면 애초에 올 생각 하지 말고…….>

백의신이 말하던 찰나.

전화가 울렸다.

따르르르!

<어. 뭐?>

백의신은 외마디 두 음절을 외치더니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그러더니 젓가락을 세차게 내려놓고 욕을 내뱉는다.

<아이 씨…… 환자 왔으면 왔다고 진즉에 얘기해야지, 이제 와서 바이탈 흔들린다고 전화하면 어쩌라는 거야! 대가리가 비었지 아주.>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온다.

그러더니 다 비벼 놓았던 짜장면을 한 입도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 진로 상담 끝!>

<저, 저는 아직 상담 안 해 주셨는데요……?>

송유주의 옆에서 짜장면을 입에 물던 남학생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도 본과 4학년이였나?>

<네…….>

<너는 알아서 잘 골라라. 생긴 거 보니까 응급의학과 어울리게 생겼다.>

<네? 사, 사실 저는 내과 쪽이…….>

<내과도 좋지. 훌륭하다.>

백의신은 남학생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를 떴다.

그렇게 가운 재킷을 휘날리며 교수실을 나서는 백의신의 뒷모습을, 송유주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왠지 멋있네.’

비록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대충대충 넘어갔던 진로 상담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오랫동안 선명하게 남았다.

그녀는 결국 연국대에서 인턴을 마친 뒤 흉부외과에 지원했던 것이다.

왜 그랬던 걸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번 넘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백의신이라는 벽을.

‘물론 그때는 몰랐지…… 백 교수님이 그렇게 빠르게 은퇴할 줄은.’

송유주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배신감이라고 해야 할까, 상실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한동안 허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걸 ‘현타’라고 하는 걸까.

마치 한참 마라톤 경주를 하던 중, 결승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러너(runner)의 기분이었다.

이미 달리기 시작한 것을 멈출 수는 없고, 공허한 길 위에서 목적지 없이 발만 움직이고 있는…….

어쩌면,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런 상태일지도 모른다.

<백의신 근황>

<백의신 위키>

토도독.

송유주는 핸드폰을 들어 검색창에 텍스트를 입력했다.

검색 결과는 옛날 뉴스들밖에 없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다.

심지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이제 기사도 별로 없네.’

송유주는 맥없이 눈을 깜빡였다.

국민 영웅?

허울 좋은 명예일 뿐이다.

한때 백의신을 영웅처럼 치켜세워 주었던 사람들은, 이제 별로 관심이 없다.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한 이후, 세상은 그를 빠르게 잊어 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던 와중.

송유주는 검색창에서 낯선 키워드를 발견했다.

‘이건 뭐야…… 백의신 워너비?’

한 얼굴이 보인다.

의사복을 입고 있는데, 앳된 얼굴이다.

분명 낯이 익다.

이번 달 인턴.

낮에 봤던 얼굴을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송유주는 가장 위쪽에 보이는 인터뷰 영상을 재생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의사가 되고 싶으신지?>

화면 속의 앵커가 묻는다.

그러자 잠시 후, 선한이 대답한다.

<매의 눈, 여인의 손, 사자의 심장…… 언젠가는 백의신 교수님이 이야기했던 그런 외과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송유주의 표정이 묘해졌다.

백의신을 동경해서 외과의사가 되고 싶다고?

‘나 말고 또 있었네. 대가리 총 맞은 놈이.’

피식.

송유주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곧 핸드폰을 머리맡으로 던져 버렸다.

애초에 타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성격이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약간 흥미가 생기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녀석 이름이 이상한이라고 했었지…… 앞으로 눈여겨봐야겠어.’

물론 그렇다고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자랑하는 그녀였지만…….

왜인지 유독, 주변 사람 이름을 외우는 데는 쥐약이었다.

* * *

첫 주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점심시간.

나는 밥 대신 잠을 택했다.

숙소에서 20분 정도 눈을 붙이고 복귀했다.

띠잉―

막 9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연서와 마주쳤다.

"선한 오빠. 몰골이 왜 그래요?"

연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알면서 왜 묻니."

"아니…… 생각보다 더 빨리 후줄근해지셨길래."

연서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장난스럽게 날 보는 두 눈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그러게 제가 말했죠? 흉부외과 한번 겪어 보면 알게 될 거라고."

"연서 너는 좀 살 만해졌어?"

내가 묻자, 연서가 장난스럽게 머릿결을 찰랑거린다.

일주일 만에 외모가 원래대로 돌아온 모습이다.

마치 정글 리얼리티쇼를 찍다가 음악방송으로 복귀한 아이돌을 보는 것 같달까.

"제 얼굴 바뀐 거 보면 모르겠어요?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QOL이 달라요."

QOL.

퀄리티 오브 라이프(Quality Of Life).

말 그대로 ‘삶의 질’을 뜻한다.

의사들이 환자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많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다.

그런데, 이 용어는 일상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실제로 한 사이트에서 인턴들이 순위를 매긴 적이 있었다.

<수련 후 QOL이 좋은 과는?>

조사 결과, 가정의학과 등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반면 외과 계열은 순위가 바닥이었다.

"어때요. 죽을 맛이죠? 3월에 같이 돌았던 내과가 차라리 낫다는 생각 안 들어요?"

"재밌어."

"재밌다구요?"

"응, 주치의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재미있어."

연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어본다.

"외과 계열이라 환자들도 무지막지하지 않아요? 대장(大腸)을 떼 와 가지고 식도로 쓰고 있는 환자도 있지 않나, 가슴에 이따아만 한 구멍이 뚫려 있는 환자도 있고."

연서는 구멍 크기를 주먹으로 그리며 이야기한다.

실제로 흉부외과에는 한쪽 폐를 절제한 뒤, 감염 관리를 위해서 성인 주먹만 한 구멍을 몸에 만들어 놓고 사는 환자들도 있다.

"그래서 더 재밌던데?"

나는 나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선한 오빠는 외과밖에 모르는 바보였지…… 이건 뭐 놀리는 보람이 없네, 참 나."

연서가 체념한 듯 한마디 내뱉는다.

나는 피식 웃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고작 일주일 고생하는 것으로 흔들릴 거라면 애초부터 목표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난 흉부외과가 재미있으니까.

* * *

"선한이 형, 오진세 환자 LFT(Liver function test, 간수치검사) 높던데. 협진 안 내세요?"

류명인.

이놈만 없으면 더 재밌을 텐데.

아침부터 남의 일에 고나리질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틀린 소리는 아니니까 봐준다.

내가 잠깐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에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까.

"검사 결과가 늦게 나왔는데 알려 줘서 고맙다. 웬일이냐, 날 도와주고?"

"이 정도는 여유라고나 할까요? 후훗."

저놈의 중2병 말투.

여전히 적응이 힘들다.

세상에 진짜로 ‘후훗’ 하고 소리 내서 웃는 놈은 처음 봤다.

"어차피 누가 월말에 좋은 평가를 받게 될지는 뻔한 싸움이니, 이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죠, 후훗."

"그래, 그래."

나는 류명인의 말을 적당히 무시하며 내 일에 집중했다.

하긴, 그래도 요즘은 녀석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긴 하다.

"안녕하세요!"

때마침 송유주 선생님이 등장한다.

류명인은 힘차게 인사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민다.

"선배님, 이거 받으세요!"

그러자 송유주가 냉랭하게 묻는다.

"뭐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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